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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옆과 인왕산 기슭에서 행하던 ‘위대태껸’ 을 수련하고 연구중인 공현욱 씨 (32)

 

서구 근대에 접어들면서 이 세상을 ‘수학의 언어로 쓰인 책’ 으로 사람들은 생각하기 시작했다. 수학적 언어인 숫자로 환원할 수 있는 것들은 유의미하고 실재적인것으로 간주하고 그렇지 못한 것들은 무의미하고 비과학적인것으로 치부되었다.

 

이에 따라서 질적 대상들은 평가절하되고 숫적 표현이 가능한 양적 대상들만을 객관적인 어떤 것으로 보게 되었다. 이러한 근대화의 바람은 각 민족들이 자랑하던 전통무예도 피해갈 수 없었다. 숫자로 ‘승부의 객관성’ 을 가릴 수 있는 스포츠화가 진행되고 국위선양의 명목아래 하나의 상품으로 만들어버림으로써 세일즈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면서 전통 무예의 본연의 모습도 훼손되는것은 물론이거니와, 무예 전수과정에서도 스승의 무도뿐만 아니라 스승의 삶에 대한 태도도 같이 배우던 모습은 사라지고, 정보 상품의 형태로 스승의 삶으로부터 분리되어 그저 무술에 대한 기술을 구매하는 형식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다행스러운 점은 한민족의 전통무예인 태껸1)이 이러한 근대화의 어두운 점으로부터 상당부분 벗어난채 원형 가까운 모습으로 바로 이 서촌 지역에서 보존되고 전해 내려오고 있었다는 점이다. 어떻게 된 연유인지 알아보기 위해 16살때부터 지금까지 태껸을 수련하고 연구하고 계신 공현욱씨를 만나보았다.

 

 

태껸과의 인연

“용인대 다니면서 자취를 했었는데 태껸 전공을 학부때 했고 박사과정에 입학할때까지 태껸 연구를 했어요. 이곳 (서촌) 을 왔다갔다 하기 시작한건 19살때부터 였어요. 사실 이 동네가 지금 서촌이라고 부르고, 옛말로는 웃대라고 불리던 동네에요. 근데 이 동네가 태껸의 발상지로써 선생님들도 대대로 여기 출신이셨어요. 제 선생님은 체부동에 사셨고 저는 작년에 이사왔습니다.”

 

16살때부터 태껸을 접하기 시작했던 고등학생은 어느덧 태껸이라는 한 우물만 판지 10년도 더 훌쩍 지난 청년이 되었다. 태껸이 보존 및 전승되어 내려온 동네가 서촌이다 보니 자연스레 용인에서부터 서촌까지 왕래를 하게 되게 되었다고 한다. 학부 시절에는 실기 위주로 태껸을 접해왔다면 현재 공현욱 씨는 대학원에 진학하면서 태껸에 대해 논문을 준비 하면서 태껸의 역사와 유래 및 보존되어 온 과정을 공부하게 되었고 이제는 태껸 수련과 함께 태껸에 관한 자료 발굴 및 연구에 매진하고 있는 어엿한 태껸 연구자가 되었다.

 

 

역사 속 서촌의 태껸

그렇다면 서촌에서 대대로 내려왔다는 태껸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오늘날 서울이라고 하면 한강의 남북을 다 포함하는 매우 큰 규모의 지역을 가리키지만, 조선시대 때에는 한양을 사대문 안과 밖으로 구분을 했고 한강이 아닌 청계천을 기준으로 윗대와 아랫대를 나누었으며 (또는 인왕산 기슭을 웃대, 동대문 훈련원이 있던 곳을 아랫대로 나누기도 했다고 한다.) 이러한 지역적 구분을 바탕으로 태껸도 지역마다 무리가 나뉘어 서로 시합을 했었다. 그 중에서도 인왕산 자락과 서촌 지역에서 내려오던 태껸은 실력적으로 다른 지역들을 압도하는 태껸이었으며 현재는 “위대태껸” 이라고 불리고 있다.

 

“여러 지역의 태껸들 중에서도 사직골이 그중에서도 제일 강했는데 위치가 바로 지금 서촌이었고 여기를 “안터” 라고 불렀다고 해요. 안쪽에 있다는 의미도 있지만 가장 실력적으로도 강했기 때문이라고 전해지는데 인터뷰 기록을 보면 문밖이나 (사대문 밖) 아랫대와 웃대가 붙으면 아래대가 번번히 져서 갔다고 해요.”

 

한때 서촌은 무서운 곳이었다. 구한말 무렵에는 골목을 돌때면 항상 팔짱 끼고 다녔는데 그 이유는 혹시라도 몸이 부딪혀서 시비가 붙어 싸우는 경우를 피하기 위함도 있었지만 시비가 붙으면 종종 작은 칼을 이용해 그냥 찔러버리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이유에서 몸을 보호하기 위해 두 팔로 몸을 감싸면서 돌아다녔고 실제로 태껸을 가르치면서 골목길에서 효율적으로 펼칠 수 있는 기술들을 가르쳤다고도 한다.

 

20세기에 들어와서도 크게 달라지진 않았다. 그 당시 현재 사직공원 자리가 오늘 강남 저리가라 할 정도로 젊은이들이 많았지만 동시에 여러 범죄도 많았을 정도로 치안이 안 좋았던 위험한 동네였다. 텃세도 심해서 외지인이 오면 시비를 걸거나 골목이 좁은 탓에 싸움도 많았다.

 

그렇다. 서촌은 원래 꽤나 힘 좀 쓰던 동네였다.

 

 

중인, 태껸의 전승자들

태껸의 보존 및 전수에 관련해서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이 있다. 바로 서촌이 원래는 중인 이상의 계층이 (주로 중인) 모여살던 지역이라는 점이다.

 

“비유을 하자면 이렇죠. 지금 삼성맨이 밤늦게 야근하고 태껸을 배울 수 없는 것처럼 그 당시 무술을 배울 수 있는 여유가 있었던 것은 중인 계층이었요. 다시 말해 시간, 경제적 여유가 있던 사람들이 배웠던거고 그래서 서촌에서 보존이 된 것이죠.”

 

태껸을 일반 평민들이었던 민중들이 많이 했다고 흔히 알려져 있지만 사실이 아니라고 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민중들은 태껸을 배울만한 여력이나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중인은 보통 양반 밑에 위치했던 중간 계급으로써 당상관의 지위에 올라 국정에 참여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행정실무를 도맡아 하던 계급으로써 여건상 다른 평민들과 달리 태껸 수련에 몰두할 수 있었던 중인이 주로 배웠다는 것이 공현욱씨의 설명이다. 이러한 배경이 있었기에 여전히 서촌에서 태껸이 계속 이어져 내려올 수 있었다.

 

 

태껸의 보존 및 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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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학적 80년대 모습으로 사진 왼쪽에서부터,
태껸을 가장 오래 배운 제자인 고용우 선생과 현암 송덕기 선생
그리고 당시 국가전수장학생으로 지정된 이준서 선생의 모습.

 

경복궁 옆과 인왕산 기슭에서 행해진 태껸이었던 위대태껸의 계보는 장안 팔장사로 불리었던 19세기 중반에 태어난 임호 선생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임호 선생님은 서촌 출신으로 원래 한학자이었지만 장안 팔장사중에 우두머리였다고 해요. 그 힘이 대단해 인왕산 호랑이라고 불린 분이시죠. 무반 집안이 아니었을까 추정만 할 뿐입니다.”

 

임호 선생 밑에서 태껸을 전수받은 이는 19세기 말 사직동에서 출생하신 현암 송덕기 선생으로써 12세부터 당시 19살 ~ 21살 연상 (추정) 이었던 임호 선생 밑에서 태껸을 배우기 시작했고 1983년 중요무형문화재 태껸의 초대보유자로 지정되었다. 국궁에도 능했던 현암 송덕기 선생은 황학정 근처에서 몇몇 제자들에게 태껸을 가르쳤는데 동네에 가깝게 살았지만 교육체계는 일정하지 않았다고 한다. 일정하지 않았다고 해서 체계적이지 않았다는 말이 아니다. 다만 요즘처럼 학기가 정해져 있어서 정해진 수업 스케쥴에 따라 무조건 진도를 빼지 않았다는 말이다. 현암 송덕기 선생 같은 경우는 어느 단계에 이르렀을때 배우는 사람의 태도나 완숙도가 일정 수준에 이르지 않으면 더 이상 가르치지 않았다고 한다. ‘앎’과 ‘삶’이 분리되지 않았던 것이다. 태껸을 배우고 익히는것은 삶을 제대로 사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여겼던 현암 송덕기 선생의 철학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앎조차도 삶과 분리시켜 판매의 요소로 만들어 삶과 상관없이 전해줄 수 있는 현대의 지식산업사회와 비교해보면 그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나는 부분이기도 하다.

 

현암 송덕기 선생의 제자들 중에서도 고용우 선생과 이준서 선생이 계보를 잇는 계승자로 알려져 있다. 공현욱 씨의 스승이기도 한 고용우 선생은 현재 미국으로 건너가 위대태껸을 가르치고 있으며 이준서 선생은 특이하게도 한의대생이었지만 국가전수장학생의 과정을 마치고 국내에서 위대태껸을 전수하고 있다. 스승들이 태껸 수련을 하던 사직동과 감투바위와 그 근처에서 지금도 공현욱 씨를 포함한 15명이 태껸의 보존 및 계승을 위해 수련에 매진하고 있다.

 

 

태껸의 유래와 매력

사실 한국을 대표하는 무도를 꼽아보라고 하면 대부분 태권도를 먼저 떠올린다. 실제로도 그렇게 많이 해외에 소개가 되고 있다. 하지만 사실 이 땅에는 그 이전에 ‘수박’ 라는 이름으로 내려오던 전통 무예가 있었다. 그리고 조선 정조대왕 때 처음 태껸이라는 명칭이 나왔는데 수박과 비슷하다고 기록으로 남아있다. 태권도와는 다른 태껸만이 매력은 그렇다면 무엇일까.

 

“근대화되지 않았다는 점이죠. 그래서 효율적인 방법 (실전위주) 이 많이 남아있고, 근대 무술 이후가 상업화가 진행되면서 경기 체계가 만들어졌어요. 그러면서 무술에서 중요한 기술이나 포인트 (흥미 위주가 아니라 실제 제압을 위한 포인트) 가 없어집니다. 그런데 태껸은 그 방식을 그대로 가지고 있어요. 태권도가 국가위상을 높이는데 스포츠의 역할을 한다면 태껸은 스포츠에는 없는 부분을 잡아갔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그리고 공현욱 씨가 뽑은 태껸의 다른 중요한 매력은 바로 “한민족의 신체 문화” 라고 말했다.

 

“(태껸) 동작에 꾸밈이 없어요. 우리나라 단어와 표현과도 잘 맞아떨어져요. 태껸에서 잘 어른다 라는 표현도 있어요. 아기 어른다고 말할때 그 표현과 같아요. 예전에는 싸운다고 할때도 어른다고 했어요. 상대가 들어오는 움직임에 대해 몸으로 움직이면서 막는거죠. 상대에 따라 계속 움직이고 어르면서 힘이 나가고 들어갑니다. 팔과 다리가 같이 가죠. 신체적으로 분리해서 한 동작만 하는게 아니라 유기적이면서 전체적으로 들어가는거죠.”

 

서구의 특징은 경계짓기다. 최대한 쪼갤 수 있을만큼 쪼개고 구분 짓는다. 몸과 정신, 주체와 객체의 경계를 짓는 전통도 여기서 나왔다. 가장 서구스러운 운동인 웨이트 트레이닝만 봐도 가슴 근육, 등 근육, 다리 근육, 복근등으로 신체를 분리해서 훈련한다. 반면 동아시아 전통에서는 우주와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을 ‘기’ 라는 개념을 통해 일원론적으로 바라보았다. 하늘과 땅 사이에서 끊임없이 움직이고 변화하는 내적인 원리를 가진 다양한 형태의 기들이 있고 당연히 서로 고립되고 분리되지 않으며 쉬지않고 계속해서 유기적으로 상호 영향을 주고 받는다고 보았다. 동아시아 전통에서는 당연히 사물들간의 분리나 경계가 있을 수 없다.

 

이런 문화적 차이로 인해서 태껸이라는 무예가 다른 서구 전통의 무예나 스포츠로 발전한 태권도와 다르게 보존되어 이어져 내려올 수 있었던 배경이 되었던 것은 아닐까. 그렇기 때문에 태껸 자체가 서구 근대화의 세례를 피한것은 불행이 아니라 태껸 보존을 위한 당연한 선택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이토록이나 매우 다른 문화적 차이에서 태어난 무예이자 신체문화이기 때문이다.

 

“우스갯소리로 한국 5~60년대 문화를 알고 싶으면 외국 교민사회를 가보라는 말이 있어요. 본토는 계속 바뀌었지만 교민 사회는 변하지 않고 이민 갔던 당시 모습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거든요. 태껸도 그런거죠. (웃음)”

조선이 망하고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당시 종교에 가까웠던 근대화를 벗어나 태껸이 거의 예전 모습 그대로 보존될 수 있었던 비결은 당시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의 흐름과 유행으로부터 흔들리지 않았던 태껸인들 덕분이었다. 그들의 흔들리지 않는 중심이 없었다면 아마 전승되지 못하고 사라지거나 설령 이어져 내려왔어도 원형의 모습을 많이 잃어버린 다른 많은 무형문화들처럼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태껸이 한민족의 오래된 고유의 신체문화라는 점도 매력이지만 태껸이 최대한 원형 그대로 유지될 수 있도록 지켜온 서촌의 태껸인들의 노력과 헌신이 태껸이 가진 더 큰 매력이 아닐런지.

 

 

나에게 태껸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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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종로도서관 뒷편에 위치한 사직노인정 앞 공원에서 수련하는 모습

 

현재 대한민국 인구는 5천만이 넘는다. 그 중 위대태껸을 보존하고 계승하는 태껸인은 현재 국내에 15명 뿐이다. 15명 중 한 사람으로써 그에게 태껸은 무엇일까?

 

“공기같은 존재죠. 어릴때는 좋아서 태껸을 했었지만 그때는 진지하지도 못하고 중요성도 못 느꼈었는데 20대 중후반에 들어가면서 생각이 많이 바뀌었죠. 지금은 태껸을 못하면 과연 내가 살 수 있을까란 생각을 많이 하게 되요. 그리고 지금 위대태껸을 배우는 분들에게 주어진 과제는 위대태껸을 제대로 알리는거죠. 기분 나빠도 어쩔 수 없는 과제인것 같아요. 마치 사건 목격자 같은거죠. 방관하거나 숨으면 나쁜 사람이 되는거에요. 받았으면 전해줘야죠. 위에서 계속 전해져서 내려온거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