칼럼
윗대태껸협회 2020.11.08 22: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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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시리즈는 나무위키 택견 항목을 되짚으면서 문제점을 찾아 본다.

 

택견은 다리를 사용한 전신 타격, 손을 사용한 타격, 꺾기, 찌르기, 상대의 옷을 붙잡고 하는 공격, 스탠딩 유술과 씨름 기술 및 관절기를 사용하여 상대방을 다운시키거나 무력화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격투기다.

 

위대태껸 기준, 그러니까 송덕기 큰스승님께서 전해주신 태껸의 전반적인 기예를 기준으로 설명하자면. 태껸은 전신을 사용한 타격을 한다. 무에타이가 8 limbs(8 부위), 레훼가 11부위의 기예라 칭하는데. 태껸은 12-13부위의 기예라 감히 칭할 수 있다.

 

다시 정리하면, 태껸은 12-13(논의 필요) 부위를 사용하여 타격, 꺾기, 조르기, 상대 옷을 붙잡는 등 스탠딩 유술과 소수의 그라운드 기술들을 사용하여 상대와 결투를 지어 패배를 인정하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격투기다. 라고 정의 할 수 있다.

 

그 기예의 연결에 스탭에 중요성이 고도로 집중되어 있어 다리를 이용한 공격과 방법들이 주를 이루며 교육에서 매우 중요하게 이루어 진다.

 


 

 

그라운드 기술은 없다. 1:1 싸움을 기본 진행 방식으로 하고 여러명이 팀을 이루어 1:1전을 연속하는 단체전의 형식도 갖고 있으며, 이 두가지 형식은 오늘날의 택견 경기에서도 채택하여 사용하고 있다.

 

약간의 그라운드 기술 역시 있다. 그러나 시대적 배경 특성상 그라운드가 현재 주짓수처럼 고도화되지 않았다. 

 

1:1 전을 연속하는 단체전을 한 것으로 사료를 통해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현재 경기 방식 자체만 채택이 되었을 뿐 과거의 형태에 가까웠는지는 아무도 모르고 기존 단체들 역시 경기에 대한 증언을 듣고 진행하는 것은 아니다.

 

 


 

 

서울 강북 지방의 고유의 무술로서 후술될 《재물보》에 따르면 수박과 각력이라는 두 전통 무예를 통틀어 일컫는 격투기다. 헤아리기 힘들정도로 긴 역사를 갖고 있는 만큼 창시자와 기원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대략적으로 서울 강북지방이지.

위에 원문이 마치 과거 서울 강북지방으로 오해 할 수 있어서 의견 남긴다.

 

태껸의 지역은

당시 한양으로 현재 서울 사대문 안을 중심으로 진행을 하였으며, 

 

청계천 윗쪽으로 위대(또는 우대),

청계천 아랫쪽을 아래대라 칭하였다.

 

또한 성안을 위대, 성밖을 아래대라 칭하기도 하였다. 

 

넓게 보면 사대문 밖 지역으로 

영천, 애오개 등 현재는 서울로 편입된 지역. 당시엔 한양 밖인 지역도 있으며.

신문기록엔 인천에서 태껸을 한 기록도 있어. 서울 경기를 중심으로 했다고 넓게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주로 사대문 안에서 하였다고 한다.

 

태껸의 역사는 정조시대가 사료로서 합리적 추론이 가능하다. 

재물보의 해석을 통해, 태껸의 역사를 수박과 각저까지 소급한다면 고대시대까지 이어진다 할 수 있다.

 

 


 

《재물보》에 수록된 택견에 대한 첫 언급 이후 조선시대부터 구한말까지 편찬된 문서들에 의하면 별도의 유파나 단체, 교육 조직 없이 민간에서 개개인들의 사제관계 형태로 전승되어 온것으로 추정된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별도의 연구와 사료의 수집에 따라.

합리적 추론을 지속적으로 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개개인들의 사제관계를 통해 내려왔다라고 추정하는 부분은

유일하게 남은 태껸의 보유자였던 '송덕기' 스승님의 경우.

 

임호라는 스승 한 분을 두고 배웠는데, 

그 함께 수학하던 동문이 10여명 정도로 파악되고 있다.

 

중국의 문파나, 일본의 유파 개념은 보이지 않기 때문에 없다라고 이야기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다음에 다양한 각도에서 글을 작성하고 싶은 파트이기도 하다.

 

 

이렇듯 별다른 구심점이 없는 이유탓에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총독부의 택견판 금지 정책으로 공식적으로 대련과 수련이 금지되며 인구가 급격히 줄어들며 멸절되었으나, 남들의 눈을 피해 꿋꿋이 홀로 수련을 하던 조선의 마지막 윗대 택견꾼 송덕기 덕분에, 해방 이후 기적적으로 후대에 전승될 수 있었다.

 

별다른 구심점이 없다기 보다,

이들이 활동을 할 수 있는 환경과 시장이 조성되지 않았고.

 

조선의 의식이 남아있는

구한말의 환경에서 태껸은 먹고사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 기예 정도로 인식1) 되고 있기 때문이다. 

 

조선총독부의 택견 수련 금지와 같은 이야기는

함부로 단정지어서는 안된다고 보는 입장이다.

내가 친일(親日)의 마인드를 갖는 것이 아니라(난  No Japan 운동도 열심히다). 

 

총독부 산하의 금지가 될만한 것들은 최소한의 근거가 남아야 하는데,

그 어떤 금지를 하였다는 근거는 찾아볼 수 없으며. 

 

송덕기 스승님의 구전에 의한면 모이기만 하면

개돼지 몰 듯 채찍으로 쫓았다라고 언급을 하시는 부분을

빠른 결론(?)으로 처리한 것 같다는 것이 본인의 생각이다.

 

동시대에 태껸에 대한 기록들을 찾아볼 수 있는 것이 다른 부분인데,

이 부분에서 송덕기 스승님의 기억은 어떠한 연유였을지를 조금 더 추적하고 찾아 보는 것이야 말로.

 

태껸이 왜 종로 일대에서는? 송덕기 스승님이 계신 곳에서는? 금지되었을까를 찾고

그로 인해 분명한 이유와 배경을 알 수 있을 것이라 판단한다.

 

 

 

 

이때 당시 택견 인구의 몰살에 대한 분위기는 옆동네 태권도의 역사속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해방 이후 태권도 창시의 주축이었던 5대관 중 단 한곳도, 택견을 전수하는 곳이 없었다. 당시 무술에 대한 학구열이라면 한반도에서 둘째 가면 서러울 5대 관장들 전원이 각자 익힌 가라테와 중국 권법을 가르쳤던 것이다. 그나마 이원국 관장이 어릴때 잠깐 택견을 스쳐 배운 정도와 황기 관장이 택견에 대한 관심이 있었던 정도가 전부다.

 

이 분들이 관심이 있었다고 하는 부분은 

몇 인물들과 서적을 통해 알려진 것으로 판단하며

 

태껸을 실제로 보유하고 배운 인물은 송덕기 스승님과 그 동문 외에는 없는 것으로 보인다.

 

 

 

 

 

이에, 송덕기 밑에서 수련한 소수의 제자들이 각기 조직을 형성하여 협회별로 나뉜 것이 오늘날의 택견이다. 주요 3개 단체로 결련택견협회, 대한택견회, 한국택견협회가 꼽히며 이외 위대태껸도 2018년도 말부터 태껸춤 자료 공개에 힘입어 급부상하고 있다. 오늘날에는 3개 협회가 각기 택견과 조직의 인프라 확대를 위해 들인 노력들이 결실을 맺어 태권도와 함께 한국을 대표하는 무예로 가장 많이 언급된다.

 

송덕기 스승님 사후 태껸 조직은 아주 복작하고 짧지만

엄청난게 경쟁을 통해 차별하며 독자적인 연구, 변모과정을 만들어 온 시장이기도 하다.

 

태권도와 함께 한국을 대표하는 것은 행정적 차원일 뿐

 

아직 태껸에 대해 알지도 못하고

태껸을 하는 사람들끼리도 진실에 가까운 역사 탐구나 기술의 탐구는 없다고 본다.

 

그렇기 때문에 다양한 연구물들이 쉽게 접할 수 있고

좋은 기술과 관점들은 함께 공유되어야 좋은 방향을 가져 올 수 있을 것으로 조심히 판단내려 본다.

 

 

 

오늘날 3대 주요 협회가 그 방향성을 따르고 있는 신한승이 정립한 현대화된 택견은 다른 현대 무술들과 마찬가지로 스포츠 격투기로서 심판이 참관하고 정해진 규칙에 의거한 겨룸에 중점을 둔다.

 

여기서 다시 짚어야 할 것은.

3대 협회가 따르는 기본 규칙 조차 송덕기가 아닌 신한승에 의해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송덕기가 언급한 "손을 짚으면 진다"라는 의중을 파악하지 못하고

그외에 태껸 경기와 관련된 부대사항(규모, 시기 등) 조사가 매우 부족한 것이 본인 뿐 아니라.

 

민속학, 일반사학, 무도사학 전문가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한 부분이기도 하다.

 

위대계보라 할 수 있는

송덕기 스승님 직계 계보에서는 이에 대한 문제점을 파악하고

앞으로 재정비 및 연구를 해야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따라서 부상의 위험 및 스포츠화된 오늘날의 택견 경기의 관람의 재미를 떨어트리는 손을 사용한 타격 기술과 찌르기 및 상대방의 옷을 붙잡는 기술 등은 사용이 금지되거나 제한되며 이들은 각 협회별로 옛법 혹은 결련택견이란 이름으로 별도로 교습하여 전통을 잇고 있다.

 

손의 타격의 위험성은 보호 도구로 충분하다.

그러나 신한승이 정리한 태껸의 체계에서는 손질을 '체육적 가치가 떨어진다'는 이유로2) 태껸 체계에서 배재한 사실이다.

 

또한 태껸의 손질은 송덕기 스승님 기준 여타 제자들과 면담을 했을 때,

품밟기와 발길질 등의 몸놀림이 일정 수준 이상을 거쳐야

 

한두수씩 연습을 시켰던 점을 확인 할 수 있었다.

 


 

🤔 작성하고 보니 앞으로 손 대며 자료를 첨부해야 할 것들 투성이지만

어떤 부분을 손대야 하는지 하나, 둘 보이는 점이 있네요.

 

 

Notes

  1. 송덕기 스승님 가족들을 만나고 들은 내용들로는 형님들이 시대가 바뀌었으니 태껸은 먹고 사는데 도움이 되지 않으니 하지 말라고 이야기를 종종 하셨다고 한다.

  2. 문화재 조사서에서 확인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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