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_ 강태경 정치외교학과 석사 과정
지도교수 _ 주형민
메일주소 _ smldiff@gmail.com
태껸이라 하면 무엇이 생각나는가? 태극권처럼 부드럽지만 강하다는 주장은 익숙히 들어본 것 같다. 외관상 그렇게 무서워 보이진 않을런지 모르지만 조선시대부터 내려오는 위험한 살수가 포함된 전통무술이라 생각할 수도 있고, 한때 코메디언들의 패러디 소재로 종종 사용되던 엉덩이를 흔들면서 “이크, 에크”하는 이미지나 요새 인터넷에서 돌고 있는 ‘도끼질’의 패러디가 떠오를지도 모른다. 혹은 태껸의 시합 영상을 통해 생각보다 꽤 역동적인 무술이라는 인식의 변화를 겪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필자는 태껸이 전승된 무예이고, 이것이 꽤나 해볼 만한 운동이라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다. 필자는 태껸을 접한 지 올해로 10년째이다. 아직 실력이 한참 부족하지만 꾸준히 운동하면서 취미삼아 연구해왔었던 기간이었고, 현재는 지도자가 되기 위한 과정 중에 있으니 나름 학부과정을 마치고 대학원 과정까지 다니고 있는 셈이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직접 보고 해보면서 느끼는 것이 제일 좋겠지만, 사진과 글로 조금이나마 더 태껸을 해볼 만한 운동이라고 생각해본다면 만족할 것 같다. 특히 대학원생은 장시간 의자에 앉아있어서 몸의 중심인 코어 근육이 많이 위축된다. 이건 허리 통증을 유발하고 장기적인 공부에 지장을 주기 쉬운데, 태껸은 가장 기본으로 이 근육들로부터 모든 동작들을 풀어나가기 때문에, 대학원생들에게 크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다음 두 가지를 얘기하고자 한다.
⓵ 태껸의 간단한 역사와 전승자인 송덕기 할아버지(이후 존칭 생략)의 이야기를 통해, 조선말 태껸의 모습이나 형태들이 대략 어떠했을 지를 유추하기 쉽도록 설명하고자 한다. 그리고,
⓶ 태껸의 특징과 원리를 간단하게 설명해서 격투이론인 무술로서의 태껸의 매력과 멋을 설명하고자 한다.
태껸은 조선시대 한양을 중심으로 행해진 전승무예이다. 태껸에는 지역을 기준으로 일종의 유파가 나뉘었던 것으로 전해지는데, 경복궁 서쪽 사직동 일대(지금의 서촌)에서 태껸을 했던 태껸을 위대(웃대)태껸이라고 하고, 한양의 4대문 밖에서 행해진 태껸을 아래대태껸이라고 했다. 당시에 4대문을 기준 안쪽을 위대, 바깥쪽을 아래대라고 칭했던 것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태껸이란 이름이 가장 먼저 언급된 시기는 인조시대의 시조에서 청년이 하는 일들 중의 하나로 씨름과 산에 놀러가는 것과 함께 ‘탁견’이 언급된다. 재물보(1798)에서도 ‘수박과 각저를 지금은 탁견이라 한다’는 내용의 글이 있는데, 태껸의 또 다른 이름이 박양박수, 박양서각이라는 점에 비춰볼 때 수박이 어느 시점에선가 태껸이란 것으로 변화했던 것으로 추정하는 설이 유력하다.
그럼, 조선시대 말 태껸의 최고수는 누구였을까? 조선 말 명확하게 신원이 확인된 위대태껸의 전인은 임호(1882~?)와 그의 제자 송덕기(1893~1987)가 있다. 임호 선생(이후 존칭 생략)은 당시 장안 8장사의 우두머리였다고 하는데, 직업은 서당 훈장이었다. 임호는 한 손으로 돌절구를 들어 올릴 정도로 힘이 세고 두 손바닥으로 벼락같이 치는 연타로 순식간에 사람 서넛을 제압할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 60년대에 살았던 사람들에게도 ‘임호라는 사람이 장안에서는 제일 강했다더라’는 이야기를 어린이들도 들을 수 있었다고 하니 굳이 따지자면 힘과 기술을 겸비한 유명 복싱선수 ‘골로프킨’ 같은 인물이었다고 생각하면 편할 것 같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임호에 대한 연구나 자료 확보는 많이 진행되지 못하여서 송덕기의 증언과 기타 당시 살아있던 노인들의 증언 이상을 찾지 못하였다.
송덕기는 임호로부터 태껸의 마지막 단계로 말하는 ‘태껸무고춤 12마당’까지 배운 제자다. 임호의 제자들이 여럿 있었으나, 태껸을 하던 사람들이 일제 강점기에 많이 흩어져버렸고 당시의 해방 이후 본격적인 태껸의 연구가 진행되는 시점에서의 생존자가 남아있지 못했다. 다행이도 송덕기의 경우, 95세까지 장수한 덕분에 그의 제자들을 길러낼 수 있었고, 태껸에 대한 많은 정보와 자료를 남길 수 있었다. 이승만 정권 시기 치안국장이었던 서정학(1917~2005, 대한검도회의 창시자) 선생이 전국의 경찰력을 동원하여 한국에 남아있는 전통무예를 수소문했으나 국궁 외에 유일하게 발견된 것은 송덕기가 보유하고 있었던 태껸 하나였다고 하니, 송덕기의 장수가 한국의 무술사에 있어 정말 다행스러운 일인 셈이다.
기록이 많지 않았던 임호와 달리, 송덕기의 체육적 능력은 그의 경력에서도 확인된다. 송덕기는 1920년대에 프로축구선수로 활동하였는데, 일제강점기 당시 정상급 강팀 실업축구단이었던 ‘불교청년회축구단’의 주전 선수로 활동하였다. 송덕기의 포지션은 풀백(fullback, 수비형 포지션)이었으며 “수비를 잘 하고, 멀리 차며, 그 중에서도 인사이드로 잘 찬다. 그는 파울을 범하지 않고 한 치의 어긋남도 없는 선수”(동아일보, 1922년 2월 15일)라고 설명된다. 당시 송덕기의 나이가 29세라는 점을 고려하면 더욱 놀라운 일이다. 수비를 잘한다는 것은 몸싸움을 잘한다는 것이고, 멀리 찬다는 건 각력을 보여주는 표현이고, 파울을 범하지 않는다는 것은 기술적 정교함을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그의 운동능력이 당시 조선의 최정상급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송덕기는 사직동의 명문 활터인 황학정의 터줏대감이었는데, 20세부터 작고하기 2~3년 전인 1980년대 까지 꾸준히 활을 쏘았다. 1982년의 한국인물도감에는 최초의 국궁 심판이자 국내에서 가장 오랫동안 활을 쏜 인물로 소개되기도 하였다. 같은 동네에 살았던 노인들의 증언을 참고하면, ‘송덕기 할아버지에게 시비를 걸던 덩치 큰 사람이 눈 깜짝할 사이에 할아버지에게 맞아 주저앉아 쓰러져 있었다.’거나, 1983년 KBS 문화강좌-선조들의 수련체계라는 방송에서 “태껸을 누가 수련 하였습니까?”라는 질문에 송덕기의 대답이 “주로 중인들이 했습니다. 요즘말로 하면 깡패에요 깡패.”라는 증언을 바탕으로 태껸이 실제 격투를 위한 무예로써 배우고 익혔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태껸이 송덕기가 보유했던 형태와 거리가 멀어진 것은 80년대 이후 민족문화의 부흥기를 겪고 나서이다. 태껸의 계승 과정의 복잡한 알력다툼, 그리고 발차기와 태기질을 강조하는 경기화의 흐름 속에서 무술적 요소는 약화되고, 특정 동작이 과하게 부각된 나머지 태껸의 이미지가 많이 실추되기에 이르렀다. 게다가, 민족주의적 이념에 사로잡혀 ‘민족적 움직임’을 찾아야 한다는 강박에 억지스러운 동작(과도하게 허리를 흔드는 것이 한민족 특유의 능청이라는 식의 해석 등)이 추가되면서 태껸의 이미지는 많이 망가지고 말았다. 하지만 송덕기의 동작과 그의 이력 속에서 원래 태껸이 갖고 있는 모습과 형태들을 계속 이어가려는 현대 태껸인들의 노력이 있는 만큼, 태껸의 향후 발전을 기대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태껸은 춤 같다는 느낌을 받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그것은 태껸이 가진 곡선적인 움직임 때문에 그런 것인데, 실제로 태껸의 마지막 단계라고 하는 ‘태껸무고춤12마당’은 그 명칭부터가 ‘춤’이다. 송덕기로부터 태껸무고춤 까지 배운 고용우 선생은 할아버지가 처음 태껸을 보여주실 때 70년대 당시 유행하던 ‘소울춤(Soul Dance)’을 보는 것 같아서 자기도 모르게 웃을 뻔 했다고 기억한다.
태껸을 처음 배우면 ‘굼슬르기’라는 것부터 배운다. 굼슬르기는 태껸에서 몸의 엔진 같은 역할을 한다. 몸을 위아래로 출렁출렁 움직이는 것인데, 겉보기엔 리드미컬한 쿼터스쿼트(모르신다면 인터넷 참조) 같아 보이기도 한다. 힙합댄스의 기초 동작에도 유사한 동작이 있다. 땅을 밟고 서는 힘을 이용해서 몸을 올리거나 떨어뜨리는 방식으로 체중을 사용하는 기본동작으로, 흔히들 말하는 ‘체중을 싣는’ 방법이다.
이렇게 굼슬르기로 체중을 싣는 방법을 알게 되면, 걸음걸이를 배운다. 품밟기라던가 지그재그로 걷는 갈지자 걷기는 상대방의 중심을 겨누고 들어가거나 상대의 사면을 잡기 위한 아주 기본적인 걸음이다. 이런 걸음들이 굼슬르기로 만들어진 힘의 방향을 정해준다. 즉 벡터를 정하는 것이다.
그러고 나면 전신의 사지 끝까지 힘을 전달하기 위한 방법으로 ‘어깨불림’과 ‘허리재기’를 사용한다. 팔까지 체중이 온전히 전달되어서 상대방을 밀거나 타격하기 위해 어깨를 부풀린 것처럼 어깨와 팔의 완만한 곡선을 만들고, 허리재기를 통해 다리와 몸통을 효과적으로 연결해서 발차기의 위력을 낸다.
이렇게 전신을 사용하다보니 당연히 동작은 곡선의 형태를 띨 수밖에 없어진다. 인간의 몸 구조는 다중관절로 만들어져서 직선적인 힘 보다는 휘두르고 던지는 동작에 특화되어있다. 태껸은 이 구조를 적극적으로 활용해서 다양한 곡선적인 움직임을 만들어낸다. 그렇기 때문에 특정 관절에 무리를 주지 않고, 내가 사용하기 편하면서도 위력을 낼 수 있는 방법들을 추구한다. 김연아 선수 같이, 표현력이 뛰어나고 유연한 사람일수록 그 곡선의 미묘함을 사용하여 아름다우면서도 효과적인 동작을 만들어내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미묘함을 알아가는 재미가 태껸에도 있다. 정확한 동작을 하면 적은 노력으로도 상대에게 효과적으로 체중을 전달하기 때문에 큰 힘이 전달된 느낌이 나는데, 그때의 손맛은 정말 짜릿하다. 태권도를 창시할 당시 핵심 원로였던 박철희(1933~2016) 사범은 송덕기 할아버지를 추억하며 “손 하나만 들어도 명인의 몸짓이었다.”는 말을 남겼는데, 이는 그 곡선의 묘미를 터득한 송덕기의 동작이 미적으로도 아름다웠다는 증언이다. 이런 부드러운 동선을 따라 리드미컬하게 움직이다보니 태껸이 춤 같다는 인상을 주는 것이다.
도올 김용옥은 노자를 즐겨 인용하면서 “인간이 근심을 갖는 것은 몸을 갖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공부하는 사람도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꾸준히 운동할 것을 강조한다. 그런 면에서 태껸은 공부하는 사람이 취약한 몸의 균형을 유지하기에도 좋고, 무리함이 없이 힘을 내는 방법을 배움으로써 건강에도 큰 도움이 된다. 돌아가시기 2~3년 전까지 태껸 시범을 보이고 활을 쏠 정도로 건강을 유지하며 95세까지 장수했던 송덕기 할아버지가 이를 잘 증명해주고 있다. 게다가 실력이 늘수록 자신의 동작이 나아지는 묘미의 즐거움 까지 더한 태껸, 공부하는 대학원생이 즐길만한 취미로 강력하게 추천해드린다.
출처
LAB TIMES(http://times.gsala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