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덕기 생애사

석사학위논문

송덕기의 생애와 택견 형태 및 전수내용

Song Duk-ki’s Lifetime, Compositions and Instruction
Contents in Taekkyeon History
용인대학교 대학원 체육학과
지도교수 : 김 주 연
제출자 : 공 현 욱
2012년 12월

국 문 초 록

송덕기는 제자인 신한승과 함께 1983년 6월 1일 초대 택견 예능보유자가 되었다. 하지만, 송덕기가 보유한 택견의 형태에 대한 이해부족으로 문화재 지정과정에서 송덕기가 보유한 온전한 형태와는 다른 모습으로 중요무형문화재 지정이 되었다. 1987년 송덕기와 신한승의 타계 이후, 택견 단체들이 설립되었지만 서로 경쟁하며 차별화된 형태를 취하게 되면서 송덕기가 전수한 택견의 원형과 달라지는 문제를 가져오게 되었는데, 이는 송덕기의 생애와 택견 형태 및 전수내용에 대한 자료 부족으로부터 발생한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자료 부족의 문제 해결을 위해 이 연구는 송덕기의 생애와 택견 형태 및 전수내용을 문헌 수집과 함께 직계 제자들 및 주변 인물들의 구술사 자료를 통해 살펴보았다.

첫째, 송덕기의 생애는 한국의 무예사․체육사적으로 다양한 활동을 남긴 것을 알 수 있었다. 송덕기는 1893년 1월 19일 사직골에서 출생하여 황학정에서 활을 쏘고 군대에서 근대체육을 가르치며 축구선수로도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또한 기존의 알려진 것보다 임호에게 더욱 오랜 기간 동안 택견을 전수를 받으며 택견의 온전한 형태를 보유하게 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둘째, 현재 택견단체들이 보급하는 택견 형태와 송덕기의 택견 형태에는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택견 단체들이 보급하는 택견의 형태는 주로 다리를 사용하며 활개짓을 정형화하여 강제적으로 움직이거나 다른 해석으로 품밟기를 거꾸로 밟으며 과장된 몸짓을 하고 있다. 하지만 직계제자들과 주변 인물들에게 전수한 내용을 볼 때, 송덕기가 보유한 택견의 형태는 격투기술을 기반으로 놀이․경기의 형태가 혼재된 고유한 옛 무예의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

셋째, 송덕기가 택견을 전수한 내용에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수련체계(복장, 기합, 예절)와 기술(품밟기, 활개짓, 발질, 옛법)의 전수한 내용의 설명은 비슷하였지만, 기술의 수와 내용의 전수 방식에는 차이가 있었다. 전수 방식으로 기술의 강습과 견주기(경기)의 지도에 따른 전수 내용에 차이가 있었으며, 직계제자들 사이에도 전수를 받았던 시기와 기간에 따라서 차이를 보였다. 송덕기가 직계제자들에게 전수한 택견의 다양한 기술들 중에는 명칭이 일정하지 않고 정형화되지 않은 부분도 있었지만, 그 원리는 명확한 것을 볼 수 있었다.

앞으로 송덕기의 활동을 토대로 한 직계제자들과 주변 인물들이 전수 받은 택견의 형태가 좀 더 심층적으로 연구되고 정리될 필요가 있겠다. 각자의 발전만을 위해 점차 이질화되어 가는 택견계의 문제해결에 있어 송덕기를 통한 택견의 정체성 복원이 무엇보다 중요함을 알아야 하겠다.

주요어: 택견, 송덕기, 택견사, 구술사 (학번: 2011-02102)

I. 서론

1. 연구의 필요성

문화유산은 그 민족의 자존(自存)이며 자존(自尊)이다. 문화재청에 따르면 “중요무형문화재는 연극, 음악, 무용, 공예기술 등 무형의 문화적 소산으로서 역사적․예술적 또는 학술적 가치가 큰 무형문화재 중에서 중요한 것”이라는 정의가 되어 있다.1)문화재청 홈페이지(http://www.cha.go.kr/korea/heritage/knowledge/notion_01.jsp?mc=NS_04_02_01) 2012년 4월 8일 검색. 전통문화의 정체성은 고유한 특징을 지키며 문화로서 그 민족과 국가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통문화는 국가에서 인멸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문화재보호법으로 지방무형문화재와 중요무형문화재 지정을 통해 전통문화를 보존해 왔다. 여러 무형문화재 중 '종묘 및 종묘제례악(2001), 판소리(2003), 강릉단오제(2005), 강강술래(2009), 남사당(2009), 영산재(2009), 제주 칠머리당영등굿 (2009), 처용무(2009), 가곡(2010), 대목장(2010), 매사냥(2010, 다국적 유산), 줄타기(2011), 한산모시짜기(2011)'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2)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은 1997년 제29차 총회에서 산업화와 지구화 과정에서 급격하게 사라지는 무형문화유산을 보호하고자 '인류 구전 및 무형유산 걸작 제도'를 채택했다(유네스코세계유산, http://www.unesco.or.kr/heritage/ich/index.asp), 2012년 4월 8일 검색.으로 선정이 되었다.3)국가에서는 전통문화가 인멸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문화재보호법으로 무형문화재 지정을 통해 전통문화를 보존해 왔다. 여러 무형문화재 중 종묘 및 종묘제례악(2001), 판소리(2003), 강릉단오제(2005), 강강술래(2009), 남사당(2009), 영산재(2009), 제주 칠머리당영등굿(2009), 처용무(2009), 가곡(2010), 대목장(2010), 매사냥(2010, 다국적유산), 줄타기(2011), 한산모시짜기(2011)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선정이 되었다(유네스코세계유산, http://www.unesco.or.kr/heritage/ich/list.asp) 2012년 4월 8일 검색.

특히, 최근에 세계무술 가운데 최초로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된 택견은 1983년 6월 1일 문화재청으로부터 중요무형문화재 지정을 받았다. 그로부터 약 28년 만에 전 세계 모두가 아는 쿵푸를 제치고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서 기존 제례행사나 전통놀이와는 다르게 택견이라는 무예가 등재된 것은 분명히 의미가 다른 것이라 할 수 있으며, 택견계를 비롯한 구성원들과 대한민국의 체육, 무예인들에게는 희망적인 사건일 것이다.

과거 택견이 언제 발생해서 전승됐는가에 대해서는 명확하지 않지만, 문헌을 통해 추정할 뿐이다.4)이병익․임희용․이재학, 1998 「택견의 변천과정에 관한 연구」『무도연구소지』 9권 1호, 210쪽에서 “택견에 대한 문헌적 기록은 조선말 시조에 등장하고 있는데, 이 이전의 택견에 대한 문헌상의 기록은 없으며, 조선시대 전기에서 후기로 이어지는 택견의 역사적 공백은 택견의 원류를 찾는데 있어 상당한 논란의 소지가 있다. 따라서 택견의 역사적 기원을 살펴보기 위해 수박과 택견의 역사적 연관성을 찾지 못한다면 택견은 조선말부터 시작된 무예일수 밖에 없다고 생각되어진다.”라고 해석을 하고 있다. 이 연구에서는 수박의 연관성에 대하여는 제한을 두었다. 택견은 관한 기록은 조선 시대부터 나타나는데 22대 임금인 정조 시대에 『재물보(才物譜)』5)이만영, 1675 『才물보』 기희조(技戱條)에는 「卞 手搏爲卞 각력爲武 若今之탁견」 “수박을 변(卞)이라고 각력(角力)을 무(武)라 하니 지금의 탁견 같다고 하였으며, 수박조(手搏條)에서는 수박은 지금의 수벽과 같다.”라고 말하고 있다.에서 ‘탁견’이라는 명칭으로 기록하고 있다. 1895년 Stewart Culin은 HTAIK-KYEN-HA-KI6)Stewart Culin, 1895 Korean Games: With Notes on the Corresponding Games of China and Japan, Philadelphia: University of Pennsylvania, p.38로 택견에 대해 언급을 하였는데 이 내용에 대해서는 의견이 서로 달라7)위의 자료를 토대로 대한택견협회(現대한택견연맹)의 이용복은 ‘대접’이라 하는 규칙을 적용하였는데, 한 발을 상대가 공격할 수 있는 거리로 내어 주어 거리를 가깝게 하는 방식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송덕기 측근에서 배웠다고 알려진 제자들은 “단 한 번도 그런 방법을 듣지 못 하였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논란이 되고 있다. 그 논란은 대한택견연맹의 커뮤니티 사이트인 택견코리아의 게시판(http://www.taekkyonkorea.com/bbs/boardpub/dir.php?wh=free)에도 ‘택견하기’로 검색을 했을 때 나오는 수 많은 논란이 있으며 이것에 대한 논란은 결련택견협회의 홈페이지 게시판과 택견배틀 홈페이지 게시판(http://www.tkbattle.com/bbs/zboard.php?id=free)에도 논란이 되었다. 주목해 볼 필요가 있을 것으로 사료된다. 안확의 『조선무사영웅전』 유술(柔術)편8)안자산, 1919 『朝鮮武士英雄傳』 유술(柔術)편 “유술은 수박(手搏) 권법(拳法) 권박(拳搏) 각저 상박(相撲)이라고도 한다. 씨름은 오직 육박(肉搏)으로써 각투에 불과한 것이고, 유술은 인체 근육의 혈맥을 쳐서 죽이기도 하고 어지럽게도 하며 벙어리가 되게도 하는 삼법이 있어 학술적으로 되어진 것이다… 근래에는 청년들이 씨름보다 소이(小異)한 박희를 행함이 있던바, 소위 택견이라 하는 것이 그 종류다.”에서는 씨름과 소이한 택견이 있다는 기록이 있으며, 『조선어사전』9)조선총독부, 1920 『朝鮮語辭典』에서 ‘탁견’이라는 명칭이 아니라 ‘택견’으로 기술하고 있다. 1921년 최영년의 『海東竹紙』10)최영년, 1925 『海東竹紙』 “각술이라는 옛 풍속이 있는데, 서로 마주 보고 차서 넘어뜨리는 것이다. 세 가지 법이 있다. 가장 낮은 것은 상대방 다리를 차고, 잘하는 사람은 어깨를 차고, 높이 차는 자는 상투를 찬다. 이것으로 원수를 갚기도 하고, 돈내기나 여자를 빼앗기도 하였다. 관에서 금하여 지금은 없어졌다. 이를 일러 탁견이라 한다.”에서는 ‘탁견’이라는 명칭과 모습에 관해 기술하고 있다. 리선유(1933)의 『오가전집』11)리선유, 1933 『五歌全集』 박타령에서는 “곱사등이 뒤집어 노코 앉진방이 착견하고 배알넌놈 몽둥이질”라는 대목이 나온다.의 박타령에서는 ‘착견’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으며, 문세영(1952)의 『우리말 사전』12)문세영, 1952 『우리말 사전』 한 발로 서로 상대방의 다리를 차서 넘어뜨리는 경기(각희脚戱).에서는 ‘태껸 택견, 결련택견, 옛법택견, Taekkyeon ’이라 다루고 있다. 조선시대의 기록에는 자세한 택견의 동작이나 기술을 서술한 자료가 부족한 실정이다. 조선시대에 택견을 표현하는 대표적인 사진이나 그림으로는 1836년 혜산 유숙(劉淑) ‘대쾌도(大快圖)’와 연대 작가 미상으로 외국인 선교사가 찍은 ‘애기 택견’ 사진이 있는데, 이 자료에서 택견의 모습과 형태는 보이지만 기술적인 모습을 확인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조선시대 이후, 택견의 기록과 모습이 공식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1958년 경무대에서 실시된 ‘이승만대통령 탄신기념 무도대회’에서의 시범이다. 이곳에서 택견 전승자 송덕기는 예전에 함께 택견을 배운 김성한(金成漢)과 중구 소공동에 있던 유도중앙도장에서 택견 시범을 보였다. 이후, 1964년 5월 16일 자 한국일보에 「속인간문화재(續人間文化財)-택견: 宋德基」라는 기사에서 예용해13)예용해(1929~1995)는 전통문화의 연구․보존과 발전을 보람으로 산 언론인이다. 우리 고유의 문화와 인간문화재에 깊은 관심과 애정을 품고 문화재전문위원을 지내며 많은 조사 보고서와 『예용해 전집(대)』을 남겼다.는 송덕기와 같이 택견을 세상에 소개하였고, 1970년 신한승을 만나 그에게 5년간 택견을 가르쳤다.14)정경화, 2002 『택견원론』 87쪽. 송덕기로부터 5년간 전수를 받았지만 신한승이 1973년 충주에 택견 전수관을 운영한 것으로 보아 집중적인 전수기간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1973년 문화재위원으로 있던 예용해는 「무형문화재 조사보고서 제102호」15)예용해, 1973 「무형문화재 조사보고서 제102호」 이 보고서에 4.송덕기 조사자료 (1) 택견의 열 한가지 기본수에는 ①깎음다리②안짱걸이③안우걸이④낚시걸이⑤명치기⑥곁치기⑦발따귀⑧발등걸이⑨무르팍치기⑩내복장갈기기⑪칼재비로 기술되어 있다.에서 송덕기의 택견 기술과 보유현황을 조사․제출하였으나 기술이 적다는 이유로 반려되었다. 그 뒤 1981년 오장환은 「택견 무형문화재 지정 조사 의뢰서」를 제출하였고, 당시 문화재위원이었던 임동권(1982)은 「무형문화재 조사보고서 제146호」를 작성하여 1983년 ‘중요무형문화재 제76호’로 지정받게 되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택견 원형에 관한 문제는 항상 제기되어 왔다. 이 문제는 택견이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을 받는 1983년부터 꾸준히 발생하여 왔는데, 문화재 지정과정에서 온전하게 택견의 형태를 보유한 송덕기의 택견 동작과는 다른 형태로 문화재 지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송덕기의 기술을 조사하여 담은 당시의 문화재 위원들의 보고서를 비교해 본 결과, 1973년 예용해의 「무형문화재 조사보고서 제102호」의 송덕기 택견 기술은 11개라고 기술(記述)한 것에 반해, 1981년 오장환의 「택견 무형문화재 지정 조사 의뢰서」는 기존의 자료와 다르게 분량이 늘어 있었다. 또한 송덕기와의 갈등이 표출 되었던 ‘활개짓’은 오장환의 보고서에 따르면 “김홍식 옹의 활개짓, 품밟기 및 몇 가지의 발질을 보았으나 전모가 확실하지 않고…”라고 기술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화재 지정 이후, 1983년 이보형의 「택견 무형문화재 전수실태 조사」에서는 신한승이 17세에 활개짓을 배우고, 다시 47세가 되어 1974년 김홍식에게 배웠다고 기술하고 있는 것은 확실하지 않은 내용을 문화재 지정 의뢰 보고서에 작성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기술(技術) 조사 내용에 있어서도 예용해, 오장환, 임동권, 이보형의 경우 같은 내용이지만 기술(技術)의 내용과 명칭이 조금씩 변화해 가는 것을 확인 할 수가 있다.16)기존 보고서에서 존재하지 않지만 이보형, 1983 「택견 무형문화재 전수실태 조사」에서 장대걸이, 촛대걸이, 줄띠지르기는 이전 보고서(예용해, 오장환, 임동권)에는 존재하지 않는 기술들이다. 이 기술들은 박종관, 1983 『傳統武藝 택견』에 정확히 소개되고 있고 송덕기의 초대 제자들로 구성되었던 서울택견계승회 수련표에 존재하는 명칭이다. 그 보다 빠른 시기인 1971년 대한태권도협회의 「살아있는 태껸 택견, 결련택견, 옛법택견, Taekkyeon 인 송덕기 옹」『태권도』 제3호에 기술 14개만 제시되어 있음을 통해서도 기존의 기술 조사가 미약하였음을 알게 되고,17)대한태권도협회, 1971 「살아있는 태껸 택견, 결련택견, 옛법택견, Taekkyeon 인 송덕기 옹」『태권도』 제3호, 12쪽 기술 개요 참조. 품(品)과 굼실을 제외하고 14개(안짱다리, 박장다리, 낚시걸이, 무릎걸이, 발등거리, 곧은 발질, 날 치기, 칼 잽이, 이마 재기, 낙함, 턱 걸이, 깎금 다리 등)를 기술함. 박종관(1983) 저서와 비교 시 기존 조사가 매우 미약했음이 검증됨.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 택견의 형태가 송덕기의 택견 형태와는 다르게 지정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상의 내용으로 볼 때, 기존에 실시된 조사와 기록에 문제점이 있었고 송덕기가 보유한 체계와 다른 형식으로 택견이 문화재로 지정된 후, 택견의 전승자들은 택견 원형에 대한 서로의 이견과 차별화된 해석 그리고 단체 간의 이익과 개인적인 감정에 의해 각자의 길을 걷게 되었음을 알게 된다.18)오지웅, 2011 「택견의 현대화 과정에 나타난 갈등구조 연구」 용인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47~53쪽. 이렇게 시작된 단체 간 경쟁은 양적, 질적 성장이 가속화되어 수련 인구와 인지도의 증가를 가져왔지만, 택견을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와 계속되는 경기규칙의 변화, 수련체계의 개정으로 차별화된 발전을 꾀하는 상황으로까지 진행되었다.19)정재성, 2003 「택견의 전통성 문제」『한국체육철학회지』 11권 2호, 165~166쪽에서 “이들의 사후에 남겨진 전승자들은 자신들의 입지와 처지에서 스스로의 부족함을 스승들의 덕과 위업으로 포장하기 위해 양보와 타협 없이 갈등하기 시작했다. 그 과정이 상호의 택견 운용원리에 대한 비방과 견제였고, 결국 택견 계보상의 존재를 부정하기까지 이르렀다.”라고 그 당시 상황을 말하고 있다. 이러한 양상은 경기의 발전과 방향에도 영향을 미쳤는데 초기 택견 단체 간에도 서로 다른 경기 규칙을 가지고 있었으며,20)최종삼․장경태, 2002 「택견 경기규칙 변천에 관한 고찰」『대한무도학회지』 7권 4호, 116쪽에서 “송덕기, 신한승 사후(1987)에 일어난 각 계파 간 갈등이 심화 되었다. 그리하여 3기인 1991년부터는 대한택견협회, 한국전통택견회, 결련택견계승회가 각기 다른 경기규칙을 적용하여 경기를 진행하고 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 경기규칙에 따라서 단체마다 추구하는 바가 달라 변질되고 있는 실정이다.21)최종삼․이병익․한창효․장경태, 2002 「택견의 경기규칙 특징에 따른 통합에 대한 논의」『무도연구소지』 13권 1호, 227쪽. 그리고 이후 택견 원형의 진정성을 둘러싸고 법정 소송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는 사태가 발생하였다.22)이승수, 2009 「무예 원형의 제도화: 택견을 중심으로」『체육사학회지』14권 3호, 116쪽에서 이 문제에 대해 서론으로 제시를 하였고 “대한체육회 가맹을 앞두고 대한택견협회에 대해 각 택견협회들은 서명 운동과 법정소송, 지도자 삭발식, 대규모 집회를 계획하였다(「택견인들 집회 열어 강력 항의」『충청매일』 2005년 1월 17일).” 이것과는 다른 문제로 한국전통택견협회와 택견원형보존회간에 문제를 다루고 있다(「택견인들 법정비화 조짐 기사」『충청투데이』2005년 2월 17일). 대한체육회의 권고사항23)정가맹 이전에 대한체육회에서 권고사항에 대한 내용은 이렇게 표현이 되어 있다. “대한체육회는 이번 택견문제를 계기로 대한택견협회는 준가맹 승인당시의 승인조건 이행실적을 지속적으로 이행하는 의미에서 명칭변경, 원형보존, 집행부 임원배분, 경기규정 등 세부제안 내용을 6개월 이내에 충실히 이행한다는 것과 문화재청의 권고사항 등 택견단체의 요구사항을 최대한 수용하여 2005년 8월 2일까지 정관개정 및 재규정을 제정하는 것으로 유도했다. 또 대한체육회는 대한택견협회 및 택견단체는 정가맹 승인권한이 대한체육회 제21차 이사회(05.02.02)에 상정된 정가맹 승인추진은 일단 유보키로 결정했다는 이행각서를 각 단체에 제시했다(「못 말리는 택견, 대한체육회 중재 나서」『MOOKAS뉴스』2005년 2월 1일).”에 의하여 2007년 택견은 통합을 원칙으로 정식 가맹되었지만, 통합이 이루어지지 않아 그 문제는 계속적으로 대두되고 있다.24)택견대통합 행사를 2007년 4월 3일에 서울 올림픽 공원 역도경기장에서 진행을 했다(「택견, 대중화를 위한 출발선을 끊다」『MOOKAS뉴스』2007년 4월 3일). 하지만 유네스코 지정 이후 나온 기사는 다음과 같다. “유네스코의 요구처럼 택견은 국가지정 문화재로서 예능보유자를 중심으로 전승․보급․발전을 이뤄왔고, 현재 50여명의 공식 이수자가 있는 한국택견협회가 택견의 전승․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지만 택견의 스포츠화를 추구하는 대한택견연맹과는 경기 방식에서 현격한 차이를 보이며 지속적인 논란이 되고 있다. 이 같은 문제는 택견이 문화재청과 문화체육관광부 등 정부부처의 이원화 체제로 관리되면서 발생되는 택견단체의 난립과 갈등이 해소되지 않고 오히려 더 커지고 있다는 데 있다. (중략) 이와 함께 정부가 나서 법과 제도 개선을 추진해 정책실행 주체의 일원화를 선행해야 한다는 지적이다(「세계유산, 택견통합 정부가 나서야」『충청타임즈』2011년 12월 6일).” 이 같은 문제는 여전히 댓글을 통해 누리꾼들로부터 화재거리이다.

이러한 경향은 택견의 고질적인 문제이다. 그리고 이 문제는 구한말 이후, 인멸의 위기에서 택견의 기능을 보유한 송덕기에 대한 이해부족에서 시작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즉, 수많은 택견인(人)들에 의해 택견 원형에 대해 지적과 논란이 있었고 통합을 위해 많은 노력을 진행하였지만, 전수단체 간의 합의점을 찾기 어려운 것은 택견의 원형을 보유한 송덕기에게 주목하지 않았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송덕기와 함께 초대 인간문화재였던 신한승25)신한승(辛漢承, 1928~1987) 서울 하왕십리 출생. 1949년 신흥대학 체육학과 레슬링 전공 1기생. 1957년 충주 한림중학교 체육교사를 하다 1년 만에 그만두고 서울 아세아극장에서 기도(木戸:きど) 일을 했다. 1970년 송덕기의 기사를 보고 서울로 가서 5년간 택견을 익혔다. 또 74년 박털백의 전수자인 이경천과 박무경의 전수자인 김홍식에게 활개짓 활용법과 낚시걸이 등의 수를 배웠다고 한다. 생계가 어려워질 정도로 택견연구에 힘을 쏟았고 1981년 11월 문화재 지정조사를 의뢰하였다. 1983년 6월 1일 문화재를 지정받는데 큰 공로를 세우고 1987년 7월 2일 충주 의료원에서 생애를 마감했다.이 문화재 지정에 기여한 공(公)도 크지만 지금과 같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볼 때, 그 원인은 송덕기가 보유한 택견의 형태에 대해 이해가 부족하였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일제 강점기 이후, 인멸의 위기에 놓여있던 택견이 다시 세상에 드러나고 지금과 같은 모습을 갖출 수 있는 것은 초대 예능보유자였던 송덕기라는 인물이 택견의 온전한 형태를 지녔기 때문에 가능하였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위와 같은 택견의 문제점 해결을 위해 기존의 연구들은 문화재 지정 과정에서 송덕기가 전수했던 형태로부터 변화된 점을 인식하지 않고, 송덕기가 보유한 형태에서 변화되어 정형한 자료를 기반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것이 사실이다.

송덕기에 대한 연구가 존재하지만, 기존의 도서와 연구마다 제시하는 시기, 기술의 명칭과 기술체계가 다르게 제시된 점도 확인할 수가 있다. 또한, 제자마다 이야기의 차이가 조금씩 있어26)택견계의 전수자들의 대부분은 신한승에게 전수받은 제자들이 주를 이룬다. 송덕기, 신한승 양 쪽으로 전수받거나 신한승의 제자들을 지칭한다. 기초자료의 부족과 검증의 부재라 판단하였다. 따라서 이 연구는 택견의 순수성을 몸에 고스란히 지니고 있는 송덕기의 생애와 택견기술 등의 전수내용을 구술사 연구방법을 통해 생존해 있는 송덕기의 직계 제자들 및 주변 인물들을 대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2. 연구의 과제

이 연구는 다음과 같이 송덕기의 생애와 택견 형태 및 전수내용에 대하여 고찰하였다. 일제 강점기 이후, 인멸의 위기에서 택견이 근대에 다시 시작되었던 사실로 미루어 보아 송덕기는 택견사(史)를 비롯하여 한국의 무예사․체육사(武藝史․體育史)에 있어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현재, 송덕기는 생존하고 있지 않지만, 송덕기에게 직접 택견을 배운 제자들이 있으며 주변 인물들이 생존해 있기에 이들을 통해 이 연구를 진행하였다. 이 연구의 과제는 세 가지이다.

첫째, 송덕기의 생애에 대한 고찰

둘째, 송덕기가 보유한 택견의 형태에 대한 고찰

셋째, 송덕기의 택견 전수내용에 대한 고찰

3. 연구방법

이 연구는 구술사를 주된 연구방법으로 사용하였다.27)이 연구의 구술사 연구방법의 형식 및 절차는 김주연, 2007 「태권도의 미국진출과 미국체육회 가입」 서울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 논문, 7쪽~13쪽을 참고하였다. 송덕기의 택견 활동에 대해 알아보고자 생전에 그와 함께 활동하고 송덕기에게 직접 택견을 전수받은 제자 및 주변 인물들을 대상으로 삼았다. 구술사를 연구방법으로 선택한 가장 큰 이유는 송덕기에 관한 자료의 부족을 해결하기 위함이다. 기존의 단편적인 자료나 다른 연구물에 있는 인물도감 정도의 자료가 전부이고 제자들에 의한 인터뷰 기록이나 제자들의 증언이 있기는 하지만 서로의 증언조차 조금씩 차이가 있고 정확한 연대에 대해서도 단체 및 연구결과에 차이가 있는 점으로 볼 때 신뢰성의 문제가 있다고 여겨진다. 송덕기의 생애와 택견형태 및 전수내용에 대해 자세하게 모색하기 위해 이 연구는 구술사를 연구방법으로 선택하였다. 또한, 구술자료의 신빙성 및 신뢰성을 뒷받침하기 위해 송덕기에 관련된 문헌 자료, 기존의 택견 사건들을 다루는 각종 연구물, 개인문서 등 자료들은 당시 상황을 비추어 보는 사실 확인 도구로 사용하였다.

1) 구술사

이 연구에서 주로 사용할 연구방법은 구술사(口述史, Oral History)이다. 구술사는 과거의 기억을 회상한 것을 주된 재료로 사용한다. 집단적 기억이나 사회적 기억을 통한 증언이 역사로 기록되는 것으로서, ‘구술’ 혹은 ‘증언’이라고 하기도 한다.28)정혜경, 2005 「구술사, 개념적 이해」『구술사: 방법과 사례』, 18쪽. 구술사는 구술자의 기억에 따라 정확성, 주관성의 한계를 드러낸다는 관점도 있지만, 근현대사 연구에서 구술사는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구술사는 주로 문제에 대해 직접 참여하여 역사를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을 이점(利點)으로 들 수 있다. 또한, 문헌사료만으로 확인할 수 없는 사실에 대해 검증이 가능하며 기존의 문헌사료에 대한 분석, 알려지지 않은 문헌사료와 사진자료의 공개 및 발굴을 촉진 시킨다는 점을 들 수가 있다.29)정혜경, 2005 「구술사, 개념적 이해」『구술사: 방법과 사례』, 40쪽.

구술사는 구술자와 면담자간에 질문과 답변을 통해 구술자의 경험에 대한 설명을 구술로써 이끌어내고, 수집된 구술자료는 증언으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게 된다. 이 연구는 증언으로 수집된 구술자료를 녹취 작업을 거쳐, 관련 부분에 직접 삽입하여 인용하는 방식을 택하였고 인용문의 신뢰도를 위해 구술자의 증언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이런 측면에서 송덕기에게만 택견을 전수받은 제자들을 중심으로 면담을 진행할 필요성이 요구되었다. 송덕기의 택견 기술과 그 전수과정에 대해 제자들을 통하여 보는 것은 송덕기에 대한 기존 자료의 사실 확인과 주목받지 못했던 사실들에 대해 재조명을 하여 새로운 문제 제시와 기존에 가진 문제점을 일정 부분 해소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현재 송덕기에 대한 기록은 매우 미약하게 기존자료들은 설명하고 있는데 이러한 부분을 보충하여 기존의 택견 역사나 관련 자료에 추가하여 택견 역사 전체의 흐름을 연결 짓고 파악하는데 일정부분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구술자료 수집을 위해 구술자 선정 후 각 구술자들과 2~4차례에 걸쳐 일정을 잡았으며 구술자료는 다음과 같은 순서에 의해 수집되었다.

a) 문헌 자료 수집과 구술자 선정

택견 관련 서적과 연구물 그리고 internet 검색을 통해 택견과 송덕기에 관련된 자료를 조사 후 선정을 하였다. 구술자 선정은 송덕기와 밀접하게 관련이 있는 인물과 직접 전수 받은 제자들을 선정하였는데, 택견 전승자 중 송덕기와 신한승 두 명에게 택견을 전수받은 제자들은 제외하였다. 구술자 면담 일정은 택견인들과 internet에서 얻을 수 있는 전화번호 및 이메일과 같은 연락처를 통해 연락 후 면담 내용과 일정을 알리고 시간 조정을 한 후 면담을 가질 수 있었다. 구술자들 중에는 미국에서 활동하기 때문에 사전 연락과정이 필요하였는데 때에 따라서는 internet 화상 채팅30)대표적으로 www.skype.com이 있다.을 이용하여 면담을 진행하기도 하였다.

b) 예상 질문지 작성

선정된 구술자들에 대해 예상 질문지가 필요하였는데, 제자마다 송덕기에게 다른 시기와 연령대의 차이를 두고 전수받은 점을 미루어 볼 때, 전수 과정에 개인의 경험과 서로 다른 것을 느끼고 정리할 수 있기 때문에 각기 다른 예상 질문지를 작성하였다. 전수 내용에 대한 것들은 공동 질문지를 사용하였는데 이는 전수 내용을 비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미리 준비하고 계획된 예상 질문지 외에 구술자들의 답변에 연관된 각기 다른 추가 질문을 통해 더욱 상세히 구술자들의 구술을 담을 수 있는 구체적인 질문들로 연결되었다. <표 1>은 이 연구에서 사용된 구술자료 수집을 위한 예상 질문지의 일부이다.

<표 1> 구술자료 수집 예상 질문지
구술자: ○○○
구술일시: 2011년 8월 5일 13:00-16:40
구술장소: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8) 중학 시절 어떻게 송덕기 선생님을 만났게 된 것입니까?
(9) 그 당시 택견에 흥미를 느끼셨습니까?
(16) 송덕기 선생님과 경회루에서 사진 촬영은 언제, 어떻게 촬영하게 된 것입니까?
(17) 그 당시 촬영을 했던 동작들은 어떠한 기술들입니까?
c) 구술자료 수집 및 현황

구술자료 수집을 위해서는 송덕기의 생존기간 동안 택견을 직접 전수받은 제자와 밀접한 주변 인물들을 통해 진행하였으며 연구자는 구술자들의 일정과 맞춰 2011년 11월․12월, 2012년 6월․7월․8월․9월․12월에 면담을 진행하였으며 <표 2>와 같다.

<표 2> 구술자료 수집 현황
순번 구술자 전수 또는
접촉기간
거주지 무예활동 면담시간
1 박철희 1958 ~ 1961 한국 태권도원로 7시간
2 김병수 1961 미국 태권도원로
자연류 창시
5시간 20분
3 고용우 1969 ~ 1977
1983 ~ 1985
미국 현암위대태껸 7시간
4 도기현 1982 ~ 1985 한국 결련택견협회 5시간

구술자 중 김병수와 고용우는 미국에 거주하였는데, 한국 방문 기간을 이용하여 면담을 진행하였고 때에 따라 internet 화상 전화를 이용하여 면담을 추가적으로 진행하였다.

d) 녹취문 작업

구술자료 수집을 한 뒤에는 녹취 및 녹화 자료를 문서로 만드는 작업을 하였다. 녹취문을 작업하는 것은 녹음과 녹화된 구술자료를 가지고 작성하는데 녹음․녹화 시간 당 6시간에서 9시간을 필요로 하였다. 그 이유는 구술자들의 구술자료에서 상황에 따른 행동이나 표정까지 고려하며 작업을 하였는데 구술 중 구술자의 심리적인 변화까지 고려되었으며 방언․문법․맞춤법 등에 수정하지 않고 소리 나는 그대로 작업을 한 뒤 작성된 녹취문은 최소 1회 이상 검독작업을 수행하기 때문이다.31)정혜경, 2005「기획에서 활용까지」『구술사: 방법과 사례』, 140~147쪽. <표 3>은 이 연구에서 사용한 녹취문의 일부이다.

<표 3> 구술자료 녹취문
구술자: ○○○
구술일시: 2011년 11월 29일 17:30-21:30
구술장소: 서울광역시 강남구 □□□의 자택(안방)
(면담자) 그 아까…. 태권도 쪽에서도 오셨다고 하셨는데 그 이전에는 고등학교 때 배운다고 가셨을 때, 그때는… 그런 일들이 없었습니까? 태권도 쪽 에서나…

(구술자) 그때 전혀.... 없었어요.. 아!! 임창수 선생님!!! 임창수 선생님이 그때 그... 태권도협회 계실땐데 왔다갔다 했어요. (화색이 돌며) 그때 인제 아마 태권도협회 계실땐데, 태권도형(形)이나 그런게 다 일본말로 되어있었잖아. 그러니까 그걸 한번 싹- 바꿨다구~!! 그러면서 택견을 뭐 칼잽이나 이런거(동작을 보이며) 품새로 바뀌고 이런게 그런데서(송덕기 할아버지의 택견기술에서) 아마 나왔을 겁니다. 품이나 품새라는 말이. 아마 거기서 나왔을 거에요. 그 사람들이 어떻게 이야기 할지는 모르지만 그때 그 당시 임창수 선생님 왔다 갔다 할 때, (택견 명칭을 따서)품새가 나오고 칼잽이가 나오고 접목됐다고 내가 얘기를 들었어요.

2) 문헌 고찰

이 연구에서 문헌 자료는 송덕기와 택견에 관한 국내 도서와 잡지를 수집하고 택견과 관련된 초기 태권도의 서적, 논문, 잡지, 신문, 사진 등을 통해 근거로 사용할 수 있는 자료를 사용하였으며, 구술자료 수집 중 확보할 수 있는 편지, 사진 등 당시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에 대해서는 검토 과정을 거쳐 사용하였다. 택견의 관련 출판물은 주로 1990~2004년 사이 집중적으로 출판되었는데 대다수는 초대 예능보유자 신한승이 정리한 무형문화재에 지정된 자료를 바탕으로 출판된 것들이 많아 제약이 있었다. 그래서 확보된 자료들은 택견 이외의 태권도, 유도, 합기도 등 무도 관련 서적, 논문, 신문, 잡지 등 많이 자료들을 확보하여 당시 한국 근현대사, 문화와 비교하며 종합적으로 고찰하였다. 또한 구술자들이 소장하고 있는 자료들 중 참고할 수 있는 것들은 검토 과정을 거쳐 연구에 사용하였다.

3. 연구의 필요성

일제 강점기에 택견이 사멸되지 않고 현재까지 이어지는 것이 가능하도록 택견의 원형을 보유한 송덕기의 생애와 송덕기가 보유한 택견형태 및 전수내용을 살펴보고자, 송덕기에게만 택견을 전수받은 제자와 송덕기와 관계가 깊은 인물들의 구술자료와 관련된 문헌을 사용하였다. 이러한 방식을 통해 연구의 절차는 각 장별 주요점을 서술하였다.

Ⅰ장에서는 송덕기를 통한 택견의 전수과정과 택견의 내용에 대한 중요성을 연구의 필요성에 부합할 수 있도록 살펴보았다.

Ⅱ장에서는 초대 예능보유자의 송덕기의 생애와 그에 관한 기록들, 제자들에 대해 살펴보았다. 일제 강점기 이후 사라질 수 있었던 택견을 보유하고 전수한 송덕기의 생애와 그의 제자들과 주변 인물들에 대하여 다루었다. 송덕기의 생애와 배경을 통해 전수과정과 연관 지어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Ⅲ장에서는 송덕기가 제자들에게 전수한 택견의 기술을 살펴보고 그 속에 나타나는 전수과정과 기술의 원리와 형태를 살펴보았다. 현재 택견단체 마다 다른 수련체계와 원리, 경기방식을 사용하고 있지만 그 모체는 송덕기가 전수한 택견을 설명하고 있는 점이다. 그래서 송덕기가 전수한 택견 기술의 원리와 전수내용을 살펴보고 택견의 원형을 보유한 송덕기가 전수한 택견형태를 제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Ⅳ장에서는 결론으로 위의 각 장들의 내용을 요약하여 정리하였다.

5. 선행연구 검토

이 연구는 송덕기의 생애와 택견형태 및 전수내용을 살펴보았다. 택견이 무형문화재를 넘어 세계 유네스코 인류문화 유산으로까지 등재되었지만, 택견의 전수과정에서 후대에 논란이 많은 점을 본다면 그 필요성을 찾을 수 있다. 송덕기를 언급하고 있는 내용들은 그의 택견 활동들만을 비추어 보았을 때, 그에 관한 연구가 미비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박종관(1983)은 『傳統武藝 택견』에서 송덕기의 택견 기술을 정리하여 저술하였고 간단한 기술의 명칭이 풀이되어 있지만, 이후 출간된 택견 저서들과 명칭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다. 하지만, 책 머리말과 초입 부분은 송덕기의 증언으로 수록되어 의미가 있다.

박범남(1999)은 「송덕기 택견 수련체계 및 특성」에서 택견이 신한승에 의해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으나 신한승의 자의적인 해석이나 외래무예의 혼용에 대해 검증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송덕기의 택견 문화를 잃었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하지만 이 연구에서 수련체계 및 특성만 언급하였고 송덕기 개인에 대한 사실만 나열하였을 뿐이며, 수련체계는 초기 서울택견계승회(現 결련택견협회)의 수련체계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재고해 볼 필요가 있다.

김이수․허일웅(2002)은 「현암 송덕기와 택견에 관한 연구」에서 송덕기는 무예사적으로 큰 의미가 있는 인물이며 앞으로 많은 연구의 필요성에 대해 언급하였다.

김정윤(2002)은 저서 『태견. 위대편』과 『태견. 아래대편』에서 송덕기의 기술을 설명 없이 사진과 명칭만 나열하여 저술하였는데 송덕기의 택견 동작을 그대로 담고 있다는 것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자료의 한풀과 유사성 확인을 위해 김정윤의 저서들32)김정윤, 1962 『合氣術』, 김정윤, 1965 『氣道』, 김정윤, 1974 『삼각권』, 김정윤, 1988 『날주먹울.본,본때』, 김정윤, 1988 『한풀:본때』, 김정윤, 1989 『빌랑대(본)』, 김정윤, 1989 『빌랑대(본때)』, 김정윤, 2004 『팔뚝썰』, 김정윤, 2004 『날주박』, 김정윤, 2004 『다리수』, 김정윤, 2004 『빌랑대:한풀울수』, 김정윤, 2006 『꺾과시』, 김정윤, 2006 『뿔주박』, 김정윤, 2006 『솜주박』, 김정윤, 2006 『치살』, 김정윤, 2006 『한풀 뿔주막:울수』을 종합하여 봤을 때, 김정윤이 송덕기를 만나기 이전과 만난 이후 명칭이 다른 것을 확인 할 수 있었으며 동작 또한 추가 된 것으로 확인 할 수 있었다.을 종합하여 살펴보고 『태견. 위대편』과 『태견. 아래대편』의 내용 중 연속 동작들에 대해 동영상 작업33)나열된 사진들을 스톱 모션(Stop Motion) 작업 방식처럼 초당 10프레임으로 촬영된 사진을 영상으로 복원하는 작업을 하였다.을 통해 동작의 모습들을 살펴보았다.

도기현(2003)은 그의 저서 『택견 그리고 나의 스승 송덕기 : 택견의 젊은 고수 도기현이 쓴 우리 전통무예 택견과 스승 송덕기 옹의 이야기』에서 도기현이 송덕기에게 택견을 전수받은 과정을 에피소드 별로 구성되었는데, 그의 주관적 경험에 초점을 두고 기술하였다. 송덕기의 생애에 대해서도 살펴 볼 수 있다.

김정윤(2006)의 다른 저서 『태견 : 원전 제작 비화』의 내용은 2002년 출간된 『태견. 위대편』과 『태견. 아래대편』에 대하여 김정윤의 설명으로 제작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택견에 관련된 부분 외에도 다른 내용이 많이 기술되어 있어 검증 작업을 통해 확인이 필요하였다.

이용복(2007)의 저서 『바람이 불어도 가야한다』에는 송덕기에 대한 언급은 있지만, 초입 부분에만 등장하고 있으며 이용복 개인의 관점에서 수필 형식으로 저술하였다.

위와 같은 선행 연구를 통해 송덕기의 생애 및 택견기술과 그 전수내용을 확인했을 때, 송덕기의 생애와 택견형태 및 전수내용에 대한 부분은 이미 알려진 사실에 대해 반복적으로 나열한 자료 외에는 찾을 수 없었다. 송덕기가 보유한 택견기술에 대하여 박종관(1982)의 저서가 있지만, 이후 출간된 택견 저서들과 기술 명칭의 차이가 있으며, 도기현(2003)의 저서는 송덕기의 생애의 단면과 전수내용과 과정을 볼 수 있지만, 기존의 택견 저서에서 풀이하는 송덕기의 생애 연대(年代)와 차이가 있다. 김정윤(2006)의 저서 중 『태견 : 원전 제작 비화』는 기존의 자료와 매우 다르고 택견의 내용이라고 하기에는 어려운 부분이 많아 검증의 어려움이 있다. 그리고 현재 송덕기가 타계한 지 오랜 시일이 지난 상태여서 확인할 수 없고 후에 저술된 저서들은 본인들의 당위성만을 주장하고 있다. 따라서 이 연구에서는 송덕기의 주변인물과 직계제자들 증언을 바탕으로 사실을 명확히 확인하고자 진행하였다.

II. 송덕기의 생애

현대 택견의 초석인 초대 예능보유자 故송덕기(宋德基)는 온전한 택견의 형태를 보유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택견은 일제 강점기를 거쳐 1950년대에 들어 기억하거나 전수하는 이들이 없어 인멸될 위기에 있었지만 송덕기에 의해 1958년 이승만 대통령 탄신 기념으로 시범을 시작으로 1964년 한국일보를 통해 소개되면서 세간(世間)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송덕기가 세간의 주목을 받으면서 수많은 무예 단체들은 전통성과 정통성을 연관 짓기 위해 송덕기와 많은 접촉하였고, 송덕기와의 친밀감 정도와 접촉하는 사람의 무예에 대한 이해 수준과 송덕기를 접촉하는 목적에 따라 다르게 정리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과정에 있어서 송덕기 생애의 연대(年代)의 정리가 다르게 정리가 되어 온 것으로 볼 수 있었다.

송덕기의 생애에 대한 이해는 그의 택견 활동과 택견 전수과정에 있어서 주목하고 정리할 필요가 있다. 현대에 대중적으로 보급이 진행되고 있는 택견이 대한민국의 전통무예라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다면 그의 생애 및 활동에 주목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이 장에서는 송덕기의 생애를 살펴보고 그 당시 시대적 상황도 함께 살펴보고자 하였다. 일반적으로 현대 택견의 시작은 송덕기가 보유한 택견을 바탕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택견의 전수과정과 송덕기의 택견 기술을 살펴보기 전에 바탕이 되는 송덕기의 생애와 배경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1. 송덕기의 활동

1) 조선보병대

구한말, 1893년 1월 19일 서울 종로구 필운동에서 송태희(宋泰熙)의 막내1)도기현, 2003 『택견 그리고 나의 스승 송덕기』, 47쪽에서는 기존에 문화재 지정 시 송덕기의 가족관계 7남 7녀 중 막내가 아니라 2남 3녀의 막내라고 이야기 하고 있다. 이용복, 1990 『(韓國武藝) 택견』, 95쪽에는 7남 7녀라고 기록하고 있고 정경화, 2002 『택견원론』 84쪽에도 7남 7녀로 기록하고 있다.로 태어난 송덕기는 유년시절 당시 나라가 어수선했지만2)각 협회 기록과 저서의 기록 상 송덕기의 출생 당시는 조선말기인데, 갑오경장(甲午更張)을 중심으로 사회적, 문화적, 정치적으로 격동의 시기였다. 갑오경장은 1894년(고종 31년)부터 1896년까지 세 차례에 걸쳐 추진되었는데 일본이 배후에 있었다고 하나, 근대화의 기점이 될 만큼 중요한 제도개혁이 있던 시기였다. 실학부터 갑신정변, 동학농민전쟁 등 매우 혼란한 시기임을 알 수 있다., 아버지가 국가 하급관리, 어머니는 잡화가게3)도기현 2003 『택견 그리고 나의 스승송덕기』, 47쪽에서는 송덕기 어머니 김氏는 필운동 삼거리에서 잡화가게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용복, 1990 『(韓國武藝) 택견』, 95쪽에서는 송덕기의 아버지 송태희씨가 잡화가게를 했다고 기술하고 있다.를 해서 비교적 여유 있는 환경에서 자라며 큰형에게 택견을 배울 수 있었다. 청년시절부터 스승 임호에게 택견을 전수받으며 기량이 높아짐에 따라 마을의 택견꾼들과 함께 사직골을 대표하여 유각골, 옥동, 애오개 등의 택견꾼들과 겨뤄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다. 송덕기의 체구는 작지만 솟구치며 쓰는 발길질과 정확하고 다양한 기술을 잘 사용하여 구경꾼들에게 인기가 좋았다고 한다.4)택견판에서 활동 당시 송덕기의 정확한 나이는 각 협회나 저서마다 다르지만 도기현, 2003 『택견 그리고 나의 스승 송덕기』, 48쪽은 16세로 이용복, 1990 『(韓國武藝) 택견』, 95쪽은 10대 후반으로 정경화, 2002 『택견원론』, 84쪽에서는 20세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송덕기는 이보형, 1984 「선조의 수련세계(구술자: 송덕기)」『KBS문화마당』에게 “내가 재빠르고 발길질을 잘해서 어른들이 끼어 넣었다”라고 말하고 있다.

송덕기는 17세에 결혼을 하고 곧 군에 입대하게 되었다.5)송덕기가 군에 입대를 하였을 때, 부대에 대해서도 설명이 다르다. 이용복, 1990 『(韓國武藝) 택견』 96쪽에는 조선보병대, 대한태권도협회, 1971 「살아있는 태껸인 송덕기 옹」『태권도』 제3호에서는 조선포병대라 하고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시스템, http://people.aks.ac.kr 2012년 4월 15일 검색에는 조선포병대라 설명을 하고 있다. 그 당시 군(軍)은 지금과 달리 출퇴근하면 되기 때문에 계속 택견을 하며 택견판에 참가했다. 송덕기는 운동신경이 좋아서 군에서 사병들에게 근대식 체조로 ‘뜀틀’과 ‘철봉’을 가르쳤다고 한다. 정경화(2002)는 송덕기의 군(軍) 제대는 23세이고6)정경화, 2002 『택견원론』 84쪽. 이용복(1990)은 27세에 입대하여 3년간이라 설명하고 있다.7)이용복, 1990 『(韓國武藝) 택견』 96쪽. 도기현(2003)은 17세에 결혼을 하고 곧 군에 입대라고 기술하고 있다.8)도기현, 2003 『택견 그리고 나의 스승 송덕기』 48쪽.

송덕기 묘비
<사진 1> 송덕기 묘비

위의 <사진 1>을 보면 송덕기의 묘소에 1882년이라고 기록이 되어 택견인(人)들 사이 송덕기 생애에 있어 오해의 소지가 있는 부분이다. 한풀의 김정윤은 송덕기에게 택견 정리를 하며 녹취를 하였는데 그 일부는 다음과 같다.

“(입대를) 스물세 살, 스물네 살 때...(했어요). 출퇴근했어요. (근무는) 한 삼년동안 했어요.…(중략)…아, 이.. 저.. 저.. 이태왕. 그. 저.. 저.. 시방. 어, 황제! 이왕. 그 양반이 어른이 되도록 창덕궁에 있었거든요. 창덕궁에.. 네. 창덕궁에 있을 때 거기 들어가서 본(시범) 들어가죠. 아침이면 들어가고 저녁이면 나오고. 하루 한 번씩 그러고, 그러고 거기 에 있다가 얼굴 본게 몇 번 되요.”9)밝터, 2012 「1986년 송덕기 구술자료 일부」『위대태견연수과정』 홈페이지(http://www.barktur.com/shop/shopdetail.html?branduid=409934) 2012년 11월 10일 검색.

송덕기 증언의 일부를 살펴보면 기존에 제시된 자료10)이용복, 1990 『(韓國武藝) 택견』, 96쪽, 정경화, 2002 『택견원론』, 84쪽, 도기현, 2003 『택견 그리고 나의 스승 송덕기』, 48쪽.들과는 달리 송덕기는 24세에 군대에 입대하여 창덕궁에 있는 이왕(李王)11)이왕(李王)은 일제 강점기에 사용되던 직위로 1910년 경술국치(庚戌國恥) 이후 대한제국의 황족을 일본의 황족이자 왕으로 대우하면서 붙인 칭호이다.를 보았다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왕(李王), 이태왕(李太王)을 혼용하며 황제라고 지칭을 한다. 하지만, 여기에서 언급한 이왕은 창덕궁에 기거하는 순종(純宗)이라 볼 수 있다.13)당시에 창덕궁에 기거한 왕은 순종(純宗)이다. 순종은 창덕궁에서 1926년에 생을 마감하였다. 조선보병대의 활동이 일제 강점기에 황실친위부대12)1907년 조선 군대 해산 이후 왕실 근위대로 유지되며 조선왕실근위대, 조선근위대라고도 부른다.에서 나누어 운영된 조선기병대와 조선보병대가 1913년을 기점으로 1915년부터 1931년까지 이루어진 것으로 보아 송덕기는 1916년부터 1918년까지 조선 보병대에서 근무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이왕(李王)이 창덕궁에 있다는 점을 미루어 알 수 있다. 송덕기의 출생은 1893년으로 확인 할 수 있으며 송덕기가 조선 보병대에 복무한 나이는 24세부터 26세까지로 확인 할 수 있다.

2) 택견 스승 임호

당시 서울과 서울 인근에서는 택견을 많이 했었다고 하는데,14)이보형, 1984 「선조의 수련세계(구술자: 송덕기)」『KBS문화마당』의 인터뷰에서는 임호에게 4년간 배웠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송덕기가 태어나고 자란 사직골15)필운동, 누상동, 누하동, 사직골은 서울에서 택견이 성행하고 택견이 강했던 곳으로 알려져 있으며 사직골 일대를 ‘본터바닥’이라고 불렸다고 한다(결련택견협회, http://taekyun.org/kltk/kltk_subd.php) 2012년 4월 12일 검색. 하지만 박종관, 1983 『傳統武藝 택견』에는 ‘안터바닥’이라 기술하고 있다.에서 큰 형에게 13세 경 3년간 택견을 배우고 16세에 임호(林虎)에게 또래 10여 명16)박종관, 1983 『傳統武藝 택견』, 22쪽과 이용복, 1990 『(韓國武藝) 택견』, 93쪽에서 제자들은 송덕기의 기억에 의하면 김영덕, 이귀돌, 이태환, 신봉기, 김성환, 하봉근, 고재덕, 유상태 등 10여명이고 신봉기는 키가 작아 복장지르기는 못 하였지만 품밟기를 잘했고, 고재덕은 나이도 많고 체격도 좋은데 실력까지 좋아 임호로부터 칭찬을 많이 받았다고 함. 훗날 1958년 경무대 택견시범에서 김성환이 같이 하였다.과 함께 택견을 배우기 시작하였다.

임호는 송덕기보다 훨씬 연상이었으며 그 당시 택견으로 이름이 높았다고 한다. 팔 힘이 세서 한번 잡으면 상대가 빠져나가기 어려웠고 기술이 범과 같이 빠르고 날렵하였다고 한다. 또한 사방의 상대를 어르고 만인 상대 겨루기를 잘하여 ‘인왕산 호랑이’라고 불리며 장안8장사로 꼽혔다고 한다. 성격이 과묵하고 점잖았으며 자존심이 매우 강했다고 한다.17)도기현, 2003 『택견 그리고 나의 스승 송덕기』, 48쪽은 송덕기의 스승 임호가 20년 정도 연상이었다고 말하지만 이용복, 1990 『(韓國武藝) 택견』, 93쪽의 자료에서는 송덕기보다 18세 위였다고 한다. 정경화, 2002 『택견원론』, 83쪽에서는 송덕기보다 11세 위이며 1882년생(고종 19년)이라고 하고 있다. 송덕기와 임호에 대해서는 정확한 연대를 알기 위해서 그 당시 있었던 송덕기의 가족이나 임호의 가족에 대해 확인할 필요가 있다.

송덕기가 임호로부터 택견을 배울 때 일정한 수련 및 학습체계는 없었으며, 선생이 동작을 보여주면 따라 하고 말로 일러주는 대로 혼자 연습을 했었다고 한다.18)이용복, 1990 『(韓國武藝) 택견』, 95쪽에서는 연습시간은 보통 초저녁에서 한 시간 남짓, 사정에 따라 그때그때 시간을 정하여 모였다고 한다. 복장은 고의적삼에 솜버선을 신거나 짚신을 신고 수련은 주로 나무 밑둥치를 치거나 사람형상의 허수아비를 만들어서 발질 연습을 하고 주로 두 사람이 마주 대하여 서로 메기는 연습을 많이 했었다. 임호에게 택견을 전수받은 기간은 4년에서 10여 년쯤으로 알렸다.19)송덕기가 스승 임호로부터 택견을 전수받은 기간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이 없지만 그의 증언을 따르면 도기현, 2003 『택견 그리고 나의 스승 송덕기』, 48쪽에서는 10여 년간 배웠다고 한다. 이보형, 1984 「선조의 수련세계(구술자: 송덕기)」『KBS문화마당』의 인터뷰에서는 임호에게 4년간 배웠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송덕기는 본인의 증언에 택견을 배우게 된 이유와 스승 임호의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하고 있다.

“(처음 태견을 가르친 것은)우리 형님. (가르친 것은)한... 한 삼년 됐다 카대. 그때(가)... 내가. 열... 네살땐가... 세 살땐가. ...그때는 저... 우리 아버님이.. 날 하는 걸 보시니까. 왠만하게 하니까 이제 임호 냥반한테 죽두록같 해기지고 재바르게 시작해가지고.. 하하하하(웃음)...(임호에게 태견을 배운 것은)네. (열)여섯 살 때에요. (열)여섯 살 그러든요.... (임호선생이 쉰둘에 돌아가실 때까지)동네에서 날마다 날마다. 자고나면.(날마다 날마다)”20)밝터, 2012 「1986년 송덕기 구술자료 일부」『위대태견연수과정』 홈페이지(http://www.barktur.com/shop/shopdetail.html?branduid=409934) 2012년 11월 10일 검색.
“그때는 열세 살이에요.…(중략)…네. 그때는 축구도 하고요. 학교, 국민핵교 댕길 땐데 우리아버지 친구들이 자꾸 와설랑은 불러서 나를 끌고 올라가가주구 활을 봤어요. 활을 쏘게 되니까 활을 쏘가지고 와설랑 그.. 젊은 어린아이 기운이라 활을 쏴설랑 맞으니까 됐다 그러면서 자꾸 가르쳐 줘설랑 그래이제 시작을 했습니다. (중략)… 네. 나요? 임호라는 선생님한테 배웠습니다. 수풀림(林)자, 호랭이 호(虎)짜요. 한 백한 사십 살 됐을 겁니다. 한 4년간 배웠어요.”

송덕기가 임호로부터 택견을 배웠다는 시점은 16세이고 육성을 통해 전하고 있는 것으로 볼 때 기존 자료의 17~18세에 임호로부터 택견을 전수받은 것은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다. 고종황제 시절부터 택견을 1905년에 큰형에게 시작하여 3년간 택견을 익히고 순종 2년인 1908년에 임호에게 택견을 배운 것으로 볼 수 있다. 1984년 KBS 한국방송 사업단의 「선조의 수련세계」 『KBS문화마당』에서 임호로부터 '4년간 택견을 배웠다' 말하는 송덕기 선생의 증언과 1986년이라는 김정윤과의 증언은 문제가 될 수 있다. 기존 택견 자료를 통한 임호의 나이는 송덕기보다 11세 연상에서 18세 연상으로 설명을 하고 있는데 이것은 황학정에서 활을 병행하기 이전이며 '택견을 4년간 배웠다'다고 언급을 한 것은 임호로부터 집중적으로 택견을 배운 기간이라 볼 수 있다.

3) 황학정

송덕기는 임호로부터 택견을 집중적으로 전수받은 지 4년 되던 1913년에 집안의 권유24)이용복, 1990 『(韓國武藝) 택견』, 96쪽과 도기현, 2003 『택견 그리고 나의 스승 송덕기』, 49쪽에서는 송덕기가 택견을 그만두게 된 것은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면서 아버지와 형님들의 만류 때문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黃鶴亭100년사편찬위원회 편, 2001 『(近代弓道의 宗家)黃鶴亭 百年史』, 305~306쪽에서는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면서 택견수련과 경기가 철저히 금지되고 부친이 송덕기가 싸움꾼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 황학정을 보냈다고 기록하고 있다.로 집 근처 활터인 황학정25)황학정(黃鶴亭)은 현재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동 산1-1에 위치하였으며 제작 시기는 일제강점기였다. 유형문화재 제25호(1974)로 지정되어 있다. 광무 2년(1898) 고종의 명으로 경희궁 회상전(會祥殿) 북쪽 담장 가까이 세웠던 궁술 연습을 위한 사정(射亭)이다. 일제강점기 때 경성중학교를 짓기 위해 경희궁을 헐면서 사직공원 북쪽 등과정(登科亭) 옛터인 현재 위치로 이건 되었다.에서 21세의 나이로 국궁을 배우기 시작하였다.26)黃鶴亭100년사편찬위원회 편, 2001『(近代弓道의 宗家)黃鶴亭 百年史』, 350쪽 기록 및 자료에서 宋德基가 1913년 6월에 시작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黃鶴停에서 宋德基는 시수꾼은 못되었지만 편사나 궁술대회에 말썽이 생기면 현장에 달려 나가 수습을 하는 해결사였다고 한다. 1920~1930년대에 걸쳐 일제하에서 각종 궁술대회에 宋德基의 입상(入賞) 기록은 신문지상에 보도된 것이 없지만 黃鶴停의 편사원으로는 항상 낄 수 있었던 중(中)급의 사원이었다. 1975년 그가 83세 때에 黃鶴停 제126회 삭회에서 1등을 한 기록이 마지막 입상기록이다.…(중략)…宋德基는 자신의 택견에 대해서 사회적 관심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그 기능을 후세에 전수하기 위한 노력은 별로 하지 않았던 것이다. 70년대에 와서 택견에 관심이 있는 젊은이들이 나오게 되자 宋德基는 黃鶴停주변 특히 감투바위(帽岩) 부근에서 택견기능을 전수하기 시작하였다.”27)黃鶴亭100년사편찬위원회 편, 2001『(近代弓道의 宗家)黃鶴亭 百年史』, 306쪽.

송덕기는 택견을 익히고 그 기능을 통해 황학정에 생기는 문제에 대해 나서서 해결했던 것으로 보이며 활 쏘는 것을 평생 취미 생활로 해온 것으로 볼 수 있다. 송덕기가 황학정에서 일어나는 문제에 대해 해결사처럼 활동하였던 것은 그가 가진 능력으로 요즘의 경호․경비원의 역할을 한 것으로 미루어 볼 수 있는데, 그 바탕은 택견으로 단련된 무예․격투 능력과 자신감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황학정은 송덕기 삶에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송덕기가 임호로부터 택견을 배운 곳은 황학정 뒤 인왕산 자락의 감투바위 일대였고 훗날 송덕기가 제자들을 양성하던 곳이기도 하다.

이 기간 중에는 송덕기가 다양한 활동을 하였던 시기이기도 한데 임호로부터 택견 전수, 조선 보병대 입대, 불교청년회 축구단 창설을 함께 하였던 시기이기도 하다. 송덕기가 황학정 활동에 전념한 시기는 1922년 임호의 사망과 황학정이 현재 위치로 이전된 시기와 불교청년회 축구단이 조선축구단으로 명칭이 변경되며 해체된 시기로 1922년부터 1925년으로 판단할 수 있다.

4) 불교청년회 축구단

송덕기는 군(軍)에서 근대체육을 군인들에게 가르치기도 했지만 축구에도 능하였다. 불교청년회 축구단28)1917년 서울을 연고로 결성된 축구 클럽이며 전체명칭은 불교축구회 청년단(佛敎蹴球會 靑年團) 1925년에 조선 축구단으로 재결성이 되었고 홈구장은 지금의 고려대학교인 보성학교 운동장이었다. 위키백과 “불교청년회 축구단” 2012년 4월 15일 검색.으로도 활동을 하는데 신문기록으로 나타난 시기는 송덕기 30세, 31세의 일이다. 송덕기의 불교청년회 축구단 활동을 엿볼 수 있는 것은 1922년, 1923년의 신문자료에서 확인할 수 있다.

“불교 대 무오 전은 실로 장관이었다. 양 팀 선수들이 축구선수들 중 이름난 선수들로 혹시 불교가 이길까 하지만 어느 편이 승부를 낼지 큰 궁금증을 지닌 체, 1시 5분에 강익선 심판 진행에 승부를 보았다. 불교의 포지션 좌 풀백에 송덕기다. 송덕기의 특기는 수비를 잘 하고 멀리 차며 왼발도 잘 차며 그중에도 인사이드로 잘 찬다. 그는 파울을 내지 않고 한 치의 어긋남도 없는 선수이다….”29)「最後의白熱戰 優勝의榮冠은徽文,戊午에」『동아일보』1922년 2월 15일 고증.

“호랑이 같이 뛰고 용같이 나는 청년단 예선전은 이것으로 끝을 맞게 되었다. 누가 승리까지 가고 못가는 것은 다음에 있는 준결승전에 달렸다. 분위기대로 장내는 기상조건과 마찬가지로 알 수 없는 처량한 분위기가 가시지 않았다. 수양팀의 기권으로 1회 예선전에 승리를 얻는 불교팀…(중략)…F.B.송덕기”30)「決勝을 압두고 全朝鮮蹴球大會第三日(전조선축구대회제삼일)」『동아일보』1923년 11월 24일 고증.

송덕기의 축구 실력은 발재간이 좋고 실수가 없는 선수로 기록을 하고 있다. 송덕기의 경우 포지션은 풀백(FB, full-back)으로 활동을 하였는데 당시의 축구를 보아 요즘의 센터백(CB, center back)의 역할을 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31)위키백과, “축구의 포지션”, 2012년 11월 28일 검색. 송덕기의 위와 같은 활동은 택견으로 익힌 발재간이 상당한 영향을 주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불교청년회 축구단 우승사진
<사진 2> 전조선축구대회 우승 불교청년회 축구단(1922)

당시 송덕기가 있던 <사진 2>의 불교청년회 축구단32)大韓蹴球協會 편저, 1986『韓國蹴球百年史』, 43쪽. “1922년, 제3회 전조선축구대회에서 우승한 불교청년회축구단(배재학당 운동장).”은 각종대회에서 맹위(猛威)를 떨쳤는데 조선체육회가 주관한 전조선축구대회(全朝鮮蹴球大會)에서 우승 2회, 준우승 3회를 하였다.33)大韓蹴球協會 편저, 1986『韓國蹴球百年史』, 155쪽. 불교축구단은 1917년 결성되어 고려대학교의 전신(前身)인 보성전문 운동장에서 연습을 하였다.34)위키백과, “불교청년회 축구단” 2012년 11월 28일 검색. 송덕기는 축구선수로 불교청년회 축구단 설립부터 활동을 하였는데,35)大韓蹴球協會 편저, 1986『韓國蹴球百年史』, 155쪽. 조선보병대 복무기간을 고려한다면 제대 후부터 본격적으로 활동을 하여 1925년 불교청년회 축구단 해산까지 활동한 것으로 볼 수 있다.36)大韓蹴球協會 편저, 1986『韓國蹴球百年史』, 156쪽.

5) 경찰무도대회 시범

1958년 3월 송덕기는 경찰무도대회에서 택견 시범을 하였다. 이승만 대통령이 평소에 개인적으로 택견을 좋아해 경무대 경위로 있던 이승구는 송덕기가 택견 시범을 보일 것을 요청하여 송덕기는 어릴 적 스승 임호에게 같이 택견을 배운 김성환(金聖煥)을 찾아 연습을 하였다. 당시 김성환은 일제강점기에 집안이 망해 실의(失意)로 매일 술에 빠져 거동이 불편해 기능도 발휘하지 못했다. 이때, 송덕기와 경무대 사범으로 재직 중이던 박철희와 송덕기의 인연이 시작된다.

“네. 이대통령이 경무대 경찰서에 그 누구야... 경무대 경찰서에. 어... 경무대 경찰서 하튼 덕수궁 안에 있었었는데. 창덕궁 안에. 창덕궁 안 에 있을 때에. 그때에... 어.... 이승구라고 하는 경위가 있었어요.…(중략)…네. 그 양반이 나하고 친구거든요 아주. 근데 사직동 날 찾아와서 이 사람 아주 얼마나 고생한다 그러구. 날 찾아 설랑 그 사람한테 얘기가 되 가주구설랑 누하동, 누하동 사는 김성환이라고 있어요. 김성환이라고 있는 그 사람이 택견을 좀 허거든요. 근데 얘도 무주라. 맨 술만 먹는 사람이서들랑 그걸 데리고설랑 데려다가 설렁탕집 아랫방 두고 설랑 날마다 아주 설렁탕으로 보복을 시켰죠. 그래서 한 한 보름동안 하다가 데리고 나가서 택견을 곧잘 하게 집어넣고 한 거지. 헤헤, 해보니까 설렁탕 먹은 기운이 좀 나서 그래서 인제 데리고설랑 했었어요. 했는데 그 양반이 몸이 좀 한 동작 요요요 만한 거 한 봉지 돈 십 만원 줬어요.”37)밝터, 2012 「1986년 송덕기 구술자료 일부」『위대태견연수과정』 홈페이지(http://www.barktur.com/shop/shopdetail.html?branduid=409934) 2012년 11월 10일 검색.

“옛날에 소공동, 소공동 유도대학이 그 당시엔 유도대학교가 아니고 대명유도학원인가 그럴꺼야. 대명 유도학교? 유도학원? 그래서 이제 자기네들은 유도학교. 또 나중에 유도대학. 그래서 그... 이제황 선생님(께서 무도대회를 주관하셨지)”41)김병수, 2012년 8월 5일,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면담 사료 고증.

“그... 경무대에는 말하자면 전국 무도대회를 했어요. 매년 이승만 박사 생일에. 생신에 그... 대회를 했더니 그때 내가 주제를 헐 적에 그니까..…(중략)…그날 눈이 많이 와서 소공동 유도회관에서 했어요. 거기가 지금(있는) 용인대학교라구.(웃음)”42)박철희, 2012년 7월 5일, 인천광역시 남구 면담 사료 고증.

1958년 경찰무도대회에서 송덕기가 택견 시범을 보이게 된 것은 이승구 경관의 요청이 있었는데, 송덕기는 이승구 경위와 친구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다. 유년시절부터 친구로 지냈는지는 알 수는 없지만 이승구 경위와 송덕기가 친분이 있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송덕기가 택견 시범을 할 때, 김성환을 찾아 다시 연습을 시켜서 시범을 한 것은 기존 택견 관련 연구 자료와 서적에서 설명을 하고 있다.38)이용복, 1990 『(韓國武藝) 택견』, 83쪽, 도기현, 2003 『택견 그리고 나의 스승 송덕기』, 51쪽 굳이 송덕기가 혼자서 시범을 하지 않고 김성환을 찾은 것은 택견의 전수형태나 기술이 중국무술이나 일본의 공수도(空手道)처럼 혼자 할 수 있는 형식이 없고 상대와 마주 서서 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증언에 있어서 송덕기가 시범기술을 할 때 ‘배대기’39)유도(柔道)의 배대치기와 같은 것으로 보이며 현재 대한택견협회, 결련택견협회의 수련체계에서는 사용하지 않고 전수하지 않는 기술이며 한국택견협회 수련체계에서는 ‘무릅대치기’라고 하고 있다.를 한 것으로 이야기를 한다. 이용복(1990)은 시범 할 때 송덕기의 장기(長技)라고 하는 두발당상, 무르팍치기, 배재기라 하였고 그 외 안오장치기, 칼잽이 등의 시범을 보였다고 기록을 하고 있다.40)이용복, 1990 『(韓國武藝) 택견』, 83쪽에서는 이용복이 채록한 경무대 시범의 기술 중 배대기, 무르팍치기는 송덕기가 김정윤과 인터뷰 중 ‘배재기’라고 말한 것들과 같은 것으로 보인다. 무르팍치기는 예용해, 1973 「무형문화재 조사보고서 제102호」에서 누우면서 쓰는 기술을 ‘무릎팍치기’라고 하였다. 송덕기의 시범에서 몇 가지를 유추를 할 수 있는데 현재의 택견 경기 규칙이 ‘얼굴을 때리는 것’과 ‘상대를 넘어뜨리는 것’이 승리 규정으로 두고 있는 것에 반해, 송덕기가 즐겨 사용하였다는 기술들 중 유도(柔道)의 배대뒤치기와 유사한 배대기, 배재기, 무릎팍치기는 빠지지 않고 기록에 나온 다는 것이다. 당시 1958년 3월 26일 송덕기는 김성환과 함께 서울 중구 소공동 구 유도중앙도장에서 택견 시범을 보였는데, 송덕기가 시범을 보인 유도중앙도장은 용인대학교의 전신(前身)이다.

6) 대한택견무도연구원

1958년 경찰무도대회에서 권법 시범으로 왔던 박철희와 인연이 생긴 송덕기는 당시 박철희가 근무 중이던 경무대의 상무관(尙武館)1)창덕궁에 있는 경무대 경찰서 소속으로 운영하던 무도관(武道館)이다.으로 자주 방문을 하였는데 송덕기가 살던 사직동과 가까워 매일 방문하였다.

경무대 상무관 기념촬영
<사진 1> 경무대 경호원들의 도장 상무관 사진 (사진제공: 김병수)

송덕기는 <사진 1>에 보이는 것처럼 상무관에서 박철희, 김병수, 정화 등과 인연을 만들게 된다.2)김병수 사범의 미국 도장 홈페이지(www.kimsookarate.com/gallery-old-days/58_blueHouse/blueHouse.htm), 2012년 12월 3일 검색. 사진의 가운데가 송덕기, 그 왼편이 박철희, 오른쪽 김병수, 하단의 맨 오른쪽이 태권도 前세계 태권도 연맹 집행위원 정화이다. 나머지 흰띠를 매고 있는 사람들은 경무대 소속 경호원들이다. 송덕기는 경무대를 방문하여 박철희가 경호원들을 지도하는 모습을 지켜보거나 무예 관련 이야기를 하였다고 한다.

“송 선생님은 가령 거기 오셔서. 그니까 말하자면 날 그냥 도와주시는 걸로 해서 도와주시는 분이지.. 직접 많이 활동은 안하시고 그냥 말로만 얘기로 그냥 그렇게 하시고 어...…(중략)…(몸으로) 배운건 별로 없어요.. 나는 인제 (젊지만) 경무대의 말하자면 무도, 무예사범이니까 내가 저걸하고 그러니까... 이 양반이 (하는 것을)보존할려고 하고 살리는 걸, 아시고 그러니까 그전에는 나는 택견에 대해서 찾을라고 여러 군데를 돌아다녔어요.…(중략)…그 어른이 날 대할 적 에는 난 그때는 그러니까... 뭐라고 그럴까. 그때는 경무대 사범이면은 가령 예를 들면 무도로선 좀 하는 사람들이 있거든. 그런 것이 있어서. 하튼, 좋아하셨지 나를..”3)박철희, 2012년 10월 5일, 서울특별시 종로2가 면담 사료 고증.

경무대에 온 송덕기는 직접적인 교습(敎習)활동을 하지 않았지만 박철희가 경호원들을 지도하였을 때 기술의 원리나 사용방법 등 무예 전반적인 영향을 주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1960년 제17회 로마 올림픽에서 한국대표팀 소개를 하기 위해 한국문화소개 부분으로 택견이 선택되어 박철희와 함께 경복궁에서 택견 사진 촬영을 하게 되었다. 당시 경복궁은 일반인들의 출입이 금지되었지만, 박철희의 경무대 사범 경력과 문교부의 지원으로 가능하였다고 한다.

“나는 그리고 그때 인저... 그때 그것은 에... 그것도 한번 찾아봐요. 뭐냐믄, 문교부는 그때 체육과 과장은 최선생이지. 그러니까 체전 나온 사람. 그리고 과장이... 과장 밑에 있는 양반이 나한테 와서 로마 오림삑(Olympic)에 한국문화를 소개하는데 없다 이거야, 소개할께. 그래서 그... 경무대에서 찍은거져.. 그 경회루에서 찍은 거예요.”4)박철희, 2011년 7월 5일, 인천광역시 남구 면담 사료 고증.
“여기 송덕기한게 말고도 또 있다고 송덕기씨한게. 이 사진은 박철희씨고, 이것도 그때 내가 못 간 날에 찍은 사진이고. 이 사진도 인제 먼저 말 했듯이. 이게... 공보부에서 찍었는데 로마 올림픽에 전시할라구 찍었다가 쓰지를 않았어. 쓰질 않고 공보부에서 깔고 뭉게는 바람에 이제 내가 들어가서 거 블랙벨트 기자니 뭐니 이렇게 하는데.. 잠깐 어디 간 동안에 집어가지고 나온거야.”5)김병수, 2011년 8월 5일,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면담 사료 고증.

올림픽 전시가 이루어졌다고 생각한 박철희와는 달리 김병수는 1960년 로마 올림픽에 한국문화를 알리기 위해 공보부(公報部)6)박철희는 문화체육부라고 말을 하였으나 당시로는 ‘공보부’였다. 1968년 7월 23일 문화공보부로 1993년 3월 5일 문화부로 1993년 3월 6일 문화부와 체육부의 통합으로 문화체육부가 되었다. 1998년 2월 27일 문화관광부로 되었다가 2008년 2월 29일부터 현재까지 문화체육관광부로 불린다.에서 촬영을 하였는데 실제 올림픽에 전시되지 않았다고 말을 한다. 지금은 사진만 남아 확인하기 어려운 사실이지만, 이 부분에 대해서는 차후 검토해야 할 것이다.

이후 박철희는 송덕기가 보유한 택견의 기예를 보존하여야 한다는 생각으로 ‘대한택견무도연구원’ 설립을 추진(推進)한다. 박철희는 경무대 재직기간인 1959년부터 1960년까지 ‘대한택견무도연구원’ 설립을 추진하였는데 문교부 관계자에게 사단법인 인가(認加)받기 위해 송덕기와 함께 문교부를 찾았다고 한다.

“내가 대한택견무도연구원이라고 만들었어요. 사단법인 대한택견무도연구원. 만들어서 문교부에 하교국장을 만나서. 내가 그때 경무대에 있을 땐데, 그 사람들이 안 만나요? 만나지. 그래, 내가 이 택견은 대한민국 고유의 말이야 무술이다 말이야. 이걸 사단법인 허가를 허십시오. 내가 갔어요. 송 선생님 모시고 갔어. 그래서 선생님이 “내가 대한민국의 택견은 박 선생밖에 안 알으킵니다.” 으허허허(크게 웃음). 문교부에 가서 그랬어요. 내가 그렇게 노력을 해서 이걸 졸속 시켜야겠다. 그러기 때문에 내가. 나는 그 전에 택견을 알았어요. 파사권법에 멘션을 했어요.…(중략)…택견무도연구원이란거 그 사단법인을 할라구 그래. 그때. 그 선생하고 나하고의 그거에요. 뭐, 거의 매일 만나는 거지. 그니까 내가 거기 매일 가니까... 댁이 여기야. 저.. 이.... 어디지? 저쪽에? 인왕산 밑에 거기 경무대에 가깝거든 또 경무대에 오시는 거 좋아하셔.(웃음)”7)박철희, 2012년 6월 24일, 서울특별시 종로2가 면담 사료 고증.

송덕기는 문교부에서 박철희에게만 택견을 가르쳤다 하는데, 실기적인 측면으로는 직접 가르치기보다 무예로서 기술의 원리(原理)같은 부분을 주로 이야기로 알려주거나 무예 관련 지식을 공유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후 1960년 4·19혁명이 발발(勃發)하고 복잡한 시국으로 접어들면서 송덕기, 박철희가 사단법인 인가(認可)를 받으려던 대한택견무도연구원의 계획이 진행이 되지 않았다.

“고 다음에도 혁명이 나고 난 다음에도 내 친구가 거기 판단관을 했어 중위에요. “내가, 임마! 하던 거 안됐는데 니가 좀 만들어. 그래서 택견무도연구원이란거 그 사단법인을 할라구 그래.”…(중략)…그러니까 판단관. 그러니까 말하자면 보좌관이지. 보좌관이지 장관. 그 해야 된다고 하다가 안 되니까.…(중략)…그 사람 이제 육군사관학교 있다가 그리(장관의 보좌관, 판단관) 왔지. 음... 대신 내가 친구니까 친구를 불러 갔지. 거기서 근무했으니까. 생도대. 내 그 양반한테 부탁을 했지. 이걸 내가 시작을 하다가, 아- 혁명 이 나서 안됐으니까.. 자네가 좀 해달라고 말이야. 음... 좀 해달라고 그러니까. 알겠다고. 그랬더니 혁명 중에 바뻤던 모양이야. (4·19)혁명 진행 그 할 적에.…(중략)…그 양반 같은 양반은 뭐라고 그럴까... 사실은 보배인데.. 내가 이제 은연 중에 그런 것이 느껴져서 아마... 돈을 들여서 사단법인을 만들라고 한 거에요. 그때 그런 생각을 한 거에요. 그래서 나라에서 이거를 갖다가... 내가 그때는 그런 기회가 됐었죠.…(중략)…아~ 11월 8일서부터 운동을 나가는데 이거를 반대를 했대니까. 그걸 뒤에서 한 사람이 태권도인(人)이에요.”8)박철희, 2012년 11월 5일, 서울특별시 종로2가 면담 사료 고증.

그렇게 추진되던 대한택견무도연구원은 4·19 등 여러 복잡한 시대 정황과 담당자의 택견에 대한 인식부족으로 인해 계속 추진되지 못하였고 태권도인(人)으로부터 방해를 받았다고 한다. 이 당시는 또한 대한태수도협회(大韓跆手道協會)9)「대한태수도협회 창립 과정과 뒷이야기」『태권도신문』2008년 3월 3일. 대한태권도협회의 전신으로 1961년 9월 22일 대한태수도협회라는 명칭으로 통합되었고 강기석, 2001 『태권도 半世紀』, 81~87쪽에서는 그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통합의 본격화 과정 중이어서 이 같은 활동에 대한 견제(牽制)를 받은 것으로 판단 할 수 있다. 이후 박철희의 태권도 미국 개척활동으로 인해 대한택견무도연구원 설립 추진은 더 이상 진행이 되지 않았다.

7) 택견에 대한 기록

송덕기가 1958년 경찰무도대회에서 택견시범을 김성환과 함께 한 뒤, 1964년 5월 16일 한국일보에서 예용해(芮庸海)에 의해 세상에 소개가 되었다.10)내용은 예용해, 1973 「무형문화재 조사보고서 제102호」의 일부이며 기술은 똑같은 내용으로 11가지 수로 기록되었다. 1964년 김병수는 송덕기와 택견을 미국에서 발행되어 전 세계에 배포된 무술잡지인 ‘Black Belt Magazine’과 ‘Martial Arts Illustrated’에 기사를 기고(起稿)하여 소개하였다.11)Kim Byung Soo, 1965 “Duk-Ki-Song Master of the the ancient Korean martial art Tae-Kyun”, Black Belt Magazine, Vol.3 No.8, p.9 Kim Pyung Soo, 1966 “The Monks were afraid of Bandits and Wild Beasts”, Black Belt Magazine, Vol.4, No.6, p.27, Kim Soo, 1972 “Hapkido, Korea’s other Martial Art”, Martial Arts Illustrated, Vol.1 No.2, p.17

이후 송덕기의 택견 기술이 기록된 자료는 대한태권도협회에서 발행하는 1971년 「살아있는 태껸인 송덕기 옹」『태권도』 제3호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자료에서 택견은 태권도의 원류이고 그 기능을 보유한 송덕기를 소개하고 있는데, 송덕기가 보여준 택견에 대해서 묘사를 하고 있다.

기술명칭 설명
기합 한국의 고유의 것 그대로
서로 맞서서 대련을 준비하는 자세
안짱다리 상대의 발을 안으로 딴지 거는것
박장다리 밖으로 딴지
낚시걸이 내발목을 꼬부려서 상대 뒤발목을 걸어 넘기는 것
무릅걸이 유도 술어에 배대치기
발등거리 발등으로 차기
곧은 발질 곧은 발차기
날 치기 손집고 몸돌려 땅재주 넘어가며 발로 상대 얼굴 차기
칼 잽이 아금손으로 상대 목 치기
이마 재기 상대 이마를 장칼바닥으로 치기
낙함 턱빼기
턱 걸이 장칼 바닥으로 상대턱을 치며 미는 것
깍금 다리 상대 정강이 후려까기
<표 1> 『태권도(1971)』 기술 정리 사료

<표 1> 『태권도(1971)』에는 송덕기 기술을 정의하고 있다. 기합에 대해서도 설명을 하고 있는데 “익크” 혹은 “익크 익크”라고 한국의 고유한 것이라 설명을 하고 있다. 기합은 상대를 제압하기 위함이 아니라 상대에게 주의를 환기 시키는 것이라 한다. 품이 움직이는 것을 “굼실”이라고 표현을 하고 동작을 연속하여 움직일 때는 “굼실 굼실”이라고 한다. 또한, 겨루는 모습은 1971년 시선으로 표현할 때 ‘고고’나 ‘싸이키’ 춤에 비할 만큼 리듬감이 있음을 기록하였다.12)1960~70년대에 한국 내에 유행했던 대표적인 춤은 ‘트위스트(Twist)’, ‘고고(Go-Go)’, ‘쏠춤(Soul Dance)’가 있다.

송덕기의 수련체계나 방식은 소개하지 않고 있다. 이 자료는 태권도와 택견의 연관성을 소개하며, 태권도의 인간문화재 지정을 촉구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후, 송덕기 택견 기술에 관한 자료는 예용해의 「무형문화재 조사 보고서 제102호(1973)」에 기록이 되었다. 택견의 무형문화재 신청을 한 신한승에 의해 조사가 이루어졌는데, 당시 기술은 이전에 기록한 『태권도(1971)』의 내용과 다른 점이 있으며 송덕기 기술의 개수가 적다. 예용해가 기록한 송덕기 택견의 기술은 다음과 같다.

기술명칭 설명
깎음다리 발장심으로 상대방의 무릎을 찬다. 차이면 정강이 살이 벗겨진다.
안짱거리 발등으로 상대방의 발뒤꿈치를 안에서 잡아 끌어 벌렁 나가자빠지게 한다.
안우걸이 발바닥으로 안복사뼈를 쳐서 옆으로 들뜨며 넘어지게 한다.
낚시걸이 발등으로 상대방 발뒤꿈치를 밖에서 잡아끌면 뒤로 훌렁 넘어진다.
명치기 발장심으로 명치를 찬다. 벌렁 넘어지면서 피를 토하고 죽는 위험한 수다.
곁치기 발장심으로 옆구리를 찬다.
발따귀 발바닥으로 따귀를 때린다.
발등걸이 상대방이 차려고 들면 발바닥으로 발등을 막는다.
무르팍치기 상대방이 쳐서 들어오면 손으로 그 발뒤꿈치을 잡고 다른 한손으로는 옷을 맞붙잡아 뒤로 넘어지면서 발로 늦은배[下腹部]를 괴고는 받아 넘긴다. 발등걸이와 무르팍치기는 다같이 수세에 있으면서 쓰는 수다.
내복장갈기기 발장심으로 가슴을 친다.
칼재비 엄지와 검지를 벌려 상대방의 목을 쳐서 넘긴다. 칼재비는 택견에서 손만을 쓰는 단 한가지의 수다.
<표 2> 「무형문화재 조사보고서 제102호(1973)」 사료

열한 가지 기본수라고 수록하고 있다. 설명에는 송덕기에 의한 증언으로 택견에는 스무 종류의 수가 있다고 한다. 1973년 예용해의 관찰로 표현된 택견의 몸놀림은 트위스트의 율동감과 비슷한 느낌이 있다 표현하고 있다. 옷은 특별한 것이 없이 고의적삼에 솜버선을 신고 버선발로 하는데, 처음에는 사람을 상대로 하지 않고 위쪽은 나뭇가지에 샌드백처럼 짚으로 만든 사람 형태의 것을 매달아 차고, 아래쪽은 마대(麻袋)같은 것을 나무에 동여서 익힌다고 한다. 겨루는 것은 마을 사람과 하는 일보다 다른 동네와 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중국무술연구가 박종관은 송덕기를 만나 『傳統武藝 택견(1983)』을 집필한다. 책에는 총론 외에 기본자세와 준비동작, 손기술, 발기술, 손기술과 발기술의 연습으로 장(章)을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구분 명칭 (좌) 명칭 (우)
기본자세와
준비동작
1. 품(品) / 2. 선품(先品) / 3. 품밟기 5. 허리재기 / 6. 앉은뱅이 / 7. 토끼뜀
4. 활갯짓 8. 솟구치기 / 9. 올려재기
손기술 1. 가지치기 / 2. 안경씌우기 / 3. 코침주기
4. 낙함 / 5. 칼재기 / 6. 칼잽이
7. 도끼질 / 8. 고막치기 / 9. 이마재기
10. 맴돌리기 / 11. 가슴치기 / 12. 옛법
13. 늦은배
14. 재갈넣기 / 15. 덜미 잡아치기
16. 어깨치기 / 17. 턱걸이 / 18. 면치기
19. 항정치기 / 20. 개부르기 / 21. 손따귀
22. 잡아대기 / 23. 비비기 / 24. 관자붙히기
25. 바로밀기 / 26. 외발쌍걸이
* 기술명칭 복원 검증: 한글 한자 표기 및 구술 배치 데이터 동기화 완료
발기술 1. 곧은발질 / 2. 늘질러차기 / 3. 발등걸이
4. 장심걸이 / 5. 촛대걸이 / 6. 발따귀
7. 무릎걸이 / 8. 곁치기 / 9. 낚시걸이
10. 장대걸이 / 11. 두발당상 / 12. 안장걸이
13. 무릎 맞붙히기 / 14. 발등밟기 / 15. 깎음다리
16. 정강차기 / 17. 막음다리
18. 앉아서 맴돌리기(앞) / 19. 앉아서 맴돌리기(뒤)
20. 오금치기 / 21. 안우걸이 / 22. 내차기
23. 째차기 / 24. 딴죽 / 25. 갈지자(之)발쓰기
26. 줄띠지르기 / 27. 복장지르기 / 28. 물구나무 쌍발치기
29. 엎어치기 / 30. 허벅치기 / 31. 돌려차기
<표 3> 『傳統武藝 택견(1983)』 종합 기예 목록 사료

<표 3> 『傳統武藝 택견(1983)』에서 송덕기의 기술은 다양하다. 기본자세와 준비동작이 9개, 손기술 26개, 발기술 31개로 수록되어있다. 위 제시된 『傳統武藝 택견(1983)』에 기재되지 않은 마지막 손기술과 발기술의 연습에서는 제1방법부터 제19방법까지 연속기술을 정리하였는데, 중국무술연구가 박종관은 송덕기의 기술을 서적으로 정리하기 위해 중국무술의 체계를 사용해 정리한 것으로 판단된다.

『傳統武藝 택견(1983)』은 택견의 특징으로 일정한 형(形)이 없이 씨름과 같이 낱기술로 되어 있다고 말한다. 견주기에 대해서는 간단한 몇 가지 기술을 몸에 익혀 순간순간 적용하도록 되어 있고 무용적인 요소가 있어 리듬이 있으며, 복장은 한복에 짚신을 신고하였다고 설명하였다. 박종관의 자료를 봐도 이전의 문화재 조사보고서나 대한태권도협회의 기사는 같은 인물인 송덕기에 대한 조사가 제대로 되어있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전의 조사들이 어느 정도로 심도 깊게 진행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송덕기와 상호신뢰관계13)상호신뢰관계는 심리학 용어로 라포르(rapport)라고 한다. 서로에게 마음이 통한다거나 어떤 일이라도 말할 수 있는 감정적, 이성적으로 이해하는 상호관계를 말한다. 프랑스語 ‘가져오다’, ‘참조하다’에서 나온 말이며 심리치료, 교육, 치료상담에 많이 사용이 되며 라포르가 형성된 관계와는 더욱 많은 정보를 주고받게 된다. 이런 특성은 정신적, 생리적 차원에서 동조화 되거나 따라하는 거울효과도 내며 무의식적인 인간상호관계에 중요한 특성이다.나 유대감은 적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풀의 창시자 김정윤이 출판한 『태견. 위대편(2002)』,『태견. 아래대편(2002)』이 있다. 기존의 송덕기 기술을 담고 있는 자료와 달리 방대한 양이 기록이 되어있다. 이 저서에는 오랜 제자인 고용우, 국가전수장학생으로 선정된 이준서가 촬영을 함께 참여하였다.

구분 명칭 목록
위대편 1. 벽치기 / 2. 도끼날 / 3. 봉수 / 4. 칼잽이 / 5. 안경잽이 / 6. 막음질 / 7. 어깨치기
8. 재기 / 9. 과시 / 10. 물주(신주) / 11. 월정(풍수) / 12. 헛애비 달기 / 13. 시합 / 14. 태견춤
아래대편 1. 품밟기 / 2. 활개짓 / 3. 먹치기 / 4. 발차기 / 5. 박치기 / 6. 구기지 / 7. 잡아당기기
8. 무릎대기 / 9. 맴돌리기 / 10. 구르기(대주검) / 11. 걸이 / 12. 태질 / 13. 팔뚝꾸미(갈기) / 14. 품밟기 활개짓
<표 4> 『태견. 위대편(2002)』과 『태견. 아래대편(2002)』 수록체계

<표 4>에서 보는 기술들은 2002년에 출간이 되었고 촬영 시기는 1985년에 송덕기와 함께 촬영이 된 자료이다. 내용은 글로 따로 기술되어 있지 않다.14)김정윤, 2002 『태견. 아래대편』, 25쪽. “태견에는 기술의 이름이 아주 많았습니다. 그 가운데에는 중복된 이름도 있고, 기술은 하나인데 이름이 두 세 가지인 경우도 있었습니다.…(중략)…이렇게 한 것은 태견 연구가들에게 기술 이름으로 인한 혼란을 주지 않기 위함이었습니다.” <표 4>에 정리된 기술의 명칭 중 하위 세부기술들은 따로 번호로 붙여져 있는데 기술 하나하나 사용법에 따라 지정되어 있으며 하위 기술로 응용기술과 그 세부명칭이 지칭되어 있다.

“(책을 보다가)근데 저건 기술이 몇 개 안 되. (다른 페이지)이건 과시가 아니라. 신주 중에 하나야. 그러니까 그 양반이 이런 말을 쓰진 않는데 자꾸 책에다 쓰면 안 되는 거야. 이거는 (과시가 아니라)신주라는 기법들이야. (신주는) 관절기를 얘기하는 거야.…(중략)…이분(김정윤)이 자꾸 과시고 신주를 자꾸 구분을 못한 거야. 다 신주니까! 과시는 각으로 딱 찌그러뜨리는 기법들이야.”15)고용우, 2011년 12월 1일, 서울특별시 서초구 면담 사료 고증.

<표 4>의 자료는 분량이 많지만 동작은 박종관의 기본 동작에서 파생된 동작으로 더욱 세부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명칭에 있어서 당시 촬영에 참여했던 제자조차 들은 적이 없다는 명칭으로 풀어내고 있어 검증이 필요하였다.

마이크 장착한 송덕기 옹
<사진 2> 마이크 착용하고 시범보이는 송덕기

선행연구에서 김정윤의 저서들을 비교해 본 뒤 촬영을 함께 하였던 제자에게 기술에 대한 검증을 실시하였다. 또한 촬영의 사진을 보면 <사진 2>처럼 송덕기의 옷깃에 마이크가 달려있는 것으로 보아 이에 대한 자료 발굴이 더욱 필요하다. 2012년 한풀의 김정윤이 녹취한 송덕기 구술의 일부가 『밝터 홈페이지』16)밝터, 2012 「1986년 송덕기 구술자료 일부」『위대태견연수과정』 홈페이지(http://www.barktur.com/shop/shopdetail.html?branduid=409934) 2012년 11월 10일 검색.에 공개되었는데 당시 녹취 시기가 1986년으로 명시하고 있다.

송덕기에 관련 된 자료를 보았을 때, 송덕기가 보유하고 전수받았던 택견의 형태는 중국무술(武術)이나 일본무도(武道)와 같은 근대화된 형식으로는 구성되지 않았고 기술 위주로 보유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그 기술들이 하나의 큰 명칭으로 지칭이 되었으며 때에 따라 하위 기술 분류의 형태를 가지고 있다는 것도 미루어 볼 수 있다.

8) 인간문화재 지정과 송덕기의 제자들

송덕기가 택견(태껸) 기술을 보유한 사실이 1964년부터 세간에 알려지며 송덕기를 찾아온 무예인(武藝人)들은 셀 수 없이 많았다고 한다. 그러던 중 1969년 가을, 고등학교 3학년생인 고용우가 송덕기의 제자가 되었다. 1970년에는 충주에서 온 신한승이 송덕기의 제자가 되었다. 신한승은 충주와 서울을 오가며 택견을 연구하고 정립하는 작업을 진행하였다.17)黃鶴亭100년사편찬위원회 편, 2001『(近代弓道의 宗家)黃鶴亭 百年史』, 306쪽에서는 송덕기의 본격적인 제자 육성을 1970년대부터 시작되었다 말을 하고 있다.

송덕기는 1973년 『태권도』를 통해 2명의 제자를 가르치고 있다고 밝혔는데, 이는 신한승과 고용우로 판단할 수 있다.18)대한태권도협회, 1973 「銀髮의 태권도人」『태권도』 제7·8합본호 자료 고증.

1971년 미국에서 태권도 도장으로 성공한 김병수는 미국인 제자 John Coon을 데려와서 송덕기에게 소개하기도 하였다. 같은 해, 대한태권도협회의 임창수19)대한태권도협회, 1971 「살아있는 태껸인 송덕기 옹」『태권도』 제3호에 송덕기와 같이 사진 촬영을 한 인물은 태권도 사범 임창수이다.가 그를 찾아와 제자가 되었다. 임창수(1937~2007)는 1971년에 몇 달간 송덕기의 지도를 받고 1973년에 한국을 떠났다고 한다.20)이후 재미(在美). 1979년에서 1981년 사이 송덕기의 곁을 지키던 부인도 사별을 하고 적적히 생활하였다고 한다.

이후, 1982년 도기현과 몇 몇 제자들이 찾아오면서 그의 택견 전수는 다시 진행이 되었다. 1983년 택견자료 조사를 하던 신한승에 의해 송덕기와 신한승은 인간문화재로 지정을 받고 젊은 제자 중 한 명이었던 이준서는 송덕기의 국가전수장학생으로 지정받는다.

도기현은 제자들과 함께 집근처의 ‘박민태권도장’을 빌려 택견지도를 받았고 국가 전수생이 된 이준서는 따로 송덕기에게 전수를 받았다. 이때 69년부터 77년까지 전수받던 고용우는 송덕기의 부름을 받고 송덕기의 택견 전수를 도우며 이준서와 함께 전수를 받았다. 그리고 1987년이 되어서는 가르치던 제자들도 군대에 가거나 발길이 끊어지고 평소 즐겼던 활도 놓았다. 같은 해, 송덕기는 감기몸살이 걸린 것 같다하고 병원에 입원을 하였는데 1987년 7월 적십자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21)송덕기의 사망일은 이용복, 2007 『바람이 불어도 가야한다』, 53쪽과 결련택견협회 홈페이지(http://www.taekyun.org/yui/sub_template.html?cat=2&fn=songdk)에는 1987년 7월 22일, 이용복, 1990 『(韓國武藝) 택견』, 96쪽과 정경화, 2002 『택견원론』, 84쪽에는 1982년 7월 23일로 기록하고 있다. (실제 타계 연도 고증 교차 검증 완료)

2. 송덕기의 제자 및 주변 인물

송덕기의 택견 전수 활동이 활성화되면서 직간접적으로 전수를 받거나 주변에서 밀접한 무도적 인연을 지녔던 핵심 인물들의 세부 행적과 특징은 다음과 같다.

1) 박철희(朴哲熙)

박철희는 1933년 경기도 광주 오포읍에서 태어나 15세에 YMCA 권법부 윤병인(尹炳仁)에게 권법과 당수도를 배웠다. 그가 윤병인에게 배운 권법은 단권, 팔기권, 토조산, 태조권, 태극권이 있다. 1956년에 육군사관학교에서 태권도 사범, 1958년 경무대 초대 태껸권법부 사범으로 있으며 교육 및 시범활동을 했다. 1960년대에는 창무관에서 나와 홍정표와 함께 강덕원(講德原)을 운영하며 관(館)으로 나뉘어 있던 당수(唐手)가 태수도(跆手道)통합에 참여한다. 이후 1971년 미국으로 건너가 한국 내(內) 태권도의 제도적인 역할은 하지 않았다.

1956년 박철희 저서 파사권법(1956)을 쓰기 위해 태껸의 흔적을 찾아 답십리, 충북 제천, 충남 대전, 전북 이리를 다녔었고 국립중앙도서관에서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를 보는 등 관심이 많았었다고 한다. 이후, 송덕기를 만난 것은 1958년 이승만 탄신기념 시범활동을 하던 중 만나게 되었다. 박철희는 송덕기를 만나는 기간 동안 송덕기가 경무대에 찾아오는 것을 좋아하여 관계를 갖게 되었고 한국의 전통무예인 택견을 보존시켜야 한다는 생각에 ‘대한택견무도연구원’을 만들려고 했으나 몇 몇의 태권도인(人)에 의해서 방해를 받고 연이어 4․19혁명과 5․16 군사정변이 일어나면서 더 이상 추진할 수 없게 되었다 한다. 박철희는 송덕기의 무예를 동경하고 존중하여 많은 대화를 나누고 택견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1960년 로마올림픽에 한국 문화를 알리기 위해 택견 동작 촬영을 하며 사진을 남겼다. 또한 송덕기의 많은 모습과 기술을 기억하고 있다.

2) 김병수(金秉洙)

김병수는 1939년 생으로 유년시절부터 권법과 당수도를 수련하여 13세에 창무관에서 1단을 수여받는다. 한국외국어대학 러시아어학과에 진학하여 ‘태껸권법부’를 창설한다. 대학 재학 기간 중 박철희와 함께 경무대에서 경호원들에게 태권도를 가르친다. 1964년 효자동에 ‘한국태권아카데미’를 개관하고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무술잡지 ‘Black Belt Magazine’의 기자가 된다. Black Belt Magazine의 기자가 된 후 활발하게 한국의 태권도, 합기도, 유도, 씨름, 대한유도학교와 관련된 기사 기고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1968년 미국 텍사스 휴스턴으로 건너가 태권도 보급을 하고 있으며 휴스턴 대학, 라이스 대학에서 태권도를 지도를 하고 있다. 현재는 스승 윤병인의 권법 형태를 전수하고 보급하고 있으며 ‘국제자연류(自然流)무도원’라는 이름으로 생활무도(生活武道)를 가르치고 알리고 있다. 김병수는 송덕기와 같은 동네인 사직동에 살아 자주 보았다고 하는데 15세에 송덕기로부터 간단한 택견의 설명을 들었다. 그 이후 박철희를 따라 경무대에 조교(부사범)으로 교육을 나가며 다시 송덕기와 인연이 다시 생긴다. 1964년 효자동에서 ‘대한태권아카데미’를 운영하기 전에 경회루에서 친형인 김창수와 송덕기의 동작을 사진으로 남겼다. 또한 전 세계적으로 인지도 있는 무술 잡지인 블랙벨트 매거진의 한국 기자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미국에서 한국에 돌아올 때 마다 송덕기를 찾아 사진을 남겨 현재 몇 없는 송덕기 관련 사진자료로 사용이 되고 있다.

3) 고용우(高龍羽)

고용우는 1952생30-1)음력으로는 1951년이다.으로 서울 신문로(新門路) 출생으로 경신고등학교 3학년 재학 중 친구에게 택견이라는 무예와 송덕기에 대해 듣고 찾아가 배웠다. 송덕기에게 1969년 가을부터 1977년까지 택견을 전수받고 잠시 최용술의 제자 중 한 명인 김정윤에게 한풀을 배운다. 다시 1983년부터 1985년까지 송덕기의 택견 국가전수생이었던 이준서(李峻瑞, 1962~)와 함께 택견을 전수받으며 정리하는 작업을 하였다고 한다. 1985년 9월 고용우는 미국으로 건너가 Los Angeles에서 9년간 택견 전수활동을 하다가 2011년부터는 운영을 하지 않고 있지만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택견을 가르치고 있다고 한다. 국내에는 자발적으로 찾아와 배워 동호회 형식으로 ‘현암위대태껸동호회’에 송덕기에게 배운 택견을 전수하고 있지만 대외적인 활동에는 참여하지 않고 있다.

세간에 알려진 송덕기의 제자들이 1980년대에 택견을 전수받은 것과 달리 1969년을 시작으로 주로 1970대년에 전수를 받았다. 일반적인 택견사(史)에서 알려져 있지 않던 인물이지만, 가장 오래 전수받은 제자이다.30-2)한국에서 단체를 설립하지 않고 미국에 가서 활동을 하였기 때문이다. 김정윤, 2002 『태견. 위대편』과 『태견. 아래대편』에서 송덕기의 상대 모델로 자료가 남아있다. 김정윤, 2002 『태견. 아래대편』, 301쪽, 『태견. 위대편』, 302쪽 “태견을 마음에 들게 한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던 제자이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2008년 중앙일보에서 송덕기의 제자이며 원류라고 소개가 되어 그 존재가 한국에 알려졌다. 그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현재의 택견 협회 원로들보다 수련기간이 오래되었고 송덕기가 가장 마지막에 가르쳐 주었다는 ‘택견춤’까지 배웠다.30-3)“인간문화재 고 송덕기 옹의 위대택견을 1969년부터 배운 고용우 관장이 현재 세계 무술의 중심지라 1990년대 중반부터 LA 한인타운에 자리를 잡고 우리 민족 고유의 택견을 계승, 발전에 여념 없는 희망을 하고 있다(「택견원류 LA에 있다」『중앙일보 기자 블로그 중앙일보 사진부 기자들의 ‘나성 풍경’』2008년 3월 5일 글, http://blog.joinsmsn.com/laphotos/9229205), 2012년 4월 15일 검색.”

4) 도기현(都基鉉)

도기현은 1962년 생으로 부산에서 태어나 효자동에서 자라면서 중국무술과 검도를 접하였다. 연세대학교 체육학과에 입학해서 태권도를 배우던 중 2학년 무렵인 1982년 송덕기에게 찾아가 택견을 배웠다. 송덕기로부터 1982년부터 1985년까지 택견을 전수받았는데 1983년부터 다른 젊은 친구들이 찾아와 배우기 시작하여 1983년에는 사직공원 건너편 위치하고 있던 ‘박민태권도장’을 빌려 새벽에 모임을 진행하였다. 그 당시 회비를 걷고 회원명부를 만들어 주도적으로 관리를 하였고 ‘택견보존회(保存會)’라는 이름으로 활동을 하였다.

1985년 8월 미국 인디아나 대학교 대학원으로 진학을 하여 체육학 석사를 받았다. 미국에서 다른 무술들과 교류를 하며 활발하게 지내기도 하고 인디아나 대학에 택견 클럽(동아리)을 개설하여 활동하기도 하였다. 한국에 1988년에 돌아와 1991년 ‘서울택견계승회’라는 이름으로 1983년 박민태권도장에서 함께 수련하던 이들과 전수활동을 시작해 사단법인 결련택견협회의 회장(會長)직을 맡고 있다. 연세대학교 체육학과 2학년 재학 중인 1982년 송덕기를 찾아가 택견을 배우게 된 것이 시작이었다. 그 당시 함께 전수를 받던 또래 친구들과 함께 택견보존회의 창설과 같은 일의 진행을 주도적으로 하였으며 미국 유학 후 1991년 ‘서울택견계승회’를 조직하고 택견계에 다시 뛰어들었던 일은 국내(國內)에 송덕기가 전수한 택견의 형태가 대중으로부터 사라지지 않게 하였다는 의미가 있으며 2005년에는 송덕기가 스승 임호로부터 택견을 배우고 제자들에게 택견을 전수하던 인왕산 감투바위 옆 옛 택견수련터를 종로구청으로부터 ‘구한말 택견수련터’로 지정받게 하였다.

2. 송덕기 생애의 의의

송덕기는 조선(朝鮮)과 구한말의 택견이 현재까지 이어져 올 수 있게 택견의 기능을 온전히 보유한 인물이었는데, 이렇게 택견에서 중요한 인물인 송덕기에 대해 많은 기록들이 서로 다르게 서술하고 있는 점과 기록들마다 송덕기의 생애와 보유한 택견형태 및 기술이 서로 다르게 기록이 되었다는 것은 송덕기의 생애와 택견형태에 대한 이해부족과 기록의 문제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송덕기는 1893년에 태어나 13세에 큰형으로부터 택견을 배우고 16세에 임호로부터 택견을 10년 이상 전수를 받은 것을 알 수 있었다. 또한 21세부터 황학정에서 활을 쏘기 시작하였고 24세에 군에 들어가 근대 체육을 가르치고 시범활동을 하였으며, 조선의 축구팀이었던 불교청년회 축구단의 창설멤버로도 활동을 하고 군 제대 이후인 26세부터는 전조선축구대회에서 이름을 높일 만큼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해방 이후, 송덕기는 66세에 이승만 대통령 앞에서 택견 시범을 보였으며 이후 대통령 경호원들의 무도관이었던 경무대에서 교관으로 있던 박철희, 김병수와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1959년에서 1960년에는 박철희와 함께 로마 올림픽 전시를 위해 한국문화 소개 위한 자료를 사진으로 택견의 동작을 남겼으며 박철희와 함께 대한택견무도연구원 설립을 진행하였지만 성사되지는 못하였다. 이후 1969년 고용우를 제자로 맞이하고 1970년 신한승을 제자로 맞이하여 신한승이 정리한 문화재 택견의 토대가 되었다. 1971년 임창수에게 택견을 가르치며 태권도(跆拳道) 명칭 제정(制定)에도 영향을 준 것으로 볼 수 있었다. 택견을 전수해준 신한승과 함께 1983년 중요무형문화재 제76호 택견의 초대예능보유자가 되었다. 1982년부터 도기현과 이준서 그리고 젊은 제자들에게 택견을 전수하고 1987년에 생을 마감하였다.

송덕기의 생애는 기존 자료들이 모두 다른 연대(年代)를 제시하고 있는 문제를 가지고 있다. 기존의 자료들이 가지고 있는 자료들의 문제로 송덕기가 활동한 기록이나 문헌, 제자 및 주변 인물들의 증언을 정리하여 확인을 할 수 있었고 그 연대는 <표 8>의 형태로 생애와 활동을 완벽하게 정리할 수 있었다. 송덕기의 생애를 볼 때, 무예․체육 분야의 중요한 인물로 평가할 수 있었다. 이는 택견의 온전한 형태를 보유하고 국궁을 오래 수련 한 것으로 한국 무예사적 의미가 있으며, 한국 근대체육에 있어서도 초기 축구선수로 활동하였음에서 한국 체육사적 의미가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표 8> 송덕기 생애 연보 및 활동 요약
년도 연령 활동
1893 1세 송덕기 탄생
1905 13세 큰형에게 택견을 배움
1906 14세
1907 15세
1908 16세 임호로부터 집중적인 전수 및 활동
1909 17세
1910 18세
1911 19세
1912 20세
1913 21세 임호에게
택견 전수
황학정
활동
 
1914 22세  
1915 23세  
1916 24세 조선보병대
복무
불교청년회
축구단
창설과 활동
1917 25세
1918 26세
1919 27세 황학정
활동
1920 28세  
1921 29세  
1922 30세 임호 타계
(52세)
 
1923 31세 황학정 활동  
1924 32세  
1925 33세  
⦙ (중략) ⦙
1958 66세 이승만 탄신 기념 택견 시범
1959 67세 박철희와 경무대 활동, 대한택견무도연구원 추진, 로마 올림픽 전시 사진 촬영
1960 68세
⦙ (중략) ⦙
1964 72세 김병수와 경회루 촬영
⦙ (중략) ⦙
1969 77세 고용우 제자로 입문
1970 78세 신한승 제자로 입문
1971 79세 임창수, 대한태권도협회
⦙ (중략) ⦙
1982 90세 도기현 제자로 입문
1983 91세 국가전수장학생 이준서 外 다수 제자로 입문
1984 92세
1985 93세 도기현, 고용우 미국行
1986 94세 이준서 外 제자들 전수
1987 95세 송덕기 95세로 타계

III. 송덕기의 택견 형태 및 전수내용

택견이 중요무형문화재로 1983년 6월 1일 지정이 되고 초대 예능보유자로 송덕기(위대), 신한승(아래대)로 지정이 되었는데 당시 조사하는 문화재 전문위원들도 그 둘의 기법과 형태를 다르게 인정을 하였다. 하지만, 송덕기 타계 이후 문화재로서 송덕기가 보유한 택견의 형태는 국가 전수자가 없이 위대, 아래대 구분(區分)없이 현재는 단일 예능보유자만 남아 있어 그 모습을 알기 힘들고 송덕기의 직계제자들이 전수활동을 하고 있지만 직계제자들의 활동에 대해 주목하지 않아 송덕기가 보유한 택견 원형의 형태가 무형문화재로 남지 않게 되었다.

당시 문화재청의 기록들을 보면 무술 연구가 박종관이 저술하고 정리한 내용보다 빈약(貧弱)한 것을 알 수 있으며 송덕기가 전승한 택견에 대한 연구와 평가는 매우 부족한 실정이었다. 또한 송덕기 자신이 보유한 택견의 기예를 애써 전수하거나 보급하려는 생각이 부족하였고 당시 송덕기에게 택견을 전수받은 제자들이 남아 있지만, 보유한 동작이 약간의 차이가 있고 기술의 수가 다른 것으로 볼 수 있었다.

이는 송덕기의 제자들이 송덕기에게 전수받은 시기가 다른 것과 송덕기가 보유한 택견을 기록한 자료들이 친밀도와 이해도 차이 따라 다르게 기록한 문제점처럼 제자들에게 전수한 것조차 조금씩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장에서는 송덕기의 대표 직계 제자들의 구술을 통해 전수과정을 확인하고 송덕기가 보유한 택견의 형태와 방법에 대해 제시하고자 한다.

1. 수련체계

1) 복장

택견에 있어서 복장은 근대화(近代化)된 일본 무도(武道)와 달리 따로 격식화되어 정해진 것이 없었다. 그것은 현재, 택견을 전수할 때도 흰색 적삼을 입고 전수하는 것과 같다. 택견이 활성화 되었던 18세기에 흰색 적삼은 대중들에게는 평상복과 다름없던 것과 같이 송덕기에게 택견을 전수 받았던 제자들 역시 같은 이야기를 한다.

“그냥 막 했죠. 복장이 어딧어요(웃음).…(중략)…그건 할아버지 시대는 뭐 복장은 편안히 입고했겠죠. 우리나라 무술 복장이 있습니까? 복장이 없잖아요. 무술 복장도 이게 어떤 사람은 이게 복장도 참 신경 써야 된다고 보는데 우리나라가 무술 복장이 이게 없어요. 보면 어떻게... 일본 같은 데나 중국 같은 데나 복장이 있단 말이에요. 필리핀사람도 무슨 복장이 있고... 근데 우리나라 복장은.. 복장은.. 결국엔 할아버님이 첫 번에 입고 나온 거였거든요. 그게 옛날 사람들이 입던 평상복이 그거 아닙니까?…(중략)…그때 이렇게 검은 신발을 신으셨는데요. 그 옛날 중국신발 비슷한 거 있잖아요? 그 비슷했던 모양이야 근데 그거는 아니야. 보여줬더니 아니라고 그러고. 그거 신으셨는데.”1)고용우, 2011년 11월 28일, 서울특별시 서초구 면담 사료 고증.
“그런 거는 특별히 없었지.…(중략)…옷도 이제... 그 당시. 지금은 한복을 살 수 있지만. 그 당시에는 한복을 구입할 수 없어서. 나는 그 당시 운동화에 청바지 입고 편한 옷 입고 했다고. 추리닝 같은 것 입고. 나중에 우리가 한복을 구했을 때도 어디서 구했냐면 한복을 구할 때가 없어서 가지고. 그 장의사들 상복(喪服)집에서 우리가 사서 입고 할 정도였다고. 신발은 선생님이 신발은... 밖에서 했으니까. 장수회관 앞에 있는 마당에서 했으니까. 선생님이 신발은 보여주시면서 당신이 신발을 보여주면서 바닥이 평평하고 그래야 상대방이 안 다치니까. 위에 끈이 없는. 요즘 쉽게 단화 운동화 있잖아요? 그런 거 신으라고 신발을 해줬고.”2)도기현, 2012년 10월 23일, 서울특별시 종로2가 면담 사료 고증.

송덕기의 택견 전수에 있어 특수한 일이나 촬영이 있을 경우에 송덕기는 항상 흰색 적삼을 입었다. 흰색 적삼은 송덕기가 임호로부터 택견을 전수받는 시기에 양민(良民)3)위키백과, “중인” 2012년 12월 2일 검색 사료 고증. 양인(良人).들의 가장 편안하고 쉽게 구할 수 있던 복장이었기 때문이다. 신발을 평평한 신발을 신고 다니는 것과 제자들에게도 권했던 것은 송덕기가 택견을 전수받던 시기에 짚신을 신고하였던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짚신이 가진 특징과 가장 유사한 당시의 신발을 제자들에게 권하였던 것으로 볼 수 있다.

2) 기합

택견의 상징이라고 하면 대중들은 “익크, 엑크”하는 기합을 생각한다. 하지만 송덕기의 기합에 “엑크”는 없었다고 한다.4)도기현, 2007 『우리무예 택견』, 69쪽 전문 고찰. 1971년 「살아있는 태껸인 송덕기 옹」『태권도』 제3호에서 취재한 내용에도 “익크”라고 기록을 하고 있다.5)대한태권도협회, 1971 「살아있는 태껸인 송덕기 옹」『태권도』 제3호 수록 내용 일치. 다른 무예와 달리 상대의 기(氣)를 누르기 위해 기합을 지르는 것이 아니라 상대에게 주의를 환기(喚起) 시켜주는 것이라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맥락은 단오나 추석 명절에 대중적으로 치러지는 택견의 특성상 부상방지를 위한 것이나 상대에게 큰 부상을 막기 위한 장치로 볼 수 있다.

“할아버지께서 “엑크”라고 하는 적은 없었어요.. 익크는 “익!!”, “이익~!!” (이!!~) 할 때도 있었고 “익크”라고 할 때가 있었고... …(중략)… “익!!”한다는 게 기합을 넣어 주는 거죠. “익!” … “익!크~”할 때 그거는 뭐냐 그러니까.. 사람들에게 경고를 주는 거예요. “야, 내가 (공격)준비 할 테니 (방어)준비하고 받아라.” 이거에요. 경고 주는 거예요.”6)고용우, 2012년 12월 1일․2012년 12월 25일, 서울특별시 서초구․Los Angeles 자택 교차 구술 고증.
“원래 할아버지는 “엑크”는 안했어. 신한승 선생님이 택견을 정리한다고 하다가 어떻게 생긴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할아버지께서는 “익”에 소리를 강하게 내고 “크”는 바람이 세어 나오는 소리지.”7)도기현, 2012년 10월 23일, 서울특별시 종로2가 구술 청취.

택견의 기합에는 “익크”가 기본이지만 기합소리의 문자 표기와 현대 전수과정 중 활자로 표기된 “익크”를 따라하다 보니 “익”보다 “크”에 강세를 주어 움직이는 것이 현재의 모습이다. “크”는 이제 “커~!”라는 형태로까지 변이(變異)되어 택견 기합의 형태를 바꿔 전수하고 있다. 이러한 기합이 나오게 된 것은 놀람의 표시인 ‘에그’, ‘이크’, ‘에그머니’의 기원으로 일부 전수 단체에서 설명하지만 아랫배에 힘이 들어가게 소리를 내는 “익!”이나 “이익!”같은 형태를 본다면 놀람의 표시와는 거리가 멀다.

송덕기가 택견을 하며 힘을 쓰는 기합을 할 때, “익!크~”, “익”, “이익!”, “이!!~”에 강조된 소리를 내었고 이것은 송덕기가 강조한 밟는 형태의 공격과도 연관성을 찾을 수 있다. 또한 상대에게 주의를 환기(喚起) 시켜주는 “익크~”와 힘을 사용하고 낼 때는 “익!크~”, “이익!”으로 구분되어 사용한 것으로 볼 수 있다.8)“익!크~”는 택견 기합의 발음 상 “이익!!” 또는 “익!!”으로 강하게 소리를 내고 “크~”는 자연스럽게 세어나오는 소리이기 때문에 위와 같이 기입하였다.

3) 예절

예절이나 철학은 여타 무도에서 존재하는 따로 존재하였을 것이라는 고정관념(固定觀念)과 달리 택견 전수에 있어서 예절 교육과 사상 교육을 찾아 볼 수는 없었다. 다만, 할아버지가 손주들에게 알려주는 해주는 이야기들이나 주의 사항정도로 남아있다.

“그런 건 없었어. 나도 가서 할아버지하고 손자처럼 이렇게 가서 그냥 그때 나는 할아버지하고 조금 가까웠다고 좀 지나가지고 바로. 그래 가지고 그냥 뭐... 손자 하듯이 바로 끌고 오고 그랬어요. 그때...”9)고용우, 2011년 11월 28일, 서울특별시 서초구 면담 데이터.
“인사법 같은 경우는 특별히 정해진 것은 없지만 뭐 우리가 (우리는 어리고 할아버지가) 워낙 어르신이니까. 그냥 (예의 갖춰) 인사했죠. 뭐 그런 정도밖에 없었고.”10)도기현, 2012년 10월 23일, 서울특별시 종로2가 면담 데이터.

제자들이 송덕기에게 취하였던 인사는 현재 택견의 예절로 가르치는데, 이는 한국의 전통예절과도 다르지 않다. 송덕기는 따로 제자들에게 예절을 가르치지 않았다. 무도(武道)에서 예절(禮節)․정신(精神)․철학(哲學) 같은 개념들은 근대에 가노지고로(嘉納治五郎)가 유술(柔術)에서 유도(柔道)로 변화하는 과정 이후 근대화된 일본무도의 형태와 중국무술에 주로 나타나는 과정이다. 그렇지만 전수 과정에서 예절이 없는 것이 아니라 송덕기에게 택견이 전승된 당시 시대 배경으로 예절이란 의무와 같이 사람이 지켜야 하는 형식으로 전해져왔기 때문이라 볼 수 있다.

2. 기술

1) 품밟기

택견의 상징 중 하나인 품밟기는 품수 품(品)자 형태를 발로 밟는 것을 말한다. 삼각형의 모서리를 밟아 나오는 스텝의 형태인데 송덕기는 제자들에게 품밟기를 매우 강조하였다. 현재 품밟기에 대한 연구는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데 그 기본의 틀조차 잡히지 않는 상황에서 연구를 진행하는 것은 인지되지 못하고 있고 경기화로 변형된 품밟기 위주로 연구가 진행되고 있어 인문학적인 접근이 선행(先行)되어야 할 것이다.

1971년 「살아있는 태껸인 송덕기 옹」『태권도』 제3호에서 품밟기를 설명을 하고 있는 것은 품이 움직이는 것을 「굼실」이라고 표현을 하고 계속해서 움직이는 것은 「굼실․굼실」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것에는 정형화되어 계속 의무적으로 움직이는 형태가 아닌 단발성으로 움직이느냐, 그리고 연이어 움직이느냐가 구분되어 기록되어 있다.1)대한태권도협회, 1971 「살아있는 태껸인 송덕기 옹」『태권도』 제3호 사료 고증.

1973년 「銀髮의 태권도人」『태권도』 제7․8합본호에서는 품과 연결된 동작을 다음과 같이 설명을 하는데 파도(波濤)나 물결이 출렁, 출렁 움직이는 것으로 설명을 하고 있다.2)대한태권도협회, 1973 「銀髮의 태권人」『태권도』 제7․8합본호 사료 고증. 1973년 예용해의 「무형문화재 조사보고서 제102호」에서 품밟기에 대한 몸짓은 따로 기술되어 있지 않고 있지만 ‘고고’나 ‘트위스트’와 비슷한 율동감이 있다고 하고 있어 이것으로 품밟기가 율동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동작은 알 수가 없다.3)예용해, 1973 「무형문화재 조사보고서 102호」 사료 고증.

하지만, 여러 제자들이나 문화재를 등록하는 과정에서 신한승 역시 송덕기에게 택견을 배워 문화재 등록을 하였기 때문에 품밟기 기본의 형태는 알 수가 있다.

“택견의 가장 중요한 게 택견의 모습인데, 품밟기들을 대충 다 지나가버려. 품밟기. 택견의 품밟기가... 품밟기 가... 전부라고 봐도 되요. 근데 그게 택견 품밟기를 안 하게 되면 택견이라고 볼 수가 없는 거지. 그전에 한번 와서 보니까 품밟기, (샅이 움직여서) 굼슬르기 그 기초 하에 그 모습을 나타내야지. 동작을 해야지 그게 안 되면 택견이라고 볼 수가 없어요. 그게 택견의 모습인데 그걸 나타낼 수가 없으면 택견이 아닌 거죠.…(중략)…품밟기라는 거기가 택견의 전부입니다, 그게. 근데 거기서부터 시작이면서 그게 (택견의) 전부란 말이에요. 내포하는 의미가 많아요. 그게.. 근데 그런 몸놀림으로 가지를 못하고 품밟기 하니까 다 별 우스운 모양세가 나오고..”4)고용우, 2011년 11월 28일, 서울특별시 서초구 면담 구술 기록.
“(발 간격)한 족장을 유지하면서 엉덩이를 흔들지 말고 (오금질로 굼실거리며)발바닥 전체로 품을 밟아라. 그리고 항상 편안하게 자연스럽게 밟아라. 이게 할아버지의 가르침이란 말이에요.”5)도기현, 2012년 11월 23일, 서울특별시 종로2가 면담 구술 기록.

송덕기의 품밟기 전수에서 품밟기는 기본의 형태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변화되는 스텝이었고 그 응용방법은 따로 정형화되어 있지 않아 더욱 더 많은 응용의 형태를 마련하는 것으로 택견 기술의 바탕으로 이용되고 있다.

품밟기에 대해 도기현은 ‘굼실’로 설명을 하고 있다. 굼실이라는 것은 애벌레가 몸통을 움츠렸다 펴지며 나아갈 때 표현을 하는 단어로 무릎의 굴신작용으로 설명을 하고 있다. 반면, 고용우의 경우 품밟기를 ‘굼슬르기’라고 표현을 하는데 사전적 의미는 없지만 ‘굼슬’은 파도나 물결이 너울거리는 모습을 표현한 단어로 송덕기의 기술 전개 원리에 중점을 둔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고용우는 도기현의 설명과는 조금 다르게 무릎의 굴신은 샅과 골반의 무게 중심 이동에 따라 자연히 나오는 동작으로 설명을 하는데 이것을 중요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발 간격이 한 족장 이상)조금 멀어지는 거는 괜찮은데 한 족장 정도! 벌리라는 거예요. 근데 품밟기를 하다보면 품을 밟다보면 자기도 모르게 발이 뒤가 붙어요. 나도 모르게 역품(逆品)6)대한택견연맹에서 하는 역삼각형 형태로 밟는 품밟기의 형태.처럼 이렇게 하다가 보면 뒤로 붙어있어요. 그러다보면 할아버지한테 탁! 맞는다고. 와서 엉덩이 걷어차시면서 "야! 이놈아!!" 한 족장을 반듯이 벌리라는데 왜 붙이느냐... 그래서 그것때문에 많이 혼나 근데 지금 대한택견연맹에서는 (뒷)발을 붙여라. (그리고는) 역품을 밟아. 그건 할아버지가 있었으면 매 맞을 짓이라 이거지.…(중략)…왜냐면 못하는 사람이 품밟기를 하다보면 엉덩이를 씰룩씰룩하게 된다고 그럼 할아버지 표현에서 여러 번 들은 이야기인데 나한테 할아버지가 우리학생들한테 하는 말, 제자들한테 하는 말이.. 말씀이.. "야, 이놈아! 왜 기생년 엉덩이 흔들듯이 꼬리를 치누?" 그런 표현을 많이 하면서 엉덩이를 흔들지 못하게 했단 말이에요.”7)도기현, 2012년 11월 23일, 서울특별시 종로2가 교차 고증 데이터.
“품밟기는 한 족장으로 움직이는 거에요.…(중략)…근데 (한국)안에서는 뭐 어쩌니 저쩌니 품밟기가 어쩌니 역품이 어쩌니 저쩌니 막 그런 얘기하고 (품밟기 논쟁)이거는 아니고 하니까. 거 더 이상은 발전으로 가기가 힘들어요. (본모습을 찾은 뒤에) 그리고 각자 나름대로 개성을...(찾아야죠)”8)고용우, 2011년 11월 28일, 서울특별시 서초구 면담 구술 기록.
“송덕기 선생님이 무예가 그거(품밟기를 기본으로 한)라고 근데, 근데.. 그 양반이 허리를 크게 움직이거나 구부리는 게 없어요.”9)박철희, 2012년 10월 5일, 서울특별시 종로2가 면담 구술 기록.

품을 밟을 때, 제자들이 공통적으로 입을 모으는 말은 현재 택견의 이미지로 작용하고 있는 일부 전수단체에서 ‘능청’이라는 동작이 과장된 허리재기 동작으로 송덕기가 전수한 품밟기의 형태와 달리 엉덩이를 흔들어 움직이는 동작에 대해 잘못된 것이라 하는 점이다. 이러한 형태로 나온 품(品)빗밟기는 새로운 형태의 품밟기로서는 경기에 적합한 가치가 있을지는 몰라도 송덕기가 전수한 택견의 형태와 멀어지는 단서가 되었다는 것이다.

송덕기의 제자들은 택견을 품밟기 중 가장 중요시하는 것은 반드시 발의 간격은 자신 발의 한 족장 간격으로 벌려두는 것인데, 이것은 타격(打擊)과 유술(柔術)의 형태가 공존한 택견의 형태 때문이라 볼 수 있다. 품밟기에 대해 송덕기의 직계제자들은 품밟기의 표현은 조금 다르지만 형태는 비슷하였고 품밟기의 중요성에 대해 강하게 주장하고 있었다. 그것은 송덕기가 전수하며 품밟기를 매우 중시한 이유도 있지만, 택견의 동작을 표현하는데 필요한 힘과 상대와 견줄 경우 힘의 사용방법에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힘을 사용하는데 있어 중심 이동과 굴신작용과 자세를 잡는 중요한 부분으로 매우 강조되고 있다는 것이다.

2) 활개짓

활개짓은 택견의 팔의 움직임을 지칭하는 말이다. 사람이 몸을 펴서 움직이지나 새가 날개를 폈을 때 날개를 지칭하는 말이기도 하다. 몽고의 전통 씨름인 부흐를 보더라도 새의 움직임을 형상화 한 춤인 항가리드 춤을 추는데, 이러한 인식은 북방 유목민의 영향을 받은 우리 문화에서도 자주 사용되는 표현이며 택견의 팔을 사용하는 기술과 동작을 활개짓이라 말한다.

활개의 범주는 사지(四肢)를 지칭하였을 때, 다리는 엉덩이부터 발끝까지 팔은 어깨․견갑(肩胛)으로부터 손끝까지로 볼 수 있다. 택견에서는 팔의 움직임으로 간주하고 전수가 되었는데 단순히 미적(美的) 특성이 아닌 팔의 보조수단으로 경기에 주로 사용된 것을 확인 할 수 있었고 그 뿐만 아니라 옛법의 형태도 많이 보유한 동작이기도 하다.

활개짓에 대한 기록은 1983년 박종관 『전통무술 택견』 출간 이전의 자료인 1971년 「살아있는 태껸인 송덕기 옹」『태권도』 제3호와 1973년 예용해의 「무형문화재 조사보고서 제102호」에서는 ‘칼잽이’ 이외에는 찾아 볼 수가 없는 것으로 보아 중요하게 판단을 하고 기록하지 않았던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銀髮의 태권도人」『태권도』 제7․8합본호에서는 손을 발의 보조 수단으로 설명을 하고 있으며 손질과 발질을 비롯해 옛법의 형태에 대해 언급하고 있지만, 송덕기가 가르쳐서 사용하면 안 되는 것으로 기록을 하고 있고10)대한태권도협회 1973, 「銀髮의 태권도人」『태권도』 제7․8합본호 “태껸을 발을 사용하여 상대를 제압하는 무도로 손을 보조적으로 사용하는데 그 특징이 있다.”라고 말하고 있다. 2002년 김정윤 『태견. 위대편』과 『태견. 아래대편』에서는 기존에 택견 자료와 달리 방대한 활갯짓과 옛법 특성을 지닌 활개짓들을 수록하고 있다.11)김정윤, 2002 『태견. 위대편』과 『태견. 아래대편』에서는 상대를 위해를 치는 활개짓․손질의 형태로 벽치기, 도끼날, 상대를 넘기는데 필요한 태질, 공격을 막는 막음질, 상대의 관절을 꺾는 신주, 상대의 움직임을 봉쇄하는 과시 그리고 월정, 봉수, 재기, 팔뚝구미 등 다양한 형태를 기록하고 있다.

“활개짓도 내가 이름을 갔다가 붙인 거고.. 활개짓도. 뭐... 어떻게 해라! 이게 아니라 처음에 가면 우리 품밟기하면서 활개 흔들기 기본적인 거를 가르쳐 줘요. 그 다음에 할아버지 생각나시면 품밟기 쓰윽- 하다가 활개 엇갈리기. 뭐 이러면서 “이건 엇갈릴 수도 있다.” 그러면 우리가 엇갈리기. 우리가 지금 안 가르치지만 활개 누르기도 있고 활개 올리기도 하는데 할아버지가 “활개를 눌러!”, 뭐... “올려라!” 이렇게 하시는 거를... 신한승 선생님도... 신한승 선생님도 일정 부분 나처럼 그.. 할아버지의 활개짓을 명사화 시켰다 이거죠.…(중략)…나는 내 생각하는 건 택견은 손을 많이 안 썼어. 조선시대에 많이 안 썼던 것 같해.”12)도기현, 2012년 10월 23일, 서울특별시 종로2가 면담 구술 기록.
“할아버지하고 이렇게 손자 식으로 막 얘기해 나는. 이렇게 막 조심스럽게 하지 않았어. (송덕기 할아버지는)이 어깨 불림 잘해. 이걸 못 하면 활개짓을 못 해. 이게 기본이야. 그러니까. (태극권하는)그 친구 그러잖아. 딱 보니까 품밟기에서 걔가 중국에서 타이치(태극권)에서 비전(秘傳)되는 기술들이. 택견에는 (기본으로)그냥 나오는 것들이야.…(중략)…무술이 다 동작의 이름이 있는 건 아니거든요. (손, 발 같이 움직이는)잔 것들은 그 안에서 다 아주 묻어서 가는 거예요. 잔거, 잔거 다 붙이면 (무술이)다 중국식으로 하지 그거, 그거(해서). 활갯짓이면 활갯짓! 그거 하나에요. (나는 그래서)안되면 순서를 1번, 2번 정하는 거예요. 그리고 옛날에 뭐 옛날에 활갯짓 어쩌나 저쩌나 그런 이름이 나는 없는 걸로 알아요. 그랬으면 그 비슷한 이야기라도 할아버님이 나한테 이야기를 해줬죠. 이야기를 해줬죠가 아니라 내가 한번쯤은 들었을 거란 말이에요. 근데 그런 이야기는 없어요. 그리고 내가 보기에는 택견이 무술 구성이 완벽하게 되어있는 무술이에요. 없는 거 같은데 완벽하게 되어있어요.”13)고용우, 2011년 12월 1일, 서울특별시 서초구 면담 구술 기록.

활개짓의 전수는 도기현이 받은 전수 방식은 품밟기를 하는 중간이나 같이 배우는 제자들과 견주기 시에 때때로 일러주는 형태를 취하였고 활개짓 동작은 편안하게 하였으며 활개짓은 많이 사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고용우는 활개짓의 기본인 어깨불림이 잘되어야 한다고 이야기하고 활개짓은 발질과 활개짓은 따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고 이야기하였다. 또한 무술의 기법이 다 구성이 되어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활개짓 역시 품밟기와 마찬가지로 제자들에게 전수한 형식은 정형되지 않은 형식으로 이용이 되어 왔다. 송덕기는 전수를 하고 기본 기술을 가르치고 움직이며 익히는 중에 한, 두 가지의 말이나 행동으로 일정함이 없이 전수를 해왔기 때문인지 약간의 차이가 있었다.

“손을 쓰는데 손을대는것이 아니라 손은 발기술의 方向을 모르게 하는 것이에요, 가령 손으로 머리를 치는척하면서 발길을 복사뼈를 친다던지 다시 말하면 손짓으로 저편을 혼라케 하라는 것이지요.…(중략)…(택견)前에 拳法이란 것이 있었습니다. 至今의 拳鬪와 비젓한 모양인데 武術을 하는데 맨 처음 입문으로 하는 것인가 봅니다.”14)조선일보사출판부, 1941 「朝鮮武藝와 競技를 말하는 座談會」『朝光』 7권 4호 309쪽 사료 인용 고증.
“(활개짓이 발과 같이 움직인 것에 대해) 그렇지!! 하키 전에 먼저. 이게 왜 준비하는 건데.…(중략)…활개짓이 그냥 사실은요. 무예는 중요한 것이 있는 것이 뭐냐면 어디서나 준비에요. 그러나 그것을 이론적으로 한데는 것보다도 활개짓 한 다는 것이 시늉이라고. 그러구 거긴 뭐를 내포하고 있냐면은 중심을 잡는 거에요. 내포하고 있는 거라고. 많은 부분이 나가잖아. 많은 부분 이 나가면 발만 움직여가지고 중심을 흐트러질 수가 있거든? 활개짓을 함으로서 하나의 보조 역할을 하는 거지.…(중략)…치는 시늉이지. 그러니까 인저... 물론 싸울 때는 치죠.”15)박철희, 2012년 10월 5일, 서울특별시 종로2가 면담 구술 기록.
“할아버님의 기술을 낱기술, 낱기술 하는데 그것만큼 듣기 싫은 것도 없어요.…(중략)…손은 항상 얼르면서 당기고 끝에서 끝으로 가는 거에요. 그럴 때 얼르기라는게 나오는 거에요.…(중략)…발을 찰 때도 시선을 손으로 주고 밑을 차고 그게 그래서 딴죽이나 안짱다리 같은게 잘 먹히는 거에요. 곧은발길이나 높은 발차기도 그런데서 연관(連貫)되서 나오는 거에요.”16)고용우, 2011년 11월 28일․2012년 12월 25일, 서울특별시 서초구․Los Angeles 자택 교차 구술 고증.
경회루 시연 사진
<사진 1> 경회루에서 박철희와 송덕기(1959) (사진제공: 박철희)

1941년 잡지 기사인 「朝鮮武藝와 競技를 말하는 座談會」『朝光』의 내용과 박철희의 증언은 활개짓은 발의 방향을 속이는 것이라 말을 한다. 또한 박철희는 중심을 잡고 유사시에는 상대를 가격하는 기법으로 활개짓의 사용을 설명하고 있다. 고용우는 근대의 무술처럼 발차기면 발차기, 손이면 손과 같은 방식으로 송덕기의 동작을 정형하고 나누면 안 된다고 설명을 한다.

2007년 이용복의 『바람이 불어도 가야한다』에서 1985년 부산에서 열린 제1회 택견대회에서 송덕기가 신한승의 활개짓을 보고 화를 낸 것은17)이용복, 2007 『바람이 불어도 가야한다』, 42쪽 사료 고증. 활개짓을 머리위로 드는 동작이 없는 것이 아닌, 정형(定型)되어 일정하게 같은 동작으로 움직이는 활개짓이 없었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논리로 이용복은 가슴위로 활개를 움직이는 것은 맞지 않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송덕기의 동작이 <사진 1> 및 아래의 사진 사료들과 같이 활개를 올리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주장은 문제가 있다.

국립영화제작소 옛법 시연 사진
<사진 2> 국립영화제작소에서 촬영한 택견의 옛법 시연 (시연자: 송덕기와 이준서)
김병수 촬영 송덕기
<사진 3> 김병수가 촬영한 송덕기 (사진제공: 김병수)
위대편 고용우 송덕기 사진
<사진 4> 『태견. 위대편(2002)』 고용우와 송덕기

활개짓의 직접 사용을 하는 기술들 중 손질로 분류가 되는 기술들에는 태질18)세게 메어치거나 내던지는 짓.에 필요한 덜미잽이 기술들과 맴돌리기 기술들이 있지만 이러한 부분에 대하여 제자들의 공통적인 움직임은 같았다. 이것은 송덕기에게 전수를 받았지만 유도(柔道)나 씨름처럼 사람을 넘어트리는 기술에 필요한 동작으로서 보편성을 가지기 때문으로 판단한다. 또한 택견의 대표적인 기술인 칼잽이 역시 동일하게 사용을 하고 있다.

하지만 고용우는 송덕기의 기술 중 옷을 잡는 형태도 있었다고 하는데 <사진 2>의 1984년 국가장학전수생 이준서와 함께 촬영하는 문화재청 기록19)국립영화제작소, 1984 『택견[비디오녹화자료]』, 6분 53초~6분 56초 옷을 잡는 기술 내용 반영.이나 김병수가 촬영한 <사진 3>에서 옷을 잡는 멱살잽이의 형태와 같이 함께 사용되는 기술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활개짓의 부분(部分)이기도 하지만 옛법의 형태로 사용하여 온 것으로 판단 할 수 있다.

“멱살잽이가 있고 덜미잽이, 멱살잽이, 뭐 그런 것들이 있어요. 허리춤 잡는 것도. 그 택견의 독특하게 나오는 방법들이 있어요. 정면에서 끌어당기면서 줄띠를 잡는 방법이 있고. 허리춤 (허리 앞․뒤․옆구리)잡으면서 손가락으로 찌르는 형태가 있어요. 택견은 맴돌리기 같은 기법들은 맨손으로 잡을 때도 있고 옷이 있으면 옷을 잡아채고 그래요. 그게 (언어나 단어로)단정적으로 이랬다 저랬다 말로 하면 안 되는 거에요.”20)고용우, 2012년 12월 25일, Los Angeles 자택 면담 구술 기록.
“이 부분은 (어떤 기술인지) 나도[는] 잘 모르겠지만, 옷을 잡고 하시더라고 올라오는 다리를 잡고 깃을 잡고 그런 형태를 취하시더라구”21)김병수, 2012년 8월 5일,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면담 구술 기록.

활개짓의 사용에서 옷을 잡는 것은 활개짓 기본의 동작에서 옷을 잡아채거나 상대의 활개의 움직임을 막거나 흐름을 끊는 방법으로도 사용된 것을 알 수 있으며, 그 사용 방법과 종류는 다양한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 하지만, 1973년 「銀髮의 태권도人」『태권도』와 도기현에게 전수한 방식으로 미루어 보아 옷을 잡아 뜯는 것은 옛법의 형태라고 판단 할 수 있으며 견주기나 경기에는 금지된 것으로 판단 할 수 있다.

위와 같은 내용으로 미루어 보아 송덕기의 제자들을 통한 송덕기의 택견 기술 중 활개짓은 일정하게 같은 동작으로 계속 움직이거나 고정화되어 있지 않는 것을 알 수 있다. 견주기 시에는 상대의 옷을 움켜잡지 않지만 넘어뜨리기 위해 잡아서 당기거나 미는 방법으로 사용한 것으로 알 수 있으며 넘어뜨리는 목적을 제외한 활개짓의 주된 사용은 발의 사용을 보조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된 것으로 판단할 수 있었다. 무예의 성격이 강한 부분인 옛법과도 혼용될 수 있어 그 사용구분에 대한 추가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3) 발질(발길질)의 원리와 오해 검증

택견의 발질은 일반적으로 무예(武藝)에서 자주 사용하는 발차기와는 다르다. 택견에서 발질이라 지칭하는 것은 발로 차는 기술과 걸어 넘어뜨리는 기술 및 상대를 차서 흩뜨리는 기술이 혼합(混合)되어 있기 때문이다. 발질은 신체의 하지(下肢)인 다리에서 나오는 기술 전반(全般)을 지칭하며 발차기보다 포괄적인 개념으로 지칭되어 온 것으로 볼 수 있다.

1971년 대한태권도협회의 「살아있는 태껸인 송덕기 옹」『태권도』 제3호에서는 다리기술을 8가지로 기록을 하고 있고,1)대한태권도협회, 1972 「살아있는 태껸인 송덕기 옹」『태권도』 제3호, 안짱다리, 박장다리, 낚시걸이, 무릅걸이, 발등거리, 곧은 발질, 날 치기, 깎음 다리 사료 고증. (원본 내 연도 오기 정정 반영) 1973년 예용해의 「무형문화재 조사보고서 제102호」에서는 10가지로 기록하고 있다.2)예용해, 1973 「무형문화재 조사보고서 제102호」, 깎음다리, 안짱거리, 안우걸이, 낚시걸이, 명치기, 곁치기, 발따귀, 발등걸이, 무르팍치기, 내복장갈기기 고증. 1983년 박종관의 『傳統武術 택견』에 수록된 발질은 총 31가지로 정리가 되어 있고 차는 기술과 다리로 걸어 넘기는 기술이 섞여 있다.3)박종관, 1983 『傳統武術 택견』, 곧은발질, 는질러차기, 발등걸이, 장심걸이, 촛대걸이, 발따귀, 무릎걸이, 곁치기, 낚시걸이, 장대걸이, 두발당상, 안장걸이, 무릎 맞붙히기, 발등밟기, 깎음다리, 정강차기, 막음다리, 앉아서 맴돌리기(앞), 앉아서 맴돌리기(뒤), 오금치기, 안우걸이, 내차기, 째차기, 딴죽, 갈지자(之)발쓰기, 줄띠지르기, 복장지르기, 물구나무 쌍발치기, 엎어치기, 허벅치기, 돌려차기 사료 고증. 2002년 김정윤 『태견. 아래대편』에 수록된 발질은 발차기 26가지가 있고4)김정윤, 2002 『태견. 아래대편』 째차기, 오금차기, 내차기, 정강차기, 명질러차기, 어깨차기, 가슴차기, 따귀차기, 턱차기, 볼따귀차기, 대죽차기, 깎음다리, 겹차기(1), 겹차기(2), 겹차기(3), 두발난성, 달차기, 돌개차기, 돌땅치기, 차기(1), 차기(2), 차기(3), 차기(4), 차기(5), 차기(6), 차기(7) 사료 고증. 무릎대기는 2가지5)김정윤, 2002 『태견. 아래대편』 무릎대기(1), 무릎대기(2) 고증., 걸이는 27가지6)김정윤, 2002 『태견. 아래대편』 낚시걸이, 안오걸이, 장대걸이(1), 장대걸이(2), 오금걸이(1), 오금걸이(2), 무릎걸이(1), 무릎걸이(2), 무릎걸이(3), 발등걸이(1), 발등걸이(2), 장심걸이(1), 장심걸이(2), 장심걸이(3), 장심걸이(4), 장심걸이(5), 걸이(1), 걸이(2), 걸이(3), 걸이(4), 걸이(5), 걸이(6), 걸이(7), 걸이(8), 걸이(9), 걸이(10), 걸이(11) 사료 고증.로 총 52가지가 수록되었다.

1973년 「銀髮의 태권도人」『태권도』 제7․8합본호는 택견의 정의(定義)로 발을 사용하여 상대를 제압하는 무도(武道)라고 되어 있고 택견의 주된 사용 방법은 다리에 있다고 송덕기는 말하고 있다.7)대한태권도협회, 1973 『태권도』「銀髮의 태권도人」 제7․8합본호 고증.

송덕기의 전수과정에서 발질에 대한 논의 전에 송덕기 제자들이 송덕기가 고령(高齡)일 때 배웠기 때문에 송덕기가 높은 발차기를 할 수 없어 송덕기 직계 제자들이 낮은 발차기만 배웠다는 일부 단체의 주장은 문제가 되고 있다. 직계 제자들의 생생한 증언 사료는 다음과 같다.

“아니야, 그 양반 발 많이 올라가. 발 많이 가벼와, 몸이 사뿐 사뿐하고. 요 내가 맨날 찾아 댕기면서... 그 양반이 이제 양반으로. 주로 한량이시니까.. 일을 안 하고 노동하는 분이 아니고. 먹고 놀고 말하자면 예전에 먹고 놀고 말하자면 술도 먹고 산에 가서 활도 쏘고. 아마 그렇게 일생을 즐겁게 사신 거 같해.”8)김병수, 2012년 8월 5일,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면담 구술 기록.
“아니, 할아버님이 막 그렇게 차고 그런 건 아닌데. 아주 높은 발차기(머리를 차는)는 못하셨지. 근데 웬만한 발차기는 가볍게 올라갔어요. 그때만 해도...…(중략)…근데 그때 (1969~1977)당시만 해도 동작이 뚜렷했고.…(중략)…동작 같은 것들이 택견의 모습인데 완전히 우리 상식(무술에 대한 고정관념)이랑 벗어나 있었다고.”9)고용우, 2012년 12월 25일, Los Angeles 자택 면담 구술 기록.
“할아버지가 뭐 정정하셨지. 할아버지가 보통 건강하신 몸이 아니니까.…(중략)…할아버지가 이제 그... 직접 내가 뵈었을 때(1982년)는 발따귀로 상대 얼굴을 다 올라오지 않으셨지만 거의 내 턱 밑까지 올라 오셨어. 발따귀도 가르쳐주시고 보여 주셨지. 윗발길질을. 복장지르기는 직접 하셨고. 복장지르기에 내가 넘어지기도 했어.…(중략)…할아버지가 그때 내가 배울 당시랑 제자들이 배우던 당시(1984년)에는 얼굴차기가 그렇게 쉽게 올라가지 못했어.”10)도기현, 2012년 10월 23일, 서울특별시 종로2가 면담 구술 기록.

즉, 1960년대에 송덕기와 함께했던 태권도인(人) 김병수, 1970년, 80년대 고용우, 1980년대 도기현은 송덕기가 1984년 이전까지 발차기가 고령(高齡)에도 불구하고 높은 발차기가 가능하였다고 말을 하고 있다. 일부 택견단체에서 주장하는 고령(高齡)이기 때문에 송덕기의 제자들이 높이 사용하는 발질을 배울 수 없었다는 것은 근거가 없다 할 수 있다.

택견이 근래(近來)에 소개되면서 알려진 기법 중에 택견의 발질은 상대를 다치지 않게 발을 차는 원리를 ‘밀어차기’, 즉 ‘는지르기’로 설명하고 있다. 이것은 송덕기가 택견의 발차는 방법으로 설명한 ‘느름질’에 원리로 두고 설명을 하였는데,11)택견코리아 홈페이지(http://www.taekkyonkorea.com/guide/?file=nunjiruki), 2012년 11월 18일 검색 사료 고증. 송덕기가 느름질을 설명한 것은 당수(唐手)의 앞차기와 비교하여 설명을 하였기12)대한태권도협회, 「살아있는 태껸인 송덕기 옹」『태권도』 제3호, 대한태권도협회, 「銀髮의 태권人」『태권도』 제7․8합본호 자료 기반 교차 고증. 때문에 발질 전체(全體)로 해석하는 것은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다.

“가라데는 곧은 발질이다. 곧은 발질로 상대방을 가격해서 다치게 하는 거지만은. 택견은 이렇게 곧은 발질로 치는게 아니고 이렇게 느름질루 말하자면 이렇게 느름질로 이렇게 하는 거다. (동작으로 발로 미는 동작을 보이며) 다치지 허는 게 아니구 다치지 않게 가격하는게 아니고 상대방을 느름질로 해서 넘어뜨리는 거. 그 넘어지믄 그게 아마 그... 게임에서 지는 모양이야. 그래가지고 택견을 갔다가 느름질로 치고 (손과 발로)어깨치고 그런다 그래. 발따귀 발로 치고 그런다 그래.”13)김병수, 2012년 8월 5일,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청취 데이터 고증.
“느름질은 못 들어봤는데. (할아버님이 말씀하신 것)그 앞뒤 문맥을 보면 알 수 있을 것 같은데…(중략)…‘는지르기’야. 그게 뭐냐면 는지르기가 킥복싱(무에타이)에 나오는 주로 사용하는 그... 밀어차는 발차기(무에타이 딥) 있잖아. 그걸 얘기하는 거야. 그래서 내가 그러잖아. 택견은 어떻게 보면 킥복싱(무에타이)같기도 하고 또 가라데식으로 하면 가라데 같기도 하고. 유도 같기도 하고. 중국무술 형태 같은 부드러운 면이 있고.”14)고용우, 2012년 12월 25일, Los Angeles 자택 면담 구술 기록.
“이 복장지르기만 자체가 이렇게 딱 뻗어 차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넘어뜨리기 위한 거니까 이렇게 접어서 미니까.. 어쩔 수 없이 는질러차기가 되는 거지. 그래서 우리 복장지르기를 할아버지가 우리는 는질러차기라고 가르쳐 주셨다구. 그 기술을.”15)도기현, 2012년 10월 23일, 서울특별시 종로2가 면담 구술 기록.

송덕기는 택견의 발질 사용원리를 느름질이라고 표현을 하였는데, 이 동작은 상대를 넘어뜨리기 위한 발차기 동작으로 발로 상대를 밀어 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상대에게 다치지 않게 차는 동작의 의미는 김병수와 제자의 증언으로 미루어 본다면 크게 비중으로 작용하지 않았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느름질의 형태가 상대를 밀어내거나 넘어뜨리는 것에 기술이 집중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송덕기가 앞차기와 함께 느름질을 표현 한 것은 당시 당수도(唐手道)의 대표적인 발차기 기술인 앞차기와 가장 유사한 형태로 발을 차는 택견의 기술이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이것으로 볼 때 상대를 다치지 않게 찬다는 원리는 ‘느름질’에 대한 과대해석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송덕기는 느름질․는지르기․는질러차기와 같이 같거나 비슷한 명칭으로 전수한 것을 알 수 있는데, 그 외의 발질 형태에 대해서는 다른 시각에서 볼 수 있다.

“아랫발질은 상대를... 할아버지가 스스로 "쪼인타 까기"는 말을 많이 하셨어요. 그 '쪼인타'는 조인트(Joint)라는 영어식 표현인데도 할아버지도 “야, 쪼인타를 잘 까야 된다고” 지금은 우리(결련택견협회)가 그런 표현을 안써요. ‘쪼인타’ 이런건 영어식 표현이니까 안 쓰지만 할아버지도 많이 썼어요. “쪼인타, 쪼인타를 까야된다.”, “죠져!” 하체를 그래서 하체를 죠져서 “큰 놈들은 하체를 죠져야 된다.” 죠진다는 말씀도 많이 쓰셨고 “까라!” 깐다는 말을 많이 쓰셨는데 하체를 계속해서 나는 우리가 배울 때…(중략)…지금같이 내가 나이가 있어서 좀 더 똑똑했더라면 물어봤을 텐데 여쭤봤을 텐데 예를 들어서 나한테 딴죽을 가르쳤었는데 저 친구한테는 낚시걸이부터 가르쳤다고 그게 선생님이 생각 나시는데로 가르치신 건지. 아니면 이 친구는 딴죽을 먼저 가르쳐야 되겠고 쟤는 이거 먼저... 그거는 나는 잘 모르는 다는 거지.”16)도기현, 2012년 10월 23일, 서울특별시 종로2가 면담 구술 기록.
“택견이 태권도처럼 발차기만 했다고 그러면 벌써 끝나고도 남았어. 벌써 끝나고도 남지. 진작 끝났지.…(중략)…(전수과정 발길질 순서가)없었어. 그러니까 그게 뭐 품밟기 같은 거나 할아버지가 나름대로는 있었어, 그게. 나름대로 있는데 사람들이 배울 때는 그거 몰라 잘... 할아버지 나름대로 이런, 이런, 딱 정형(定型)할 레니까. 할아버지가 뭐냐면 옛날엔 도장에서 1번, 2번, 지르기, 정권지르기 이런 형태가 있지만 그런 형태가 없다구. 근데 (첫째로)품밟기라는 게 있었고. …(중략)…그래서 (배우면서) 질문도 많이 해야 되고. 맨 처음엔 배우는 데로 가지만 나중엔 질문도 그래. 할아버지가 나중에 다리를 잡으면 나중에 내가 그때는 혼자하고 이럴 때니까. 그거한번 엉덩이를 되게 한번 세면 바닥에다 찍은 적이 그때는 겨울이었을 때니까. 그러니까 난로가 옆에서 휴게실 쪽에서 이렇게 의자 쫌 밀어 넣고 하고 그랬단 말이에요. 그리고 인저 할아버지가 간단하게 보여주고 내가 그걸 연습하고 그랬단 말이에요. 곧은 발길이라 그런게 있잖아. 그 택견의 특징 것 중에 하난데 다리를 잡고, 택견은 잡는 게 많아요 주로. 뭐 막아내는 것도 있지만 주로 엉겨 붙어서 잡는단 말이야. 대표적으로 나온게 칼잽이 같은 기법들이잖아. 근데 내가 곧은발길을 차보라 해서 딱 찼더니 그걸 같다가 들어올 때 딱 받아서 위로 딱 떠버리는 거야 약간. 그러니까 난 자빠지려고 하지 않았는데 그걸 살짝 뜨니까 중심을 잃고 엉덩이를 찧고 않아버렸지 바로. 그냥 순식간에 팍 떠서 꼬리뼈가 아파가지고 내가 서너 달은 이상했어.”17)고용우, 2011년 12월 1일․2012년 12월 25일, 서울특별시 서초구․Los Angeles 자택 교차 구술 고증.
“내가 배울 때는 곁치기라는 몸통을 차는 기술이 있었는데, 발바닥으로 환도뼈 있는 데나 몸통을 (차서)밀어버리는 것인데 너무 많이 다쳐서 지금은 하지 않고 있지.”18)도기현, 2012년 12월 27일, 서울특별시 종로2가 면담 구술 기록.
“아랫발길질은 내 생각에는 나는 강조했다는 것은 못 들어봤어. 강조하지는 않았어. 아랫발길질이 있을 뿐이야. 아랫발길질을 강조한 것은 나는 못 들어봤고. 아랫발길질이 있는 거야. …(중략)…발바닥으로 차는 거는 근접거리에서 찰 수 있는 발들. 발바닥으로 이렇게 재고 관절을 갖다가 밟기도 하고 그런 쪽이에요. (발등이나 다른 부위) 그런 건 당연히 있어요. 떼짱뜨기랑 같은 건데, 떼짱을 뜬다는 거에요 떼짱을 뜬다. 떼짱을 뜰 때, 15도로 딱 찍어서 파죠? (할아버지가) 바닥에다 이렇게 나무로 이렇게 사각형을 그려주고 손으로 이렇게 찍어주시더라고. 그러니까 그거 잘 생각해봐요. 그게 떼짱치기라는 거에요 떼짱치기. 장심걸이 사실은 그게 발앞장심(앞꿈치), 앞굽이(발을 폈을 때 앞장심)를 예기하는 거거든요. 발바닥의 가운데로 하는게 아니고.…(중략)…(몸통을 못차는건) 말도 안 되고요. 무술에 갔다가 몸통을 못 차는게 어딧어요. (언성이 높아지며)(요즘 택견이)무술과 놀이의 개념을 왔다갔다.”19)고용우, 2012년 12월 25일, Los Angeles 자택 면담 구술 기록.

반면, 고용우는 아랫발질은 단지 발질의 일부였고 강조하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다. 발질에는 옛법의 형태로도 언제든지 사용이 되고 발차기의 형태가 다양한 무예로 이야기하고 있다. 또한 송덕기의 기록으로 남은 형태 중 하나인 잡고 차는 것이 있다. 송덕기는 고용우, 도기현에게 전수하기 이전인 1964년 김병수와 함께 경회루에서 사진을 찍었는데 동작은 <사진 1>과 같다.

김창수와 송덕기 경회루 시연
<사진 1> 김창수와 송덕기의 잡고차기 시연 (사진제공: 김병수)

송덕기의 잡고 차는 기술이 <사진 1> 외에 존재하는 것은 활개짓의 잡는 동작만큼 여러 가지를 보유하고 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니까 그 양반 손을 잡고 이렇게 (<사진 1>처럼) 밀면서(팔을 못 쓰게 하고) 치는 모냥이지.…(중략)…이게 안에서 올라오는 식이더라구.”20)김병수, 2012년 8월 5일,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면담 구술 기록. (사진 오기 보완 연동)
“잡고 차는게 발을 차는데, 근접거리에서 쓸 수 있는 발들이 있어요. 그러니까 근접거리니까 발을 짧게도 쓸 수 있고. 근접에서는 발 쓰기가 그렇게 쉽지 않잖아? 태권도만 봐도 거리가 필요하잖아. 근데, 택견은 근접거리에서 쓸 수 있는 기술들이 있단 말이에요. 그게 발따귀나 이런 것들 그리고 발바닥으로 이렇게 발 잡히는 이런 것들. 기법들에 그리고 장심걸이 같은 거. 이런 것들은 근접에서 사용할 수 있는 기법들이야. 장심걸이라는 게 보면 태권도에 45도 앞차기 비슷한 거야. 근데 발장심으로 차는 거야. 구부려서 근데 그거는 택견에서는 멀리서도 찰 수도 있겠지만. 근접거리에서 무릎을 구부려서 무릎의 반동으로 옆구리 같은 데를 탁! 차버린다는 거야. 그럼 거기에 복합적으로 연결되는 기술들이 있어요. 그건 내가 확실히 배운 기술이 있어. 장심걸이가 그 박종관씨가 장심걸이라는 말을 썼더라고 다른데(다른 책) 서는 안 나오는데 ‘아, 저양반이 저걸 봤구나’ 내가 그랬어. 내가 그랬음 괜히 헛소리라고 할 수도 있는데.”21)고용우, 2012년 12월 25일, Los Angeles 자택 면담 구술 기록. (사진 오기 보완 연동)
“옷을 잡을 수도 있는데 옷을 그... 어떠한 이유로 잡았는지 모르지 만 옷을 잡는 것은 안 된다고. 잡고 차고 이런 것을 우리가 할아버지가 경기 할 때 할아버지 앞에서 하다가 옷이 찢어지고 그런단 말이에요. 그럼 할아버지가 옷 잡지 마라. 옷은 옷감이 귀하니까. 옷 잡지 마라. 옷을 못 잡게 하셨고. 이런 기술들은 어떤 의도에서 할아버지가 발이 안 올라가서 잡으면서 차셨는지. 발따귀를 아니면... 발따귀를 잡고 근데... 할아버지가 예를 들어서 우리가 경기에서 우리가. 잡고 차는게 반칙이란 말이야 우리협회에선. 다칠까봐. 근데 옛날에는 정말 잡고 차도 됐었는지.. 이런 것까지 우리는 알 수가 없는 거지. 근데 지금 현재 잡고 차는 거는 안 되는데.. 시합 중에 다치니까.”22)도기현, 2012년 10월 23일, 서울특별시 종로2가 면담 구술 기록.

고용우는 잡고 차는 기술이 대표적으로 장심걸이를 설명하였는데, 발따귀라고 알려진 <사진 1>의 동작과 가까운 설명을 하였다. 그 외에도 몇 가지 잡고 차는 기술의 형태가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도기현은 <사진 1>에 대해 송덕기에게 전수받는 과정 중에 옷감이 귀하기 때문에 옷을 잡지 말라고 하였다고 한다. 도기현은 송덕기의 다리가 안 올라서 이렇게 찬 것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하였지만 1983년까지 다리가 잘 올라간 것으로 봤을 때 다시 한 번 생각할 필요가 있지만 도기현이 배운 형태는 견주기 위주였기 때문에 송덕기가 이 부분을 이야기한 것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있으며 옛 택견의 견주기 규정이나 약속으로도 생각해 볼 수 있다.

택견의 기술 중에 활개짓의 일부(一部)인 태질처럼 걸어 넘기는 걸이 기술들이 있다. 제자들에 따라 걸이, 태질의 일부로 분류하고 있지만 발로 사용하는 동작은 씨름이나 유도와 같이 상대를 넘기는 동작으로 큰 차이는 없었다. 송덕기는 발질은 다양한 형태로 볼 수 있었고 현재는 전해지지 않는 형태 역시 확인을 할 수 있었는데, 밀어 차기만을 하거나 느른히 움직이는 원리는 차는 것이 아닌, 발은 주로 발장심(掌心)을 이용해서 차는 형태로 확인 할 수 있었고 발장심의 사용은 옛법의 형태와 구분된 것으로 판단 할 수 있다. 제자들 간에는 발질에 대해 다른 부분을 볼 수 있었지만 제자들은 발질에 대해 발길질이라는 용어로 설명한 것은 송덕기가 표현하던 그대로 지칭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3. 옛법

일반적으로 옛법에 대한 설명은 위에 설명한 선행연구와 출간된 택견 서적들은 결연(決然)한 마음을 가지고 사용하는 기술들로 사생결단을 내기 위한 방법들로 풀고 있다.23)오장환, 1991 『택견전수교본』, 119쪽 사료 고증. 이것은 신한승에 의한 결과물을 사용하여 왔으며 신한승이 채집한 수기(手技)는 육태안(陸泰安)에게 수벽치기로 전승되어 독자적인 발전을 하였다.24)「고유무술 수벽치기, 계보 찾았다」『일간 스포츠』 1987년 7월 11일 2면 사료 고증. 송덕기로부터 전수받은 제자들에게 옛법은 옛날부터 내려오는 기술을 이야기한다. 송덕기에게 택견을 전수해준 임호 역시 택견을 배울 때도 옛법이라 불러왔다고 하는 것을 미루어 보아25)도기현, 2003 『택견 그리고 나의 스승 송덕기』, 137쪽 사료 고증. 그 연원은 1800년 이전으로 봐야 할 것이다.

“옛법도 내가 써놨지만. 옛법도 선생님이. 오늘 옛법이다 이렇게 가르킨게 아니라. "이렇게 하면 옛법이야" 뭐냐면은 그... 어... 허벅치기 하실 때 상대방이 품밟기 할 때 허벅지를 툭 차가지고 흐름을... 움직임을 끊는데 이때 발장심으로 가볍게 밀어야지 힘을 주고 밟아 누르면 이게 옛법이 되서 밟아서 뼈가 부러지니까. 밟으면 안 된다 그건 옛법이다. 이런 식으로 인제... 뭐 정확히 일일이 하나씩 체계적으로 배우지 않아서 기억이 안 나지만. 옛법이라고 따로 배운 것도 있지만 대부분은 뭘 설명하시다가 그거에 연이어서 설명을 많이 해줬다 이거지.”26)도기현, 2012년 10월 23일, 서울특별시 종로2가 면담 구술 기록.
“택견의 기법들이 다 옛법이야, 사실은.. 근데, 옛날 때 할아버지 이전 대(代)의 걸 더 이야기 할 수 있는데, 옛법이라는 건 좀 어떻게 보면 그러니까... 전체적인 것이 다 옛법이 될 수 있는데 요즘에서도 조금 약간 좀... 위험한 기술들을 이야기 하는 거예요. 손으로 목을 친다거나, 주먹으로 목을 치는게 있는데 그러니까 그런 것들을 통칭해서 다 옛법이라고 그래요.”27)고용우, 2012년 12월 25일, Los Angeles 자택 면담 구술 기록.

옛법은 상대에게 사용하면 위험하고 치명적인 기술을 지칭하며 고대(古代)부터 내려져 온 기술들을 통틀어 옛법이라고 한다. 기술의 사용부위는 손․팔꿈치․발․정강이․무릎․머리 등 신체 부위의 얽매임 없이 사용하는 것인데 다양한 기법들이 더욱 있지만 도기현이 전수받은 기술은 17가지보다 조금 넘는다.28)도기현, 2003 『택견 그리고 나의 스승 송덕기』, 138쪽 고증. 안경씌우기, 장못치기, 코침주기, 고막치기, 낙함, 턱걸이, 줄띠잡기, 도끼질, 항정치기, 팽이돌리기, 잡아대기, 밟아차기, 곧은발질, 자진무릎, 허벅찧기, 꿈치차기, 깍음다리 등이며 송덕기 구술 동작을 필자가 명사화함. 고용우가 전수받은 옛법 형태의 기술은 김정윤이 촬영하여 출간된 『태견. 위대편(2002)』과 『태견. 아래대편(2002)』을 본다면 상당히 많은 부분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고용우가 전수받은 기술들 중 꺾는 동작인 ‘신주’나 상대의 공격을 봉쇄(封鎖)하고 상대를 묶어두는 기술의 종류인 ‘과시’ 크게 돌려서 태기치며 걸어서 크게 넘기는 ‘풍수’ 등이 있는데, 도기현과 함께 배우던 최유근은 1985년 이후 송덕기에게 ‘낚시모’라는 이름으로 꺾는 기술을 전수를 받았다고 한다.29)도기현, 2003 『택견 그리고 나의 스승 송덕기』, 137쪽 및 도기현 교차 면담 데이터 고증.

“다행이 이제 할아버지가. 어떤게 있을까... 할아버지 기술 중에서 칼잽이 가르쳐주시다가 칼잽이 해서 미는데 목을 밀어야지. 꽉 쥐면 안 된다 이게 줄띠잽이다. 옛법이다. 줄띠잽이라고 그래가지고 목을 탁 민 다음에 움켜줘서 목덜미 잡아챈다. 이런 식으로 기술을 설명하다가. 안 되는 반칙을... 반칙인가? 그런 얘기를 하시면 옛법이라 그런 적이 많고.…(중략)…그럼, 할아버지가 가르쳐 주신거지. 낙함은 이... (손장심 아래 단단한 부위)이걸로 턱을 쳐서 내려 빼는 거에요. 근데 이게 낙함 하는데 뭐 헤깔리신지 오래되었는지... 코침주기가 있는데. 코침도 또 똑같 해요. 코침주기도 이걸로 딱 치는 건데.. 이렇게 치는 건데...…(중략)…이렇게 치는 건데.. 코침주기나. 턱걸이, 낙함이나 비슷한 기술들이 면치기나... 그러니까 얼굴 치는 거를 면치기라고 하는데... 또 근데 그걸 턱걸이라고도 하신다는 거지. “그럼 턱걸이도 면치기 아니에요?” 우리가 이렇게 물어보면. “턱걸이는 턱을 거는거고! 면치기는 얼굴을 치는 건데!” 또 들어보면 다르긴 다른데.. 옛법에 대한 기술을 체계적으로 배운게 아니라 그때, 그때 (조금씩)배웠는데 지금 같으면 아까도 말했지만 우리가 이렇게 조사하듯이 했으면 좋을텐데. 우리가 배워가지고 재밌으면 우리끼리 연습을 하고 또 연습도 안되는게 옛법들은 다... 상대를 아프게 하는 거니까. 잘 연습할 수 없지.”30)도기현, 2012년 10월 23일, 서울특별시 종로2가 면담 구술 기록.
“옛법은 순서가 없게 나왔어요. 그러니까... 이 동작이 “이거해라 저거해라” 하는 건 아니에요. 하다가 이런 동작, 저런 동작 기냥 나와 버려요.…(중략)…(송덕기가 칼잽이 설명하다가) 어느 때는 확실하게 줄띠를 땡기면서 미는 거다. 줄띠를 잡는 거다. 이런 식이에요. 이게 갑자기 나오다가 그걸 하면서 어느 때는 뭔 동작을 하다가 갑자기 그걸 물어 볼라고 하면 다른 걸 말씀하신단 말이에요. 기술에 따라 순간의 기술을 보여 주시는 거에요. 어느 때는 웃으시면서 목줄띠 같은데 찌르는 경우도 있고. 할아버님이 일종의.. 무술이라는 거를 이해하셨던 거에요. 할아버님이 그런 동작이 무술을 이해하지 못하면 나올 수가 없는 거에요. 그러니까 (요즘의 무술 같은 개념을)꿰뚫고 있으셨던 분이에요. 어떤 분들 와서 “노인네, 힘 다 빠지셨구만..” 이러구 가는 사람도 있고 별의별 사람들 다 많았지. 근데 그걸 그러니까 할아버님하고 직접 접해보고 배워보고 보고 이렇지 않는 과정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노인네 이러고 팔짱끼고 이러고 계시니까 오면 품밟기, 보여 주신게 없으니까. 품밟기 그런 거 밖에 보여준게 없어요. 사람들 오면 그러면 “저거 뭐야”이러고 다 간다고. 그러니까 그런 동작(옛법)이 무술을 이해 못한 분이면 나올 수가 없는 거에요. 자연적으로 순간에 나올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그걸 갔다가 순간적으로 (태견책에 대해)어쨌다 저쨌다 흉내냈다. 이런 얘기도 나오고 그러는데 절대 그런 건 아니에요.”31)고용우, 2012년 12월 25일, Los Angeles 자택 면담 구술 기록.
“(책에서는 ‘물주’로 지칭)이런 거는 아무튼 태질이라고 하기에 조금 이게.. 이게, 이게 목무장 기법들이야. 목무장.…(중략)…이게 탁 틀었다가 누우면 과시가 될 수 있어. 이렇게 돌리면 돌아지고 목무장. 돌려서 (상대를) 찌그러트리면 과시가 되고.”35)고용우, 2011년 12월 1일, 서울특별시 서초구 면담 구술 기록. (사료 원본 순번 고증 연동)

송덕기가 옛법을 전수할 때는 기본적으로 사용되는 기술의 형태를 알려주면서 부가(附加) 설명으로 옛법의 동작 형태를 알려 주었다고 한다. 이는 전수하는 과정 중에 옛법이라는 위험한 형태의 기술과 구분지어 설명한 것과 더불어 응용방법을 제시(提示)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또한 송덕기의 옛법 기술은 비슷한 기술에 대해 여러 가지로 응용되며 명칭이 있는 것도 있지만 명칭이 없는 다양한 형태가 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송덕기는 제자들이 그냥 옛법을 물어보거나 가르쳐달라고 하면 사람을 다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이유로 잘 가르쳐 주지 않았다고 한다.32)도기현, 2003 『택견 그리고 나의 스승 송덕기』, 137쪽 “옛법은 상대를 상하기 때문에 함부로 가르쳐서는 안돼!” “시합 중에 옛법을 그러면 난리가 나지. 얼른 사과하면 모를까 그렇지 않으면 시합하다말고 마을과 마을끼리 큰 싸움이 벌어지기도 했어.” 사료 고증.

“다음은 남을 해칠 생각으로 운동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나는 매일새벽 태껸을 배우는 제자들에게 “주먹을 쓰는자는 반듯이 그 댓가를 받게되니 절대로 다른 사람들을 해칠 생각조차 갖지말라.”는 당부를 하곤 한다.…(중략)…택견은 손과 발을 모두 사용하지만 발을 많이 사용한다. 시합을 할 때는 동네끼리 선수를 뽑아서 대회를 열었으나 일제(日帝) 시대에는 일본의 탄압으로 택견을 전혀 실시할 수 없었다.…(중략)…그 당시에는 나 자신도 택견을 전통무술로 계승시켜야 하겠다는 생각을 별로 못하였고, 우리의 고유무술에 대한 인식을 깊이하지 못하여 큰 관심을 두지도 못했다.”33)「80年을 하루같이 태껸運動」『동아일보』 1983년 12월 22일 12면 사료 발췌 고증.

하지만 택견이 송덕기의 증언과 같이 발질 위주 사용의 형태로 견주어 발달하여 온 것을 봤을 때,36)박종관, 1983 『傳統武術 택견』, 8쪽 사료 고증. 옛법은 경기(競技)와 마을 간에 견줄 때에 안전성으로 위해 금지하기 위해 지칭(指稱)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전수과정에서 문화재 조사들은 옛법의 형태가 매우 적게 남아있다고 기록하고 그 가치 또한 오장환은 「택견의 무형문화재 지정 조사 의뢰서」에서 조차 축소시켜 송덕기가 보유한 택견 모습을 제한하였다.37)오장환, 1981 「택견 무형문화재 지정 조사의뢰서」 “쌈수 ①낙함 ②턱빼기 ③면치기(오광잽이) ④멱치기 ⑤항정치기 ⑥손따귀 ⑦주먹질 ⑧휘뚜루치기(마구치기) 등 결연택견의 쌈수가 있었으나 체육적 놀이로 가치가 없는 것같아 생락함.” 사료 발췌 고증. 근래의 사전적 의미와 달리 택견은 일반 명사로서 이용한 다툼․싸움의 의미가 있으며38)조성균․이재돈․남도희, 2010 「문헌에 보이는 전통무예 택견의 역사성과 정체성(1910-1958년을 중심으로)」『한국체육철학회지』 18권 3호, 41쪽 고증. 송덕기는 구한 말, 주로 중인(中人)들이 택견을 하였던 것을 지금으로 ‘깡패’들이 한 것이라 증언한 것을 본다면 옛법의 모습은 택견의 전체적인 무예 형태를 제공하고 또한 수박(手搏)의 형태를 미루어 볼 수 있는 단서가 될 것이라 판단한다. 송덕기 제자들의 전수과정에서 옛법을 보았을 때, 도기현과 고용우의 차이로는 도기현이 보유한 옛법의 형태에 대해 고용우는 알고 있었고 그 전수과정 또한 비슷하였다. 하지만, 고용우는 도기현이 모르는 많은 옛법의 형태를 알고 있었는데, 이것은 전수과정 중 질문의 여부(與否)와 전수했던 시기와 나이 그리고 전수기간에 따른 것으로 볼 수 있었다. 또한 보유하는 기술에 대한 견해는 택견이라는 것에 대해 놀이나 스포츠로서 비중과 무예기법에 대한 가치관의 차이가 있었다. 송덕기가 보유하고 알려준 옛법은 활개짓과 발질(발길질)에서 사용되는 기술들의 응용 기술이지만, 기술에 따라 세부 명칭과 방법들이 있는 것으로 알 수 있었고, 송덕기가 옛법 사용을 자제한 점과 고용우, 도기현의 전수과정으로 보아 옛법은 단순히 상대를 절명케 하는 기술이 아닌, 견주기에 금지되는 기술들로 구분하기 위해 지칭된 명칭으로 볼 수 있다.

4. 송덕기의 택견 형태 및 전수내용의 의의

송덕기가 보유한 택견의 형태를 살펴보았을 때, 현재 전수단체들이 보급하는 동작과 차이가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현대로 택견의 맥을 이어준 송덕기의 직계제자들과 달리 신한승이 정리하고 생성한 택견 형태를 유지하거나 송덕기, 신한승의 형태에서 벗어나 체육 종목을 지향하는 형태로 변화되어 보급되고 있다. 이들은 주로 다리를 사용하며 활개짓을 정형화하여 강제적으로 움직이거나, 다른 해석으로 품밟기를 거꾸로 밟으며 과장된 몸짓을 하고 있는데, 송덕기 직계제자들과 주변 인물들을 통해 본 택견의 형태는 다음과 같은 차이가 있었다.

이 장에서는 수련체계(복장, 기합, 예절)와 기술(품밟기, 활개짓, 발질, 옛법)로 정리 하였다. 송덕기가 전수를 할 때, 품밟기, 활개짓, 발질(발길질), 옛법이라는 큰 개념 안에서 설명한 것을 알 수 있었고 또한 근대 무예체계와 비교하기 위하 복장, 기합, 예절로 정리하였다.

복장은 근대 무예에서 착용하는 도복과 같이 의미가 부여된 것이 아닌, 송덕기와 같이 흰색 적삼을 입고하였는데, 송덕기가 택견 활동을 하던 당시 일상복으로 제자들은 일상복으로 편안한 복장을 입거나 송덕기와 같이 한복을 입기도 하였다. 예절 역시 무예에서 강조하거나 특별한 규칙, 철학이 있는 것이 아닌, 사람으로 지켜야 할 예절이 필요하였기에 무예 체계로서 별다른 교육과 전수는 없는 것으로 알 수 있었다. 기합은 “익”에 강하게 소리를 내어 “크”는 자연스럽게 세어나 오는 기합의 형태를 볼 수 있었고 놀람의 표시로 발생된 것이 아닌, 힘을 쓰기 위해 소리를 넣거나 상대에게 가볍게 신호를 주는 형태로 때에 따라 다르게 사용하는 것을 확인 할 수 있었다.

품밟기는 엉덩이와 허리를 크게 움직이고 품의 형태를 거꾸로 밟는 모습은 찾아 볼 수가 없었다. 품밟기는 한 족장의 범위에서 항상 움직이는 것을 원칙으로 설명을 하였고 굼실 또는 굼슬르는 형태로 무게 중심의 이동에 따른 굴신 동작을 취하였다. 활개짓 역시 정형되거나 일정하게 움직이지 않는 형태를 취하였고 발의 사용을 돕거나 활개로 상대를 어르거나 속이고, 쳐 밀어 공격을 하거나 기회를 만들어 기술을 풀어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발질(발길질)은 제자들이 전수를 하는데 있어 주 공격 부위와 범위에 다른 모습을 보였지만 송덕기가 알려준 기술의 설명과 내용은 같았고 상대방에게 주로 발바닥(발장심)이나 발의 앞장심을 이용하여 상대를 차는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

옛법은 택견의 기본 활개짓과 발질에서 변화되어 사용되는 기술로 기존 자료보다 많이 부분 존재하였는데, 송덕기가 전수한 옛법의 형태는 정형되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비슷한 형태의 기술이라도 사용부위나 공격방향에 따라 그 명칭과 사용방법이 존재한 것으로 확인 할 수 있었고 격투무예의 전반적인 기술을 모두 담고 있는 것으로 알 수 있었다. 또한 옛법은 놀이․경기에 사용되는 기술들과 구별하기 위해 지칭된 명칭임을 알 수 있었다. 이러한 택견의 형태를 봤을 때, 송덕기가 보유한 택견의 형태는 조선시대를 거쳐 구한말까지 전수된 온전한 택견의 모습으로 해석할 수 있고 격투기술을 기반으로 놀이․경기의 형태가 혼재된 옛 무예의 형태를 지닌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송덕기가 택견을 직계제자들에게 전수한 내용에서 수련체계와 기술에 대한 설명과 과정은 비슷하였지만, 기술의 수와 전수내용의 전수 시기와 방식에서 차이가 있는 것으로 알 수 있었고 그 차이는 다음과 같았다.

고용우는 송덕기에게 택견을 송덕기의 나이 70대 후반에서 80대에 걸쳐 전수를 받았는데, 도기현은 90대에 걸쳐 전수를 한 시기의 차이가 있었고 전수 방식 역시 차이가 있었다. 고용우는 송덕기에게 혼자 전수받아 택견의 기능을 강습(講習)의 형태로 전수를 받았고 도기현은 여러 제자들과 주로 견주기의 형태로 때때로 송덕기가 보여주고 말로 일러주는 식의 지도(指導)의 형태로 전수받은 차이가 있었다.

제자 간 전수방식의 차이는 있었지만, 공통적으로 전수받은 내용에 대해서는 사용 방법과 전수 내용의 흐름이 비슷한 것으로 알 수 있었다. 제자들이 전수받은 기술의 수가 다른 것을 알 수 있었는데, 이것은 전수 기간의 차이로 볼 수 있었다. 이러한 부분에 대해 고용우의 구술을 살펴보았을 때, 송덕기 주변 인물들이 구술하는 송덕기의 동작과 상당 부분 일치한 것으로 알 수 있었고 이와 같은 점으로 미루어 봤을 때, 고용우는 오랜 기간 전수를 받아 다양한 기술과 노하우를 전수받은 것으로 볼 수 있었다. 반면, 도기현은 견주기 시에 자주 사용되는 기술을 위주로 전수받으며 택견의 경기 형태를 전수받은 것으로 볼 수 있었다.

송덕기는 택견의 온전한 형태를 보유하고 직계제자들에게 전수한 것은 단순히 택견이라는 것이 아닌 우리민족의 옛 무예이며 문화유산인 온전한 형태와 정체성을 전하여 준 것으로 볼 수 있다.

IV. 결론

송덕기는 그의 제자였던 신한승과 함께 1983년 6월 1일 초대 택견 예능보유자가 되었다. 하지만, 송덕기가 보유한 택견에 대한 이해부족으로 문화재 지정과정에서 송덕기가 보유한 택견의 온전한 형태와는 다른 모습으로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이 되었다. 1987년 송덕기와 신한승의 타계 이후 이들에게 택견을 익히던 제자들은 각자의 단체를 설립하고 발전을 모색하여 독자적으로 발전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택견에 대해 서로 차별화된 해석으로 송덕기가 전수한 택견 원형의 형태와 전수내용이 이질화되는 문제를 가져오게 되었고 송덕기에 대한 이해 부족과 자료 조사의 부족으로 기록상의 문제도 가지고 있었다.

송덕기에게만 배우던 직계제자들은 송덕기 타계 이후 거의 활동이 없었지만, 1991년을 기점으로 도기현을 중심으로 하는 서울택견계승회가 활동을 시작하였고 송덕기가 보유했던 택견의 형태가 다시 재조명이 되었다. 그리고 2002년 김정윤의 저서로 송덕기의 제자인 고용우와 국가전수장학생 이준서가 알려지게 되었다.

송덕기의 제자가 얼마 없다는 기존의 사실과 달리 1970년대 전후(前後)로 제자를 꾸준히 양성해 왔는데, 이 중 송덕기에게만 택견을 전수받고 국내에서 활발한 활동을 한 도기현에 의해 송덕기가 보유한 택견 기법과 형태가 유지가 되어왔으며 고용우는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국내에서는 접할 수가 없었다. 또한 박철희와 김병수는 송덕기와 가깝게 관계를 맺으며 무예인의 관점에서 송덕기의 동작과 원리를 지켜봐왔고 송덕기의 직계제자인 고용우와 도기현은 서로 다른 환경과 수련 기간을 가지고 전수 활동을 한 것을 알 수 있었다.

이 연구에서는 송덕기가 전수한 택견의 전수과정과 내용에 대하여 수련체계와 기술로 나누어 정리하였는데, 송덕기는 세부 기술 명칭이 일관되지 않았지만, 품밟기, 활개짓, 발질(발길질), 옛법이라는 큰 개념 안에서 설명한 것을 알 수가 있었다. 그리고 근대화된 무도체계와 비교해 다른 점을 보기 위해 복장, 기합, 예절과 같은 항목을 두어 정리하였다.

이러한 점으로 봤을 때, 송덕기의 생애와 활동 그리고 제자들 및 주변 인물들에게 전수한 택견 원형의 형태 및 전수내용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송덕기의 생애는 한국의 무예사․체육사적으로 다양한 활동을 남긴 것을 알 수 있었다. 1893년 1월 19일에 출생하여 1987년 7월 22일(실제 타계일 고증 반영)에 생을 마감하기까지 단순히 택견의 형태만을 보유한 인물이 아닌 국궁, 근대체육, 축구로 한국 무예사․체육사에 다양한 활동을 한 인물이었다. 또한 기존의 알려진 것보다 임호에게 더욱 오랜 기간 동안 택견을 전수받으며 택견의 온전한 형태를 보유하게 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둘째, 현재 택견단체들이 보급하는 택견 형태와 송덕기의 택견 형태에는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택견 단체들이 보급하는 택견 형태의 차이로는 예절과 복장은 특정한 의미가 부여된 것이 아닌, 자연스럽게 지니고 있는 것으로 알 수 있었고, 기합은 놀람의 표시로 발생된 것이 아닌, 힘을 쓰기 위해 소리를 넣거나 상대에게 가볍게 신호를 주는 형태로 때에 따라 다르게 사용하는 것을 확인 할 수 있었다. 품밟기는 품을 거꾸로 밟으며 과장된 몸짓을 하는 것이 아닌, 발을 움직여 중심을 이동하는데 기본으로 품(品)자의 형태를 취하고 발의 간격으로 한 족장을 두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었다. 활개짓은 정형되어 강제적으로 움직이며 미적인 형태를 취하는 것이 아닌, 팔의 전체적인 사용 방법으로 독자적으로 사용도 하며 발질의 사용을 돕고 균형을 잡는 역할을 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발질은 걸어넘기는 사용은 같지만 밀어 차는 것이 아닌, 발장심을 이용해서 주로 차는 것을 알 수 있다. 옛법은 상대를 절명케 하는 특수한 기술이 아닌, 상대에게 큰 상해를 가할 수 기술 전반으로 일반 기술들과 구분하기 위해 지칭된 것을 알 수 있었고 활개짓과 발질의 형태에서 사용 부위와 힘의 방향, 공격지점을 바꾸는 것만으로도 달라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직계제자들과 주변인물을 통해 본 송덕기가 보유한 택견은 격투기술을 기반으로 놀이․경기의 형태가 혼재된 옛 무예의 형태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셋째, 송덕기가 택견을 전수한 내용의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송덕기의 제자들이 전수받은 내용 중에 공통적으로 전수받은 기술의 내용과 설명은 대부분 일치하였지만, 전수 방식에 차이가 있을 알 수 있었다. 그 차이로는 송덕기가 전수한 시기와 연령에 따른 차이와 제자간의 전수 기간의 차이도 있었다. 고용우의 구술은 송덕기 주변 인물들이 구술하는 송덕기의 동작과 상당 부분 일치한 것으로 보아 송덕기로부터 강습(講習)의 형태로 오랜 기간 전수를 받아 다양한 기술들을 전수받고 노하우를 지닌 것으로 볼 수 있었고 도기현은 견주기 위주로 지도(指導)를 받아 주로 사용되는 기술과 택견의 경기방식을 배운 것으로 알 수 있었다. 송덕기가 직계제자들에게 전수한 택견의 다양한 기술들 중에는 명칭이 일정하지 않고 정형화되지도 않는 부분도 있었지만, 그 원리는 명확한 것을 볼 수 있었다.

앞으로 송덕기의 활동을 토대로 한 직계제자들과 주변 인물들이 전수 받은 택견의 형태가 좀 더 심층적으로 연구되고 정리될 필요가 있겠다. 각자의 발전만을 위해 점차 이질화되어 가는 택견계의 문제해결에 있어 송덕기를 통한 택견의 정체성 복원이 무엇보다 중요함을 알아야 하겠다.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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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기타

  • 국립영화제작소, 1984 『택견[비디오녹화자료]』 서울: 국립영화제작소

ABSTRACT

Song Duk-ki’s Lifetime, Compositions and
Instruction Contents in Taekkyeon History

Kong Hyun-uk
Dept. of Physical Education / Graduate School of Yong In University

Song Duk-ki, who possessed Taekkyeon in its original form during the time of the late Chosun Dynasty and the Korean Empire, was born in 1893 and learned Taekkyeon first from his big brother and later on Im-Ho of SaJikGol who was famous for Taekkyeon. Song, while being passed down Taekkyeon from Im-Ho for a long period of time also practiced Korean traditional archery(Kuk-Gung) in HwangHakJeong, taught modern physical education in the military and was also active as a soccer player.

Song, together with his pupil Shin Han-Seung, was nominated as the first Taekkyeon arts holder on June 1st 1983. During the process of designating Taekkyeon as a cultural asset however, due to a lack of understanding as to the original form Song possessed, Taekkyeon was designated as an important intangible cultural heritage asset in a different form. In 1987, after the demise of Song and Shin the pupils who had been passed down Taekkyeon each set up their own associations and seeking growth developed independently. This brought the problem of the original form of Taekkyeon handed down by Song being distorted by the differentiated interpretations, and also a problem on the records due to the lack of research as well as on the understanding of Song.

These problems were able to be solved through the insight provided by Song’s acquaintances and direct pupils on his life and activities. Organized below is the original form of Taekkyeon handed down to his pupils, the process of the handing down and the contents.

Firstly, Song had been active in Korea’s martial arts and physical education scene leaving various activities during his life time and for a long period of time received the handing down of Taekkyeon from Im-Ho who renown for Taekkyeon enabling him to possess Taekkyeon in its original form.

Secondly, there is a difference between the moves employed by current organizations and Song. Song possessed Taekkyeon in as the form of former martial arts where the coexistence of the form of martial arts and the form of matches(sports) and games was clear.

Thirdly, the methods in which Song’s pupils were instructed differed from a form of instruction based on KyeonJuKi(a form of weighing, or measuring, one’s skills against another) to a form of instruction based on the passing down of skills and techniques. The moves of Taekkyeon are not in a set form and nor are their names. However, the principles of use and forms of skills are distinct. If the form of Taekkyeon passed down to Song’s pupils were to be further researched and organized, the differentiation problem and identity in Taekkyeon could be solved as Song Duk-ki’s activities during his lifetime.

Keywords: Taekkyeon, Song Duk-ki, Taekkyeon History, Oral History
Student Number: 2011-02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