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견을 배운 사람이라면 모두 故송덕기 선생님이 온전한 형태의 택견을 보유한 마지막 생존자라는 것을 모두 알 것입니다. 하지만 송덕기 선생님께서 축구선수였다는 것을 아는 택견 수련생들과 택견에 관심을 갖고 지켜보시는 분들은 과연 아는 내용일까요? 그냥 축구 선수가 아닌 당시 한국 축구계의 주요인물이었다는 겁니다.
구한말 축구가 일반 대중들에게 알려진 시점은 1882~1904경으로 자리잡고 있습니다1. 이 당시에 축구는 조선인들 사이에서는 상당한 인기를 끌었고 1910년대 후반부터 축구팀들이 생겨나기 시작하였습니다. 1920년 경 전조선축구경기가 개최되어 국민들에게 인기가 좋았는데, 이 인기에 부흥하여 좋은 선수(?)의 유입 그리고 스카웃과 임금 경쟁 또한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축구를 좋아하는 부호들은 선수들에게 항상 좋은 음식만 대접하였다고 하니 운동 잘하면 축구를 하는 것이 당연할 정도로 활성화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송덕기는 제자들에게 평양에서 축구 경기를 한적있다고 이야기를 한 것은 택견관련 서적에서 늘 등장하는 구문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제자들이 그의 활동을 그리 크게 주목하지 않아서 일까요? 혹은 6.25 이전은 그렇게 평양의 사람들과 친선축구경기를 할 수 있겠구나~ 하고 당연하게 생각해서 일까요? 그런 것보다 송덕기가 평양과 축구를 했었다고 한 것은 그 생각보다는 큰 이벤트였습니다.
이에 대한 이야기는 대한축구협회에서 발간한 '한국축구백년사'에서 확인할 수 있었는데 여기서 송덕기는 불교청년축구단의 창단멤버로 직접 축구협회에서 찾아보고 기록한 일대가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1920년 경 불교축구단의 대표 선수 중
하나로 전조선축구대회 기록만 보아도 뛰어난 기량을 가진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제2회 전조선축구대회 우승 후 불교청년축구단 기념사진
가운데에서 오른쪽에 리젠트헤어로 멋을 낸 분을 송덕기 선생님으로 추정하지만 아직 정확한 추구자료는 못 찾았습니다.
불교 대 무오 전은 실로 장관이었다. 양 팀 선수들이 축구선수들 중 이름난 선수들로 혹시 불교가 이길까 하지만 어느 편이 승부를 낼지 큰 궁금증을 지닌 체, 1시 5분에 강익선 심판 진행에 승부를 보았다. 불교의 포지션 좌 풀백에 송덕기다. 송덕기의 특기는 수비를 잘 하고 멀리 차며 왼발도 잘 차며 그중에도 인사이드로 잘 찬다. 그는 파울을 내지 않고 한 치의 어긋남도 없는 선수이다….2
호랑이 같이 뛰고 용같이 나는 청년단 예선전은 이것으로 끝을 맞게 되었다. 누가 승리까지 가고 못가는 것은 다음에 있는 준결승전에 달렸다. 분위기대로 장내는 기상조건과 마찬가지로 알 수 없는 처량한 분위기가 가시지 않았다. 수양팀의 기권으로 1회 예선전에 승리를 얻는 불교팀…(중략)…F.B.송덕기.3
1922~1923년의 송덕기의 나이 1893년 기준 29~30세의 나이입니다. 그리고 풀백으로 활약을 하였는데 당시 풀백은 현재의 센터백 역활을 하였을 것이라 짐작합니다. 1980~90년대 축구 현역선수들의 활동 나이와 비교를 해보면 고령(?)의 나이지만 활약은 한 선수로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또한 소속팀이 1917년 창설된 것과 그 이전부터 창설 준비가 있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군복무 기간 중에 가까운 사람들과 준비를 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군대는 출퇴근한 군대였습니다. 이것에 대한 것은 추후 포스팅하겠습니다.
송덕기의 이런 기록들과 움직임을 표현한 것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송덕기는 운동신경이 좋았다는 것4과 이런 동작들을 수행하는데 있어 택견의 영향력(발재간과 몸놀림) 또는 축구가 택견에 미쳤던 상호보완적인 움직임을 가진 것은 배운던 제자분들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추후 포스팅).
송덕기 선생님의 축구 활동에 대한 것은 택견에 어떤 영향이 미칠 수 있을지 혹은 없지는 모르겠지만 택견을 하는 이들이 송덕기 선생님에 대한 이야기를 더욱 많이 접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포스팅을 마칩니다.
이 내용은 공현욱의 석사논문의 일부를 블로그 포스트에 맞게 게재한 것입니다. 변형과 작성자를 밝히는 조건 이용허락.
한국에 축구가 들어온 시기는 1882년 인천항에 들어온 영국 승무원들을 통해서로 전해지고 있으며 정식보급은 1904년 서울의 관립외국어 학교에서 정규 과목으로 채택되면서입니다.↩
「最後의白熱戰 優勝의榮冠은徽文,戊午에」『동아일보』1922년 2월 15일. 佛敎對半島戰(불교대무오)은實(실)로壯觀(장관)이엇다兩軍選手(양군선수)들이모다斯界(사계)의一流(일류)로著名(저명)한者(자)이라或勝佛敎(혹승불교)하니어느便(편)이勝負(승부)할지一大疑問(일대의문)으로一時五分(일시오분)에姜樂遠氏審判下(강악원심판하)에勝負(승부)를決(쾌)하게되얏다佛敎軍(불교군)의陣容(진용)은左(좌)풀빽에宋德基君(송덕기군)이라宋君(송군)의特長(특장)은能防善止(능선방지)하고遠蹴(원축)하며左蹴(좌축)도善用(선용)하며其中(기중)에도足內側(족내측)으로善蹴(선축)한다그는파울을내지아니하는完全蹴(완전축)이라…↩
「決勝(쾌승)을 압두고 全朝鮮蹴球大會第三日(전조선축구대회제삼일)」『동아일보』1923년 11월 24일. 범가치뛰고龍(용)가치날든靑年團豫選戰(청년단예선전)도이것으로끗을막게되엿슴으로누가決勝(쾌승)까지가고못가는것은此準決勝戰(차준결승전)에달니엇다果然場內(과연장내)는一種(일종)처량한氣風(기운)이아직도快(쾌)히개이지안은天候(천후)와함끠흐릿하게떠도랏다 修養(수양)의棄權(기권)으로一囘豫選戰(일회예선전)에得勝(득승)한佛敎軍(불교군)…(중략)…F.B.宋德基(송덕기).↩
고령의 나이일 때 배운 제자들과 그 이전에 만났던 분들이 공통적으로 증언하는 이야기로 좋은 운동신경보다 정말 보기 드문… 이라는 표현을 본다면 운동신경이 상당했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