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사학위논문
송덕기의 생애와 택견 형태 및 전수내용
Song Duk-ki's Lifetime, Compositions and Instruction Contents in Taekkyeon History
용인대학교 대학원 체육학과
공 현 욱
2012년 12월
지도교수 김 주 연
국문초록
송덕기는 제자인 신한승과 함께 1983년 6월 1일 초대 택견 예능보유자가 되었다. 하지만, 송덕기가 보유한 택견의 형태에 대한 이해부족으로 문화재 지정과정에서 송덕기가 보유한 온전한 형태와는 다른 모습으로 중요무형문화재 지정이 되었다. 1987년 송덕기와 신한승의 타계 이후, 택견 단체들이 설립되었지만 서로 경쟁하며 차별화된 형태를 취하게 되면서 송덕기가 전수한 택견의 원형과 달라지는 문제를 가져오게 되었는데, 이는 송덕기의 생애와 택견 형태 및 전수내용에 대한 자료 부족으로부터 발생한 것이다.
첫째, 송덕기의 생애는 한국의 무예사·체육사적으로 다양한 활동을 남긴 것을 알 수 있었다. 송덕기는 1893년 1월 19일 사직골에서 출생하여 황학정에서 활을 쏘고 군대에서 근대체육을 가르치며 축구선수로도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또한 기존의 알려진 것보다 임호에게 더욱 오랜 기간 동안 택견을 전수를 받으며 택견의 온전한 형태를 보유하게 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둘째, 현재 택견단체들이 보급하는 택견 형태와 송덕기의 택견 형태에는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택견 단체들이 보급하는 택견의 형태는 주로 다리를 사용하며 활개짓을 정형화하여 강제적으로 움직이거나 다른 해석으로 품밟기를 거꾸로 밟으며 과장된 몸짓을 하고 있다. 하지만 직계제자들과 주변 인물들에게 전수한 내용을 볼 때, 송덕기가 보유한 택견의 형태는 격투기술을 기반으로 놀이·경기의 형태가 혼재된 고유한 옛 무예의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
셋째, 송덕기가 택견을 전수한 내용에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수련체계(복장, 기합, 예절)와 기술(품밟기, 활개짓, 발질, 옛법)의 전수한 내용의 설명은 비슷하였지만, 기술의 수와 내용의 전수 방식에는 차이가 있었다. 전수 방식으로 기술의 강습과 견주기(경기)의 지도에 따른 전수 내용에 차이가 있었으며, 직계제자들 사이에도 전수를 받았던 시기와 기간에 따라서 차이를 보였다.
주요어: 택견, 송덕기, 택견사, 구술사
I. 서론
1. 연구의 필요성
문화유산은 그 민족의 자존(自存)이며 자존(自尊)이다. 문화재청에 따르면 “중요무형문화재는 연극, 음악, 무용, 공예기술 등 무형의 문화적 소산으로서 역사적·예술적 또는 학술적 가치가 큰 무형문화재 중에서 중요한 것”이라는 정의가 되어 있다.[1] 전통문화의 정체성은 고유한 특징을 지키며 문화로서 그 민족과 국가의 정체성을 확립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통문화는 국가에서 인멸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문화재보호법으로 지방무형문화재와 중요무형문화재 지정을 통해 전통문화를 보존해 왔다. 여러 무형문화재 중 '종묘 및 종묘제례악(2001), 판소리(2003), 강릉단오제(2005), 강강술래(2009), 남사당(2009), 영산재(2009), 제주 칠머리당영등굿(2009), 처용무(2009), 가곡(2010), 대목장(2010), 매사냥(2010, 다국적 유산), 줄타기(2011), 한산모시짜기(2011)'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2]으로 선정이 되었다.[3]
특히, 최근에 세계무술 가운데 최초로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된 택견은 1983년 6월 1일 문화재청으로부터 중요무형문화재 지정을 받았다. 그로부터 약 28년 만에 전 세계 모두가 아는 쿵푸를 제치고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에서 기존 제례행사나 전통놀이와는 다르게 택견이라는 무예가 등재된 것은 분명히 의미가 다른 것이라 할 수 있으며, 택견계를 비롯한 구성원들과 대한민국의 체육, 무예인들에게는 희망적인 사건일 것이다.
과거 택견이 언제 발생해서 전승됐는가에 대해서는 명확하지 않지만, 문헌을 통해 추정할 뿐이다.[4] 택견은 관한 기록은 조선 시대부터 나타나는데 22대 임금인 정조 시대에 『재물보(才物譜)』[5]에서 ‘탁견’이라는 명칭으로 기록하고 있다. 1895년 Stewart Culin은 HTAIK-KYEN-HA-KI[6]로 택견에 대해 언급을 하였는데 이 내용에 대해서는 의견이 서로 달라[7] 주목해 볼 필요가 있을 것으로 사료된다. 안확의 『조선무사영웅전』 유술(柔術)편[8]에서는 씨름과 소이한 택견이 있다는 기록이 있으며, 『조선어사전』[9]에서 ‘탁견’이라는 명칭이 아니라 ‘택견’으로 기술하고 있다. 1921년 최영년의 『海東竹紙』[10]에서는 ‘탁견’이라는 명칭과 모습에 관해 기술하고 있다. 리선유(1933)의 『오가전집』[11]에서는 ‘착견’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으며, 문세영(1952)의 『우리말 사전』[12]에서는 ‘태껸택견, 결련택견, 옛법택견, Taekkyeon’이라 다루고 있다. 조선시대의 기록에는 자세한 택견의 동작이나 기술을 서술한 자료가 부족한 실정이다. 조선시대에 택견을 표현하는 대표적인 사진이나 그림으로는 1836년 혜산 유숙(劉淑) ‘대쾌도(大快圖)’와 연대 작가 미상으로 외국인 선교사가 찍은 ‘애기 택견’ 사진이 있는데, 이 자료에서 택견의 모습과 형태는 보이지만 기술적인 모습을 확인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조선시대 이후, 택견의 기록과 모습이 공식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1958년 경무대에서 실시된 ‘이승만대통령 탄신기념 무도대회’에서의 시범이다. 이곳에서 택견 전승자 송덕기는 예전에 함께 택견을 배운 김성한(金成漢)과 중구 소공동에 있던 유도중앙도장에서 택견 시범을 보였다. 이후, 1964년 5월 16일 자 한국일보에 「속인간문화재(續人間文化財)-택견: 宋德基」라는 기사에서 예용해[13]는 송덕기와 같이 택견을 세상에 소개하였고, 1970년 신한승을 만나 그에게 5년간 택견을 가르쳤다.[14]
1973년 문화재위원으로 있던 예용해는 「무형문화재 조사보고서 제102호」[15]에서 송덕기의 택견 기술과 보유현황을 조사·제출하였으나 기술이 적다는 이유로 반려되었다. 그 뒤 1981년 오장환은 「택견 무형문화재 지정 조사 의뢰서」를 제출하였고, 당시 문화재위원이었던 임동권(1982)은 「무형문화재 조사보고서 제146호」를 작성하여 1983년 ‘중요무형문화재 제76호’로 지정받게 되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택견 원형에 관한 문제는 항상 제기되어 왔다. 이 문제는 택견이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을 받는 1983년부터 꾸준히 발생하여 왔는데, 문화재 지정과정에서 온전하게 택견의 형태를 보유한 송덕기의 택견 동작과는 다른 형태로 문화재 지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송덕기의 기술을 조사하여 담은 당시의 문화재 위원들의 보고서를 비교해 본 결과, 1973년 예용해의 「무형문화재 조사보고서 제102호」의 송덕기 택견 기술은 11개라고 기술(記述)한 것에 반해, 1981년 오장환의 「택견 무형문화재 지정 조사 의뢰서」는 기존의 자료와 다르게 분량이 늘어 있었다. 또한 송덕기와의 갈등이 표출 되었던 ‘활개짓’은 오장환의 보고서에 따르면 “김홍식 옹의 활개짓, 품밟기 및 몇 가지의 발질을 보았으나 전모가 확실하지 않고…”라고 기술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화재 지정 이후, 1983년 이보형의 「택견 무형문화재 전수실태 조사」에서는 신한승이 17세에 활개짓을 배우고, 다시 47세가 되어 1974년 김홍식에게 배웠다고 기술하고 있는 것은 확실하지 않은 내용을 문화재 지정 의뢰 보고서에 작성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기술(技術) 조사 내용에 있어서도 예용해, 오장환, 임동권, 이보형의 경우 같은 내용이지만 기술(技術)의 내용과 명칭이 조금씩 변화해 가는 것을 확인 할 수가 있다.[16] 그 보다 빠른 시기인 1971년 대한태권도협회의 「살아있는 태껸택견, 결련택견, 옛법택견, Taekkyeon인 송덕기 옹」『태권도』 제3호에 기술 14개만 제시되어 있음을 통해서도 기존의 기술 조사가 미약하였음을 알게 되고,[17]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 택견의 형태가 송덕기의 택견 형태와는 다르게 지정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상의 내용으로 볼 때, 기존에 실시된 조사와 기록에 문제점이 있었고 송덕기가 보유한 체계와 다른 형식으로 택견이 문화재로 지정된 후, 택견의 전승자들은 택견 원형에 대한 서로의 이견과 차별화된 해석 그리고 단체 간의 이익과 개인적인 감정에 의해 각자의 길을 걷게 되었음을 알게 된다.[18] 이렇게 시작된 단체 간 경쟁은 양적, 질적 성장이 가속화되어 수련 인구와 인지도의 증가를 가져왔지만, 택견을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와 계속되는 경기규칙의 변화, 수련체계의 개정으로 차별화된 발전을 꾀하는 상황으로까지 진행되었다.[19] 이러한 양상은 경기의 발전과 방향에도 영향을 미쳤는데 초기 택견 단체 간에도 서로 다른 경기 규칙을 가지고 있었으며,[20] 이 경기규칙에 따라서 단체마다 추구하는 바가 달라 변질되고 있는 실정이다.[21] 그리고 이후 택견 원형의 진정성을 둘러싸고 법정 소송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는 사태가 발생하였다.[22] 대한체육회의 권고사항[23]에 의하여 2007년 택견은 통합을 원칙으로 정식 가맹되었지만, 통합이 이루어지지 않아 그 문제는 계속적으로 대두되고 있다.[24]
이러한 경향은 택견의 고질적인 문제이다. 그리고 이 문제는 구한말 이후, 인멸의 위기에서 택견의 기능을 보유한 송덕기에 대한 이해부족에서 시작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즉, 수많은 택견인(人)들에 의해 택견 원형에 대해 지적과 논란이 있었고 통합을 위해 많은 노력을 진행하였지만, 전수단체 간의 합의점을 찾기 어려운 것은 택견의 원형을 보유한 송덕기에게 주목하지 않았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송덕기와 함께 초대 인간문화재였던 신한승[25]이 문화재 지정에 기여한 공(公)도 크지만 지금과 같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볼 때, 그 원인은 송덕기가 보유한 택견의 형태에 대해 이해가 부족하였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일제 강점기 이후, 인멸의 위기에 놓여있던 택견이 다시 세상에 드러나고 지금과 같은 모습을 갖출 수 있는 것은 초대 예능보유자였던 송덕기라는 인물이 택견의 온전한 형태를 지녔기 때문에 가능하였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위와 같은 택견의 문제점 해결을 위해 기존의 연구들은 문화재 지정 과정에서 송덕기가 전수했던 형태로부터 변화된 점을 인식하지 않고, 송덕기가 보유한 형태에서 변화되어 정형한 자료를 기반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것이 사실이다.
송덕기에 대한 연구가 존재하지만, 기존의 도서와 연구마다 제시하는 시기, 기술의 명칭과 기술체계가 다르게 제시된 점도 확인할 수가 있다. 또한, 제자마다 이야기의 차이가 조금씩 있어[26] 기초자료의 부족과 검증의 부재라 판단하였다. 따라서 이 연구는 택견의 순수성을 몸에 고스란히 지니고 있는 송덕기의 생애와 택견기술 등의 전수내용을 구술사 연구방법을 통해 생존해 있는 송덕기의 직계 제자들 및 주변 인물들을 대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2. 연구의 과제
이 연구는 다음과 같이 송덕기의 생애와 택견 형태 및 전수내용에 대하여 고찰하였다. 일제 강점기 이후, 인멸의 위기에서 택견이 근대에 다시 시작되었던 사실로 미루어 보아 송덕기는 택견사(史)를 비롯하여 한국의 무예사·체육사(武藝史·體育史)에 있어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현재, 송덕기는 생존하고 있지 않지만, 송덕기에게 직접 택견을 배운 제자들이 있으며 주변 인물들이 생존해 있기에 이들을 통해 이 연구를 진행하였다. 이 연구의 과제는 세 가지이다.
- 첫째, 송덕기의 생애에 대한 고찰
- 둘째, 송덕기가 보유한 택견의 형태에 대한 고찰
- 셋째, 송덕기의 택견 전수내용에 대한 고찰
3. 연구방법
이 연구는 구술사를 주된 연구방법으로 사용하였다.[27] 송덕기의 택견 활동에 대해 알아보고자 생전에 그와 함께 활동하고 송덕기에게 직접 택견을 전수받은 제자 및 주변 인물들을 대상으로 삼았다. 구술사를 연구방법으로 선택한 가장 큰 이유는 송덕기에 관한 자료의 부족을 해결하기 위함이다. 기존의 단편적인 자료나 다른 연구물에 있는 인물도감 정도의 자료가 전부이고 제자들에 의한 인터뷰 기록이나 제자들의 증언이 있기는 하지만 서로의 증언조차 조금씩 차이가 있고 정확한 연대에 대해서도 단체 및 연구결과에 차이가 있는 점으로 볼 때 신뢰성의 문제가 있다고 여겨진다. 송덕기의 생애와 택견형태 및 전수내용에 대해 자세하게 모색하기 위해 이 연구는 구술사를 연구방법으로 선택하였다. 또한, 구술자료의 신빙성 및 신뢰성을 뒷받침하기 위해 송덕기에 관련된 문헌 자료, 기존의 택견 사건들을 다루는 각종 연구물, 개인문서 등 자료들은 당시 상황을 비추어 보는 사실 확인 도구로 사용하였다.
1) 구술사
이 연구에서 주로 사용할 연구방법은 구술사(口述史, Oral History)이다. 구술사는 과거의 기억을 회상한 것을 주된 재료로 사용한다. 집단적 기억이나 사회적 기억을 통한 증언이 역사로 기록되는 것으로서, ‘구술’ 혹은 ‘증언’이라고 하기도 한다.[28] 구술사는 구술자의 기억에 따라 정확성, 주관성의 한계를 드러낸다는 관점도 있지만, 근현대사 연구에서 구술사는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구술사는 주로 문제에 대해 직접 참여하여 역사를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을 이점(利點)으로 들 수 있다. 또한, 문헌사료만으로 확인할 수 없는 사실에 대해 검증이 가능하며 기존의 문헌사료에 대한 분석, 알려지지 않은 문헌사료와 사진자료의 공개 및 발굴을 촉진 시킨다는 점을 들 수가 있다.[29]
구술사는 구술자와 면담자간에 질문과 답변을 통해 구술자의 경험에 대한 설명을 구술로써 이끌어내고, 수집된 구술자료는 증언으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게 된다. 이 연구는 증언으로 수집된 구술자료를 녹취 작업을 거쳐, 관련 부분에 직접 삽입하여 인용하는 방식을 택하였고 인용문의 신뢰도를 위해 구술자의 증언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이런 측면에서 송덕기에게만 택견을 전수받은 제자들을 중심으로 면담을 진행할 필요성이 요구되었다. 송덕기의 택견 기술과 그 전수과정에 대해 제자들을 통하여 보는 것은 송덕기에 대한 기존 자료의 사실 확인과 주목받지 못했던 사실들에 대해 재조명을 하여 새로운 문제 제시와 기존에 가진 문제점을 일정 부분 해소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현재 송덕기에 대한 기록은 매우 미약하게 기존자료들은 설명하고 있는데 이러한 부분을 보충하여 기존의 택견 역사나 관련 자료에 추가하여 택견 역사 전체의 흐름을 연결 짓고 파악하는데 일정부분 역할을 할 것으로 보인다.
2) 예상 질문지 작성
선정된 구술자들에 대해 예상 질문지가 필요하였는데, 제자마다 송덕기에게 다른 시기와 연령대의 차이를 두고 전수받은 점을 미루어 볼 때, 전수 과정에 개인의 경험과 서로 다른 것을 느끼고 정리할 수 있기 때문에 각기 다른 예상 질문지를 작성하였다. 전수 내용에 대한 것들은 공동 질문지를 사용하였는데 이는 전수 내용을 비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미리 준비하고 계획된 예상 질문지 외에 구술자들의 답변에 연관된 각 기 다른 추가 질문을 통해 더욱 상세히 구술자들의 구술을 담을 수 있는 구체적인 질문들로 연결되었다. <표 1>은 이 연구에서 사용된 구술자료 수집을 위한 예상 질문지의 일부이다.
<표 1> 구술자 면담 예상 질문지 (일부)
| 구술자: | ○○○ |
| 구술일시: | 2011년 8월 5일 13:00-16:40 |
| 구술장소: |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
| (8) | 중학 시절 어떻게 송덕기 선생님을 만나게 된 것입니까? |
| (9) | 그 당시 택견에 흥미를 느끼셨습니까? |
| ⋮ | (중략) |
| (16) | 송덕기 선생님과 경회루에서 사진 촬영은 언제, 어떻게 촬영하게 된 것입니까? |
| (17) | 그 당시 촬영을 했던 동작들은 어떠한 기술들입니까? |
3) 구술자료 수집
구술자료 수집을 위해서는 송덕기의 생존기간 동안 택견을 직접 전수받은 제자와 밀접한 주변 인물들을 통해 진행하였으며 연구자는 구술자들의 일정과 맞춰 2011년 11월·12월, 2012년 6월·7월·8월·9월·12월에 면담을 진행하였으며 <표 2>와 같다. 택견 관련 서적과 연구물 그리고 인터넷 검색을 통해 택견과 송덕기에 관련된 자료를 조사 후 선정을 하였다. 구술자 선정은 송덕기와 밀접하게 관련이 있는 인물과 직접 전수 받은 제자들을 선정하였는데, 택견 전승자 중 송덕기와 신한승 두 명에게 택견을 전수받은 제자들은 제외하였다. 구술자 면담 일정은 택견인들과 인터넷에서 얻을 수 있는 전화번호 및 이메일과 같은 연락처를 통해 연락 후 면담 내용과 일정을 알리고 시간 조정을 한 후 면담을 가질 수 있었다. 구술자들 중에는 미국에서 활동하기 때문에 사전 연락과정이 필요하였는데 때에 따라서는 인터넷 화상 채팅[30]을 이용하여 면담을 진행하기도 하였다.
<표 2> 구술자 면담 현황
| 순번 | 구술자 | 전수 또는 접촉기간 | 거주지 | 무예활동 | 면담시간 |
|---|---|---|---|---|---|
| 1 | 박철희 | 1958 ~ 1961 | 한국 | 태권도원로 | 7시간 |
| 2 | 김병수 | 1961 | 미국 | 태권도원로 자연류 창시 |
5시간 20분 |
| 3 | 고용우 | 1969 ~ 1977 1983 ~ 1985 |
미국 | 현암위대태껸택견, 결련택견, 옛법택견, Taekkyeon | 7시간 |
| 4 | 도기현 | 1982 ~ 1985 | 한국 | 결련택견협회 | 5시간 |
4) 녹취문 작업
구술자료 수집을 한 뒤에는 녹취 및 녹화 자료를 문서로 만드는 작업을 하였다. 녹취문을 작업하는 것은 녹음과 녹화된 구술자료를 가지고 작성하는데 녹음·녹화 시간 당 6시간에서 9시간을 필요로 하였다. 그 이유는 구술자들의 구술자료에서 상황에 따른 행동이나 표정까지 고려하며 작업을 하였는데 구술 중 구술자의 심리적인 변화까지 고려되었으며 방언·문법·맞춤법 등에 수정하지 않고 소리 나는 그대로 작업을 한 뒤 작성된 녹취문은 최소 1회 이상 검독작업을 수행하기 때문이다.[31] <표 3>은 이 연구에서 사용한 녹취문의 일부이다.
<표 3> 구술자 면담 녹취문 (일부)
| 구술자: | ○○○ |
| 구술일시: | 2011년 11월 29일 17:30-21:30 |
| 구술장소: | 서울특별시 강남구 □□□의 자택(안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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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담자) 그 아까…. 태권도 쪽에서도 오셨다고 하셨는데 그 이전에는 고등학교 때 배운다고 가셨을 때, 그때는… 그런 일들이 없었습니까? 태권도 쪽 에서나… (구술자) 그때 전혀.... 없었어요.. 아!! 임창수 선생님!!! 임창수 선생님이 그때 그... 태권도협회 계실땐데 왔다갔다 했어요. (화색이 돌며) 그때 인제 아마 태권도협회 계실땐데, 태권도형(形)이나 그런게 다 일본말로 되어있었잖아. 그러니까 그걸 한번 싹- 바꿨다구~!! 그러면서 택견을 뭐 칼잽이나 이런거 (동작을 보이며) 품새로 바뀌고 이런게 그런데서 (송덕기 할아버지의 택견기술에서) 아마 나왔을 겁니다. 품이나 품새라는 말이. 아마 거기서 나왔을 거에요. 그 사람들이 어떻게 이야기 할지는 모르지만 그때 그 당시 임창수 선생님 왔다 갔다 할 때, (택견 명칭을 따서) 품새가 나오고 칼잽이가 나오고 접목됐다고 내가 얘기를 들었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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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헌 고찰
이 연구에서 문헌 자료는 송덕기와 택견에 관한 국내 도서와 잡지를 수집하고 택견과 관련된 초기 태권도의 서적, 논문, 잡지, 신문, 사진 등을 통해 근거로 사용할 수 있는 자료를 사용하였으며, 구술자료 수집 중 확보할 수 있는 편지, 사진 등 당시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에 대해서는 검토 과정을 거쳐 사용하였다. 택견의 관련 출판물은 주로 1990~2004년 사이 집중적으로 출판되었는데 대다수는 초대 예능보유자 신한승이 정리한 무형문화재에 지정된 자료를 바탕으로 출판된 것들이 많아 제약이 있었다. 그래서 확보된 자료들은 택견 이외의 태권도, 유도, 합기도 등 무도 관련 서적, 논문, 신문, 잡지 등 많이 자료들을 확보하여 당시 한국 근현대사, 문화와 비교하며 종합적으로 고찰하였다. 또한 구술자들이 소장하고 있는 자료들 중 참고할 수 있는 것들은 검토 과정을 거쳐 연구에 사용하였다.
4. 연구의 절차
일제 강점기에 택견이 사멸되지 않고 현재까지 이어지는 것이 가능하도록 택견의 원형을 보유한 송덕기의 생애와 송덕기가 보유한 택견형태 및 전수내용을 살펴보고자, 송덕기에게만 택견을 전수받은 제자와 송덕기와 관계가 깊은 인물들의 구술자료와 관련된 문헌을 사용하였다. 이러한 방식을 통해 연구의 절차는 각 장별 주요점을 서술하였다.
Ⅰ장에서는 송덕기를 통한 택견의 전수과정과 택견의 내용에 대한 중요성을 연구의 필요성에 부합할 수 있도록 살펴보았다.
Ⅱ장에서는 초대 예능보유자의 송덕기의 생애와 그에 관한 기록들, 제자들에 대해 살펴보았다. 일제 강점기 이후 사라질 수 있었던 택견을 보유하고 전수한 송덕기의 생애와 그의 제자들과 주변 인물들에 대하여 다루었다. 송덕기의 생애와 배경을 통해 전수과정과 연관 지어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Ⅲ장에서는 송덕기가 제자들에게 전수한 택견의 기술을 살펴보고 그 속에 나타나는 전수과정과 기술의 원리와 형태를 살펴보았다. 현재 택견단체 마다 다른 수련체계와 원리, 경기방식을 사용하고 있지만 그 모체는 송덕기가 전수한 택견을 설명하고 있는 점이다. 그래서 송덕기가 전수한 택견 기술의 원리와 전수내용을 살펴보고 택견의 원형을 보유한 송덕기가 전수한 택견형태를 제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Ⅳ장에서는 결론으로 위의 각 장들의 내용을 요약하여 정리하였다.
5. 선행연구 검토
이 연구는 송덕기의 생애와 택견형태 및 전수내용을 살펴보았다. 택견이 무형문화재를 넘어 세계 유네스코 인류문화 유산으로까지 등재되었지만, 택견의 전수과정에서 후대에 논란이 많은 점을 본다면 그 필요성을 찾을 수 있다. 송덕기를 언급하고 있는 내용들은 그의 택견 활동들만을 비추어 보았을 때, 그에 관한 연구가 미비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박종관(1983)은 『傳統武藝 택견』에서 송덕기의 택견 기술을 정리하여 저술하였고 간단한 기술의 명칭이 풀이되어 있지만, 이후 출간된 택견 저서들과 명칭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다. 하지만, 책 머리말과 초입 부분은 송덕기의 증언으로 수록되어 의미가 있다.
박범남(1999)은 「송덕기 택견 수련체계 및 특성」에서 택견이 신한승에 의해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으나 신한승의 자의적인 해석이나 외래무예의 혼용에 대해 검증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송덕기의 택견 문화를 잃었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하지만 이 연구에서 수련체계 및 특성만 언급하였고 송덕기 개인에 대한 사실만 나열하였을 뿐이며, 수련체계는 초기 서울택견계승회(現 결련택견협회)의 수련체계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재고해 볼 필요가 있다.
김이수·허일웅(2002)은 「현암 송덕기와 택견에 관한 연구」에서 송덕기는 무예사적으로 큰 의미가 있는 인물이며 앞으로 많은 연구의 필요성에 대해 언급하였다.
김정윤(2002)은 저서 『태견. 위대편』과 『태견. 아래대편』에서 송덕기의 기술을 설명 없이 사진과 명칭만 나열하여 저술하였는데 송덕기의 택견 동작을 그대로 담고 있다는 것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자료의 한풀과 유사성 확인을 위해 김정윤의 저서들[32]을 종합하여 살펴보고 『태견. 위대편』과 『태견. 아래대편』의 내용 중 연속 동작들에 대해 동영상 작업[33]을 통해 동작의 모습들을 살펴보았다.
도기현(2003)은 그의 저서 『택견 그리고 나의 스승 송덕기 : 택견의 젊은 고수 도기현이 쓴 우리 전통무예 택견과 스승 송덕기 옹의 이야기』에서 도기현이 송덕기에게 택견을 전수받은 과정을 에피소드 별로 구성되었는데, 그의 주관적 경험에 초점을 두고 기술하였다. 송덕기의 생애에 대해서도 살펴 볼 수 있다.
김정윤(2006)의 다른 저서 『태견 : 원전 제작 비화』의 내용은 2002년 출간된 『태견. 위대편』과 『태견. 아래대편』에 대하여 김정윤의 설명으로 제작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택견에 관련된 부분 외에도 다른 내용이 많이 기술되어 있어 검증 작업을 통해 확인이 필요하였다. 그리고 현재 송덕기가 타계한 지 오랜 시일이 지난 상태여서 확인할 수 없고 후에 저술된 저서들은 본인들의 당위성만을 주장하고 있다. 따라서 이 연구에서는 송덕기의 주변인물과 직계제자들 증언을 바탕으로 사실을 명확히 확인하고자 진행하였다.
이용복(2007)의 저서 『바람이 불어도 가야한다』에는 송덕기에 대한 언급은 있지만, 초입 부분에만 등장하고 있으며 이용복 개인의 관점에서 수필 형식으로 저술하였다.
위와 같은 선행 연구를 통해 송덕기의 생애 및 택견기술과 그 전수내용을 확인했을 때, 송덕기의 생애와 택견형태 및 전수내용에 대한 부분은 이미 알려진 사실에 대해 반복적으로 나열한 자료 외에는 찾을 수 없었다. 송덕기가 보유한 택견기술에 대하여 박종관(1982)의 저서가 있지만, 이후 출간된 택견 저서들과 기술 명칭의 차이가 있으며, 도기현(2003)의 저서는 송덕기의 생애의 단면과 전수내용과 과정을 볼 수 있지만, 기존의 택견 저서에서 풀이하는 송덕기의 생애 연대(年代)와 차이가 있다. 김정윤(2006)의 저서 중 『태견 : 원전 제작 비화』는 기존의 자료와 매우 다르고 택견의 내용이라고 하기에는 어려운 부분이 많아 검증의 어려움이 있다. 그리고 현재 송덕기가 타계한 지 오랜 시일이 지난 상태여서 확인할 수 없고 후에 저술된 저서들은 본인들의 당위성만을 주장하고 있다. 따라서 이 연구에서는 송덕기의 주변인물과 직계제자들 증언을 바탕으로 사실을 명확히 확인하고자 진행하였다.
-------->>각주
[1] 문화재청 홈페이지(http://www.cha.go.kr/korea/heritage/knowledge/notion_01.jsp?mc=NS_04_02_01) 2012년 4월 8일 검색.
[2]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은 1997년 제29차 총회에서 산업화와 지구화 과정에서 급격하게 사라지는 무형문화유산을 보호하고자 '인류 구전 및 무형유산 걸작 제도'를 채택했다(유네스코세계유산, http://www.unesco.or.kr/heritage/ich/index.asp), 2012년 4월 8일 검색.
[3] 국가에서는 전통문화가 인멸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문화재보호법으로 무형문화재 지정을 통해 전통문화를 보존해 왔다. 여러 무형문화재 중 종묘 및 종묘제례악(2001), 판소리(2003), 강릉단오제(2005), 강강술래(2009), 남사당(2009), 영산재(2009), 제주 칠머리당영등굿(2009), 처용무(2009), 가곡(2010), 대목장(2010), 매사냥(2010, 다국적유산), 줄타기(2011), 한산모시짜기(2011)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선정이 되었다(유네스코세계유산, http://www.unesco.or.kr/heritage/ich/list.asp) 2012년 4월 8일 검색.
[4] 이병익·임희용·이재학, 1998 「택견의 변천과정에 관한 연구」『무도연구소지』 9권 1호, 210쪽에서 “택견에 대한 문헌적 기록은 조선말 시조에 등장하고 있는데, 이 이전의 택견에 대한 문헌상의 기록은 없으며, 조선시대 전기에서 후기로 이어지는 택견의 역사적 공백은 택견의 원류를 찾는데 있어 상당한 논란의 소지가 있다. 따라서 택견의 역사적 기원을 살펴보기 위해 수박과 택견의 역사적 연관성을 찾지 못한다면 택견은 조선말부터 시작된 무예일수 밖에 없다고 생각되어진다.”라고 해석을 하고 있다. 이 연구에서는 수박의 연관성에 대하여는 제한을 두었다.
[5] 이만영, 1675 『才物譜』 기희조(技戱條)에는 「卞 手搏爲卞 角力爲武 若今之탁견」 “수박을 변(卞)이라고 각력(角力)을 무(武)라 하니 지금의 탁견 같다고 하였으며, 수박조(手搏條)에서는 수박은 지금의 수벽과 같다.”라고 말하고 있다.
[6] Stewart Culin, 1895 Korean Games: With Notes on the Corresponding Games of China and Japan, Philadelphia: University of Pennsylvania, p.38
[7] 위의 자료를 토대로 대한택견협회(現대한택견연맹)의 이용복은 ‘대접’이라 하는 규칙을 적용하였는데, 한 발을 상대가 공격할 수 있는 거리로 내어 주어 거리를 가깝게 하는 방식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송덕기 측근에서 배웠다고 알려진 제자들은 “단 한 번도 그런 방법을 듣지 못 하였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논란이 되고 있다. 그 논란은 대한택견연맹의 커뮤니티 사이트인 택견코리아의 게시판(http://www.taekkyonkorea.com/bbs/boardpub/dir.php?wh=free)에도 ‘택견하기’로 검색을 했을 때 나오는 수 많은 논란이 있으며 이것에 대한 논란은 결련택견협회의 홈페이지 게시판과 택견배틀 홈페이지 게시판(http://www.tkbattle.com/bbs/zboard.php?id=free)에도 논란이 되었다.
[8] 안자산, 1919 『朝鮮武士英雄傳』 유술(柔術)편 “유술은 수박(手搏) 권법(拳法) 권박(拳搏) 각저 상박(相撲)이라고도 한다. 씨름은 오직 육박(肉搏)으로써 각투에 불과한 것이고, 유술은 인체 근육의 혈맥을 쳐서 죽이기도 하고 어지럽게도 하며 벙어리가 되게도 하는 삼법이 있어 학술적으로 되어진 것이다… 근래에는 청년들이 씨름보다 소이(小異)한 박희를 행함이 있던바, 소위 택견이라 하는 것이 그 종류다.”
[9] 조선총독부, 1920 『朝鮮語辭典』
[10] 최영년, 1925 『海東竹紙』 “각술이라는 옛 풍속이 있는데, 서로 마주 보고 차서 넘어뜨리는 것이다. 세 가지 법이 있다. 가장 낮은 것은 상대방 다리를 차고, 잘하는 사람은 어깨를 차고, 높이 차는 자는 상투를 찬다. 이것으로 원수를 갚기도 하고, 돈내기나 여자를 빼앗기도 하였다. 관에서 금하여 지금은 없어졌다. 이를 일러 탁견이라 한다.”
[11] 리선유, 1933 『五歌全集』 박타령에서는 “곱사등이 뒤집어 노코 앉진방이 착견하고 배알넌놈 몽둥이질”라는 대목이 나온다.
[12] 문세영, 1952 『우리말 사전』 한 발로 서로 상대방의 다리를 차서 넘어뜨리는 경기(각희脚戱).
[13] 예용해(1929~1995)는 전통문화의 연구·보존과 발전을 보람으로 산 언론인이다. 우리 고유의 문화와 인간문화재에 깊은 관심과 애정을 품고 문화재전문위원을 지내며 많은 조사 보고서와 『예용해 전집(대)』을 남겼다.
[14] 정경화, 2002 『택견원론』 87쪽. 송덕기로부터 5년간 전수를 받았지만 신한승이 1973년 충주에 택견 전수관을 운영한 것으로 보아 집중적인 전수기간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15] 예용해, 1973 「무형문화재 조사보고서 제102호」 이 보고서에 4.송덕기 조사자료 (1) 택견의 열 한가지 기본수에는 ①깎음다리②안짱걸이③안우걸이④낚시걸이⑤명치기⑥곁치기⑦발따귀⑧발등걸이⑨무르팍치기⑩내복장갈기기⑪칼재비로 기술되어 있다.
[16] 기존 보고서에서 존재하지 않지만 이보형, 1983 「택견 무형문화재 전수실태 조사」에서 장대걸이, 촛대걸이, 줄띠지르기는 이전 보고서(예용해, 오장환, 임동권)에는 존재하지 않는 기술들이다. 이 기술들은 박종관, 1983 『傳統武藝 택견』에 정확히 소개되고 있고 송덕기의 초대 제자들로 구성되었던 서울택견계승회 수련표에 존재하는 명칭이다.
[17] 대한태권도협회, 1971 「살아있는 태껸택견, 결련택견, 옛법택견, Taekkyeon인 송덕기 옹」『태권도』 제3호, 12쪽에는 “첫 째 서로 맞서서 대련을 준비하는 자세는 『품』(品)이라고 하며 품이 움직이면 『굼실』이라고 한다. 계속 움직일 때는 『굼실 굼실』. 『안짱다리』 상대의 발을 안으로 딴지 거는 것. 『박장다리』 밖으로 딴지. 『낚시걸이』 내발목을 꼬부려서 상대 뒤발목을 걸어 넘기는 것. 『무릎걸이』 유도 술어에 배대치기. 『발등거리』 발등으로 차기. 『곧은 발질』 곧은 발차기. 『곁치기』 안으로 옆차기. 『두발 당상』 두발뛰어차기. 『날 치기』 손집고 몸돌려 땅재주 넘어가며 발로 상대 얼굴 차기. 『칼 잽이』 아금손으로 상대 목 치기. 『이마 재기』 상대 이마를 장칼바닥으로 치기. 『낙함』 턱빼기. 장칼 바닥으로 상대턱을 치는 것. 『턱 걸이』 장칼 바닥으로 상대턱을 치며 미는 것. 『깍금 다리』 상대 정강이 후려까기.”로 품(品)과 움직임을 표현한 굼실을 뺀 나머지는 14개이다. 하지만 이 자료 역시 박종관, 1983 『傳統武藝 택견』에 비교하면 송덕기 기술대한 이전의 조사가 얼마나 이해가 없었는지 확인할 수 있다. 이 책에는 기본자세 및 준비 9개, 손기술 26개, 발기술 31개로 기록하였고, 저자 박종관은 송덕기와의 대담과 사진자료를 통해 이 저서에서 송덕기 택견을 소개하였다.
[18] 오지웅, 2011 「택견의 현대화 과정에 나타난 갈등구조 연구」 용인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47~53쪽.
[19] 정재성, 2003 「택견의 전통성 문제」『한국체육철학회지』 11권 2호, 165~166쪽에서 “이들의 사후에 남겨진 전승자들은 자신들의 입지와 처지에서 스스로의 부족함을 스승들의 덕과 위업으로 포장하기 위해 양보와 타협 없이 갈등하기 시작했다. 그 과정이 상호의 택견 운용원리에 대한 비방과 견제였고, 결국 택견 계보상의 존재를 부정하기까지 이르렀다.”라고 그 당시 상황을 말하고 있다.
[20] 최종삼·장경태, 2002 「택견 경기규칙 변천에 관한 고찰」『대한무도학회지』 7권 4호, 116쪽에서 “송덕기, 신한승 사후(1987)에 일어난 각 계파 간 갈등이 심화 되었다. 그리하여 3기인 1991년부터는 대한택견협회, 한국전통택견회, 결련택견계승회가 각기 다른 경기규칙을 적용하여 경기를 진행하고 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21] 최종삼·이병익·한창효·장경태, 2002 「택견의 경기규칙 특징에 따른 통합에 대한 논의」『무도연구소지』 13권 1호, 227쪽.
[22] 이승수, 2009 「무예 원형의 제도화: 택견을 중심으로」『체육사학회지』14권 3호, 116쪽에서 이 문제에 대해 서론으로 제시를 하였고 “대한체육회 가맹을 앞두고 대한택견협회에 대해 각 택견협회들은 서명 운동과 법정소송, 지도자 삭발식, 대규모 집회를 계획하였다(「택견인들 집회 열어 강력 항의」『충청매일』 2005년 1월 17일).” 이것과는 다른 문제로 한국전통택견협회와 택견원형보존회간에 문제를 다루고 있다(「택견인들 법정비화 조짐 기사」『충청투데이』2005년 2월 17일).
[23] 정가맹 이전에 대한체육회에서 권고사항에 대한 내용은 이렇게 표현이 되어 있다. “대한체육회는 이번 택견문제를 계기로 대한택견협회는 준가맹 승인당시의 승인조건 이행실적을 지속적으로 이행하는 의미에서 명칭변경, 원형보존, 집행부 임원배분, 경기규정 등 세부제안 내용을 6개월 이내에 충실히 이행한다는 것과 문화재청의 권고사항 등 택견단체의 요구사항을 최대한 수용하여 2005년 8월 2일까지 정관개정 및 재규정을 제정하는 것으로 유도했다. 또 대한체육회는 대한택견협회 및 택견단체는 정가맹 승인권한이 대한체육회 제21차 이사회(05.02.02)에 상정된 정가맹 승인추진은 일단 유보키로 결정했다는 이행각서를 각 단체에 제시했다(「못 말리는 택견, 대한체육회 중재 나서」『MOOKAS뉴스』2005년 2월 1일).”
[24] 택견대통합 행사를 2007년 4월 3일에 서울 올림픽 공원 역도경기장에서 진행을 했다(「택견, 대중화를 위한 출발선을 끊다」『MOOKAS뉴스』2007년 4월 3일). 하지만 유네스코 지정 이후 나온 기사는 다음과 같다. “유네스코의 요구처럼 택견은 국가지정 문화재로서 예능보유자를 중심으로 전승·보급·발전을 이뤄왔고, 현재 50여명의 공식 이수자가 있는 한국택견협회가 택견의 전승·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지만 택견의 스포츠화를 추구하는 대한택견연맹과는 경기 방식에서 현격한 차이를 보이며 지속적인 논란이 되고 있다. 이 같은 문제는 택견이 문화재청과 문화체육관광부 등 정부부처의 이원화 체제로 관리되면서 발생되는 택견단체의 난립과 갈등이 해소되지 않고 오히려 더 커지고 있다는 데 있다. 택견의 주무부서는 문화재청으로 택견의 법인단체 설립허가가 문화재청 소관이지만 상위부처인 문광부에서 체육단체 법인 설립을 허가하면서 복수의 택견단체 설립이 인정된 이후 계속 택견의 분화가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현행법체계상 문제는 국민체육진흥법에 의한 택견의 존재이다. 문화재보호법과 전통무예진흥법상 택견은 세계유산보호 관련 국제협약에 부응하지만 국민체육진흥법상 택견의 존재는 국제협약에 부합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택견 단체 난립도 문제지만 국가정책 안에서 일원화되지 못한 것은 무분별한 개발 등으로 세계유산의 문화재가 훼손되는 경우로 국제협약 상 치명적인 약점이 되기 때문이다. 또 무술 부분에 유네스코 자문기구인 세계무술연맹의 본부를 한국의 충주에 두고 있다는 점에서 택견의 무분별한 개발과 단체난립으로 제대로 보호되지 못할 경우 세계무형유산인 충주 택견의 훼손은 물론 자칫 지정 취소라는 최악의 상황을 맞을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세계무술연맹 본부를 둔 충주의 가치가 없어지고 국가신뢰도 추락 등도 우려된다. 이 같은 사태를 막기 위해서는 먼저 택견의 유네스코 무형유산 등재를 계기로 택견인들이 정체성 논란을 지속하기 보다는 하나 된 택견을 위한 희생과 자구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이와 함께 정부가 나서 법과 제도 개선을 추진해 정책실행 주체의 일원화를 선행해야 한다는 지적이다(「세계유산, 택견통합 정부가 나서야」『충청타임즈』2011년 12월 6일).” 이 같은 문제는 여전히 댓글을 통해 누리꾼들로부터 화재거리이다.
[25] 신한승(辛漢承, 1928~1987) 서울 하왕십리에서 태어난 신한승은 유년시절 경기도 연천군 삭녕면의 천석꾼 부자인 작은 할아버지 신재영의 집에서 처음 택견과 접하였다. 신재영의 사랑방엔 항상 무인들이 몇 명씩 묵으며 택견을 보여주곤 했는데 대부분 한량이어서 집안 어른들은 신한승이 택견 흉내 내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1949년 경희대 전신인 신흥대학 체육학과 레슬링 전공 1기생이며 1956년 멜버른 올림픽 국가 대표 최종 선발전에서 국가대표의 꿈을 이루지 못하였다. 1957년 충주 한림중학교 체육교사를 하다 1년 만에 그만두고 서울 아세아극장에서 기도(木戸:きど) 일을 했다. 1970년 송덕기의 기사를 보고 서울로 가서 5년간 택견을 익혔다. 또 74년 박털백의 전수자인 이경천과 박무경의 전수자인 김홍식에게 활개짓 활용법과 낚시걸이 등의 수를 배웠다고 한다. 생계가 어려워질 정도로 택견연구에 힘을 쏟았고 1981년 11월 문화재 지정조사를 의뢰하였다. 1983년 6월 1일 문화재를 지정받는데 큰 공로를 세우고 1986년 대장암 수술을 받고 또 다른 전통무술인 수벽치기를 복원하기 위해 노력을 했다. 1987년 7월 2일 충주 의료원에서 생애를 마감했다.
[26] 택견계의 전수자들의 대부분은 신한승에게 전수받은 제자들이 주를 이룬다. 송덕기, 신한승 양 쪽으로 전수받거나 신한승의 제자들을 지칭한다.
[27] 이 연구의 구술사 연구방법의 형식 및 절차는 김주연, 2007 「태권도의 미국진출과 미국체육회 가입」 서울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 논문, 7쪽~13쪽을 참고하였다.
[28] 정혜경, 2005 「구술사, 개념적 이해」『구술사: 방법과 사례』, 18쪽.
[29] 정혜경, 2005 「구술사, 개념적 이해」『구술사: 방법과 사례』, 40쪽.
[30] 대표적으로 www.skype.com이 있다.
[31] 정혜경, 2005「기획에서 활용까지」『구술사: 방법과 사례』, 140~147쪽.
[32] 김정윤, 1962 『合氣術』, 김정윤, 1965 『氣道』, 김정윤, 1974 『삼각권』, 김정윤, 1988 『날주먹울.본,본때』, 김정윤, 1988 『한풀:본때』, 김정윤, 1989 『빌랑대(본)』, 김정윤, 1989 『빌랑대(본때)』, 김정윤, 2004 『팔뚝썰』, 김정윤, 2004 『날주박』, 김정윤, 2004 『다리수』, 김정윤, 2004 『빌랑대:한풀울수』, 김정윤, 2006 『꺾과시』, 김정윤, 2006 『뿔주박』, 김정윤, 2006 『솜주박』, 김정윤, 2006 『치살』, 김정윤, 2006 『한풀 뿔주막:울수』을 종합하여 봤을 때, 김정윤이 송덕기를 만나기 이전과 만난 이후 명칭이 다른 것을 확인 할 수 있었으며 동작 또한 추가 된 것으로 확인 할 수 있었다.
[33] 나열된 사진들을 스톱 모션(Stop Motion) 작업 방식처럼 초당 10프레임으로 촬영된 사진을 영상으로 복원하는 작업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