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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대태껸협회 이사 강태경 (cgtktk@gmail.com)
임호(태껸)는 송덕기의 스승이자 태껸의 당대 최고의 명인이다. 임호(태껸)에 대한 구술은 거의 대부분이 송덕기로부터 유래한다. 경복궁 서쪽 마을인 필운동에 살았으며 왕이 따로 자신의 호위를 부탁한 ‘팔장사’의 으뜸으로서 고종과 왕실의 호위를 맡고 정보원 같은 역할을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태껸의 구체적 기예와 임호의 일화들을 고려할 때, 그는 고도로 훈련된 무인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또다른 별명으로 인왕산 호위랑이라 불렸다 한다. 이에 더해 그는 한학자였고, 얼굴이 잘생기고 인물이 좋고 힘도 장사였으며, 무예 실력이 뛰어나고 몸이 날래며 사람들을 이끌고 다녔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항상 두루마기를 입었다고 한다.
임호(태껸)의 가장 명확한 인적관계로 우선 송덕기를 포함한 임호(태껸)의 제자들이 있다. 박종관 저, 『전통무술 택견』에는 제자들 명단이 등장한다.[2]
이렇게 10명의 이름과 물음표 1개가 명시되어있다. 물음표는 이름이 기억이 나지 않거나, 송덕기가 모르는 제자들이 더 있을 수 있다는 뜻일 수도 있다. 제자들에 대한 추적과 분석은 추후에 별도의 글로 다룰 내용이므로 여기서는 상세히 다루지 않겠다. 하지만 여기서 언급된 동문들 중에 특정될 수 있는 이들이 있음을 언급하고 넘어가겠다.
첫째는 송덕기다. 송덕기에 대해서는 많이 알려졌으니 그가 동문에 대하여 언급한 점만 짚고 넘어가겠다. 송덕기는 말년에 도서출판사 밝터와의 인터뷰에서 김영덕, 이귀돌, 김성환을 언급한다. '이귀돌과 김영덕은 좀 오래 살 줄 알았는데 술을 많이 먹어서 일찍 죽었다고' 회고한다. 또한 송덕기 본인이 '용돈 식으로 (생활을) 지원했다'고 설명한다.[3] 즉, 송덕기와 이귀돌, 김영덕은 특히 가까웠으며 송덕기가 경제적으로 이들을 지원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승만 대통령에게 시범을 했던 이야기에서 '김성환이 태질을 좀 했다'면서 김성환도 '술을 많이 먹어서 몸이 안좋았는데 설렁탕을 날마다 먹여 몸을 보신시켜 그 힘으로 시범을 했다'고 회고한다.[4] 여기서도 송덕기가 동문을 챙기는 모습이 드러난다. 상대적으로 연구가 집중되어있던 송덕기는 우선 간략하게 다루고, 그 외의 동문들에 집중하여 서술하겠다.
둘째, 김영덕이다. ‘김영덕’은 흔한 이름이라 특정이 쉽지 않으나, 용정의 교육자 임호(용정)가 활동했던 지역과 시기가 겹치면서, 체육 관련 활동을 하는 김영덕(金永德)이라는 인물이 있어서 그 사람으로 추정해볼 수 있다. 그 김영덕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1925년 간도국자가청년회의 운동부 의원에 김영덕이 있다.[5] 1928년 전간도축구회 설비부장을 하였으며[6], 1928년 동만주청년총연맹 연길현연맹 집행위원이었다.[7] 또한 1928년 재동만조선노동동맹의 중앙집행위원에 김영덕이 있다.[8] 이 기사에는 단체사진도 있어서, 희미하게나마 김영덕의 얼굴을 추적할 수 있는 실마리가 남아있다. 이 행사는 만주 용정에서 진행된 것이다.
[사진 1] 재동만조선노동동맹 중앙집행위원 일동 단체사진 (중앙일보 1928.09.16)
특기할 점은, 송덕기가 본인 다음으로 맨 위에 명시한 동문이 김영덕인데, 김영덕이 만주에서 기록이 확인되는 것으로 보아 임호(태껸)가 만약 임호(용정)와 동일인물이라면, 김영덕이 임호(용정)[9]를 따라 만주에 같이 가서 독립운동에 직접적으로 동참했기에 그 공을 인정한 것이라고 추정해볼 수도 있다. 특히 임호(용정)의 경우에는 김영덕이 활동하는 1928년 1월에 용정에서의 기록이 존재한다. 임호가 용정에서 열린 연변교원동맹에서 임시집행부의 의장으로 선출된 것이다.[10] 두 기사만 고려하여도 김영덕과 임호가 유사한 시기에 용정에서 활동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셋째, 이귀돌과 이태환이다. 이 둘은 함께 활동한 기록이 여러 번 있어서 함께 설명한다. 우선 이귀돌이란 이름으로 축구감독, 유도1단, 전국대회 수준의 유도선수, 씨름선수로서 활동한 기록들이 존재한다. 이태환과 함께 유도 대회와 씨름 대회에서 선수로 활동을 한 기록이 있어서 서로 특정할 수 있으며, 특히 이귀돌은 출전기록 중에서 아현동 사람이라고 표시되어있다.
우선 1925년 ‘맹호유년축구부’의 부장으로서 이귀돌이 등장한다. 송덕기가 1920년대 초반에 불교청년회 축구단 소속 축구선수였다는 점이 우선 연관성이 있다. 그리고 축구부의 이름에 호랑이를 사용했다는 것 역시 연관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1925년 임호(장충)가 장충청년회 활동을 시작하는 해이다. 장충청년회의 소년부에는 송덕기로 추정할 수 있는 ‘송성길’이라는 인물이 활동을 한다.
이귀돌은 유도와 씨름대회에서 선수로 활약한 기록이 있다. 우선 이귀돌과 이태환이 함께 출전하여, 이들을 특정하는데 도움이 된 기사부터 확인해보자. 1927년 10월 강무관 개설 5주년 기념 연무대회 7단체 연합 홍백유도전이 열렸다. 일종의 올스타전 같은 대회로 보인다. 이 대회에 기독청년단(YMCA) 소속 선수로 이귀돌이 출전하며, 같은 대회에 이태환은 조선무도관으로 출전한다.[11] 이귀돌과 이태환이 동시에 한 경기에 있다는 것은 송덕기 동문인 이귀돌과 이태환일 가능성을 높여준다. 이귀돌은 기독청년단에 있어서 (청)자, 이태환은 조선무도관 소속이라 (조)자가 붙어있다. 이 둘 다 상대적으로 대진의 후반부에 배치된 것으로 보아 10명 안쪽에 손꼽히는 실력자로서 대접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태환의 경우, 다른 기사에서 1인승으로 이름이 실리기도 한다.[12]
송덕기의 동문 명단에 이귀돌과 이태환이 순차적으로 나란히 있다는 것도 이들이 같은 경기를 뛴 것과도 절묘하게 연관성을 드러낸다. 이들은 유도대회 뿐만이 아니라 같은 해인 1927년 12월의 씨름대회에도 같이 출전한다. 여기서 이귀돌은 ‘아현’으로, 이태환은 ‘학생’으로 출전한다.[13] 이 대회는 “제1회 조선씨름대회”로, 공식적인 첫 전국 단위의 씨름대회였으며, 여기에 이귀돌과 이태환이 나란히 이름을 올린 것이다. 이귀돌은 대회에서 승리하여 4회전의 추첨 명단에까지 이름을 올린다.[14] 송덕기와 이귀돌, 이태환이 비슷한 나이라고 추정해본다면 이귀돌과 이태환은 30대 중반에 전조선씨름대회에 출전한 것으로 그들의 용력을 가늠해볼 수 있다. 이 대회에서는 번외로 ‘통씨름’을 했는데, 통씨름은 샅바에 구애받지 않고 벌이는 씨름이었다. 당시 씨름은 샅바를 매는 방법이 통일되지 않았기 때문에 샅바에 구애받지 않는 훨씬 더 자유로운 형태의 씨름도 널리 행해지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사진 2] 홍백유도전 승패결과 (동아일보 1927.10.13)
[그림 3] 홍백유도전 당일의 모습 (조선일보 1927.10.13)
여기서 아현동 대표 이귀돌이 송덕기의 동문임을 교차적으로 뒷받침하는 이야기가 더 있다. 고용우는 비록 이름을 전해듣지는 못했지만 송덕기가 자신과 친했던 같은 태껸 동문에 대해 설명한 적이 있다고 회고한다. 그 이야기로 말하자면 송덕기가 말하길 ‘아현동 사는 손이 솥뚜껑만한 친구가 있었는데, 그와 함께 종로에 나가면 해결하지 못할 일이 없었다’고 하였다 한다. 이 증언과 대조해보았을 때, 씨름และ 유도 선수이면서 아현동에 살았던 이귀돌이 바로 송덕기가 말한 그 친구에 해당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사진 4] 제1회 조선씨름대회 모습 (동아일보 1927.12.22)
이귀돌은 5년 후, 1932년 11월 중앙기독교청년회 유도부 승단자 명단에 오른다. 이귀돌은 초단에 승단한다. 같은 명단에 한국 유도의 중요 인물인 석진경이 2단 승단한다.[15] 위 기록들에 따르면 이귀돌은 YMCA 소속으로 유도를 하면서, 씨름도 전국적인 수준의 선수였다는 것인데, 이는 즉 이귀돌의 용력뿐만 아니라 그의 인맥 역시 상당했다고 볼 수 있다. 프로 축구선수출신인 송덕기와 종로를 주름잡던 YMCA 유도부, 전조선씨름대회 4회전까지 출전한 이귀돌의 인맥을 합치면 종로에서 많은 일을 해결하는데 부족함이 없는 인맥이었을 것이다.
이귀돌이 YMCA 소속으로 1920년대 후반부터 계속 운동을 해왔다는 것과, 전조선씨름대회에 출전했다는 점은 여러가지 연결고리를 만들어주는데, 특히 임호(분원)와 임호(뚝섬)과의 연결고리를 형성한다. 임호(분원)는 이후 상술하겠지만, 1908~1910년 동안 기독교 목사로 추정되는 김영제와 지달원과 함께 동행한다. 임호(분원)가 교사로 재직하는 분원학교의 설립자 지규식도 당시에 기독교인이었다. 임호(뚝섬)가 뚝섬 일대의 수해 방지를 위한 제방쌓기 운동의 활동이 시작하게 되는 시기는 1925년인데, 흥미롭게도 제1회 전조선씨름대회의 주요 입상자들이 뚝섬 출신들이다. 뚝섬은 아랫대에 포함되는 지역으로 아랫대 태껸이 있었던 곳이다. 게다가 김영제는 이 뚝섬 제방쌓기 운동에 참여하는 인물의 명단에도 이름이 등장한다.
YMCA 체육부는 설립과 함께 태껸과 인연이 깊은 곳인데, YMCA 체육부의 초기 체육간사를 맡은 이가 바로 전직 군인 출신이자 한 때 태껸을 했던 이필주 목사이다. 이필주 목사는 1870년생으로 임호보다 10살 이상 나이가 위인데, 이필주 목사는 1900년대 후반, 비밀결사 신민회 활동을 열성적으로 하였고, YMCA 체육부에서 체육을 가르칠 때, 학생으로서 체육부장이었던 사람이 경성피스톨이라는 별명을 가진 김상옥 열사이다. 이필주는 1920년대 중반에도 종종 YMCA에서 강연을 하면서 출입을 하고 있었다.
또한 YMCA 유도부의 주요 인물로 ‘김홍식’이 있다. 김홍식은 신한승이 무형문화재로 태껸을 등재시킬 때 다양한 도움을 준 인물로 태껸에 대해 본 적이 있고 일부 배운 바가 있지만 그 전모가 어떻게 되는지는 제대로 전해지지 않았었다. 사실 김홍식은 우리나라 유도의 핵심적인 원로로, YMCA 첫 유도사범 나수영의 수제자이다. 그는 유도인들을 조직하는 일에 힘써왔고 이귀돌이 초단을 따는 1932년 11월에 김홍식은 조선유도연합회의 부회장을 맡는다. 게다가 김홍식 역시 1890년대 생으로, 송덕기, 이귀돌과 또래이다. 따라서 1920년대 후반과 1930년대 초반에 유도계의 왕래 과정에서 YMCA유도부를 매개로 이귀돌과 김홍식이 접촉했을 가능성은 충분히 존재한다.
그리고 또한 흥미로운 연결고리는 권충일과의 관계이다. 권충일은 1928년 7월 인천무도관 창립 일주년 기념 무도대회에서 공개적으로 “택견”을 했던 사람으로 기록되어있다.[16] 그런데 권충일은 기본적으로 유도계에 몸담으면서 나중에는 수원에 무도관을 차리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또한 열성적인 사회주의자로서 노동운동과 청년운동, 학생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활동가이기도 하다. 그리고 일제강점기 말기에 변절했던 시기도 있다. 해방 후에 다시 좌익으로 활동하다가 한국전쟁이 터지고 죽임을 당한다. 권충일은 배재고보에서 유도와 검도를 배운 것으로 전해지며, 그가 협성신학교에 입학해서 목회자의 길을 가려 하였을 시기에 태껸을 배운 것으로 추정된다.[17] 권충일이 협성신학교를 다니는 시기는 YMCA 체육부에서 활동했던 시기이기도 하기 때문에 이귀돌과 직접적으로 연결되며, 이필주 역시도 협성신학교를 통해서 목회자가 된 경우로서 밀접한 연관이 있다. 또한 동시에 이 시기는 임호(장충)와 임호(뚝섬)가 활동하고 있는 시기와도 맞물린다. 권충일은 임호(장충)에 대해 서술할 때 보다 상술하기로 한다.
이태환은 이귀돌과 함께 유도와 씨름 시합을 출전한 기록이 있음을 위에서 확인하였다. 그리고 그 외에도 몇 번 더 대회에 참여한 기록이 남아있다. 이태환과 이귀돌이 복수의 횟수로 같은 대회에 참여하였으므로 임호 제자로서 동문인 이태환으로 특정할 수 있다. 이에 더해 이태환은 1929년 9월 조선씨름협회 주최, 조선체육회와 조선일보 후원으로 열린 씨름대회 학교대항 경기에서 중앙팀 소속으로 출전한다. 중앙vs협실 경기와 보성vs중앙 경기에서 둘 다 승리하여서, 그 때까지 왕성한 실력을 유지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18] 다만 이태환은 시합 출전 외에 추가적인 내용을 찾기는 어려웠다.
다섯째, 김성환은 송덕기가 해방 후 소공동에서 대통령에게 시범을 보이야 했을 때 송덕기와 함께 시범을 준비한 인물이다. 축구선수, 야구선수로 김성환이 있으며, 체육회에서 활동도 하였다. 이 과정에서 김성환은 ‘마춘식’이라는 당대의 유명 스포츠선수와 연결고리가 드러나는데, 마춘식은 흥미롭게도 송덕기가 축구선수생활을 할 당시에 같은 불교청년회 축구단의 주전 선수로 함께 뛴 사이였다. 즉, 송덕기, 김성환, 마춘식은 같은 팀으로서 선수생활을 하거나, 상대팀으로서 경쟁하는 사이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김성환이 YMCA를 통해 야구를 시작한 것으로 보이는 것도 흥미로운 점이다. 김성환이 태질을 좀 했다는 송덕기의 증언을 고려할 때 김성환 역시 체격과 힘이 좋았을 것으로 보인다. 야구라는 종목에서는 김성환도 전조선야구대회에 출전하였던 것으로 보아 그 역시 조선의 정상급 선수였음을 알 수 있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야구선수들의 네트워크에서 만나는 정영태, 마춘식과의 연결고리이다. 도기현은 칼럼 ‘[도기현의 택견이야기 열다섯] 궁중(宮중) 호위무사(護衛武士)의 '옛법택견’'에서 자신의 학교 선생님이었던 정영일과의 인터뷰를 토대로 칼럼을 썼다.[20] 정영일의 집안은 할아버지와 아버지 모두 태껸의 강자였고, 할아버지는 왕실을 호위하는 호위무사였다는 내용이다. 할아버지가 태껸을 하면서 왕실의 호위무사였다는 것은 임호(태껸)의 장안팔장사로서의 이력과 맞아떨어진다. 그리고 정영일의 아버지인 정로마(1900~1956)는 “동대문패 왕초”인 마춘식, 김정식과 함께 국내 최초의 야구시합을 뛰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정로마는 나라가 망한 뒤 만주로 가서 독립운동을 하였고, 독립군에게 태껸을 지도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궤적은 임호(무장)와 유사한 유형이다. 정영일은 일관되게 태껸을 한 이들은 소수였고, 무반들과 일부 한량을 중심으로 태껸을 했다고 하였으며, 이는 송덕기의 증언과 일치한다.
[사진 5] 근현대 유명 스포츠 장사 마춘식의 사진
마춘식, 김정식과 1922년에 같이 야구경기를 한 선수 중 정씨는 딱 한 명으로, 이름은 정영태이다. 비록 인터뷰에서는 정로마가 우리나라 최초의 야구경기를 했다고 하였지만, 우리나라 최초 야구경기가 1906년부터 확인되므로, 성년이 된 1920년대 초의 경기에서 등장하는 정영태가 정로마일 가능성이 배제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마춘식은 투수였고, 정영태는 포수이다. 이들은 “조선 야구계의 일류선수”로 평해진다.[21] 둘 다 배재고등학교 소속이고, 흥미롭게도 이는 1919~1926년에 배재고보를 다낸 권충일과 다시 연결된다. 정리하면 송덕기와 김성환은 같이 임호에게 태껸을 배운 사람이며, 송덕기와 마춘식은 1923년 같은 축구단의 축구선수였고, 정영태는 1922년에 마춘식과 같이 야구를 했으며, 김성환은 1920년대 계속해서 마춘식과 같은 팀으로 야구를 하거나 상대편으로서 야구를 했다. 정영태가 정로마가 맞다면 태평로에서 태껸을 했으니 송덕기와도 아는 사이였을 것이다. 그리고 정영태와 마춘식, 권충일은 같은 학교를 다녔다. 즉 이들은 서로를 다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참고로 마춘식은 1920년대를 뒤흔든 조선의 대표 야구선수이지만, 야구와 축구만 한 것이 아니다. 마춘식은 1929년 6월 전조선씨름대회 본부위원으로 이름을 올린다. 이 해 전조선 씨름대회의 심판위원에는 유도계의 주요 인사들인 한진희, 강낙원, 장권 등도 이름을 올린다.[22] 정영일이 마춘식을 ‘동대문패 왕초’라고 직접 표현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마춘식은 동대문 일대, 즉 훈련원을 중심으로 한 아랫대 지역에서의 특출난 신체적 능력을 가진 인물이었던 것은 분명해보인다. 마춘식은 비단 스포츠뿐만 아니라 독립운동과도 연관이 있는데, 1933년 9월 마춘식은 상해를 다녀오다가 일본 경찰에 의해 검거되어 수사를 받기도 한다.[23] 동대문 일대는 다시 임호(장충)과 지리적으로 연관이 생긴다. 임호(장충)의 자택이 1930년 당시 동대문 일대에 있었다고 한다.[24]
여섯째, 고재덕이다. 고재덕은 당대의 피리명인으로 엄청난 확장성과 유명세를 탔었다. 고재덕은 자신의 피리 제자들을 남겼고, 그 사람들을 포함 여러 인물들에게 음악으로 영향을 주었던 인물이다. 이들은 고재덕이 태껸의 명인이기도 하였으며 임호의 제자 중 으뜸이고 맏형이었음을 전해주었고, 일부는 기록으로 남았다. 지금도 유튜브에는 고재덕이 참여한 여러 음악들이 남아있다. 네이버 백과사전에서 고재덕을 검색하면, 수 많은 음악인들이 고재덕과 함께 음반을 내고 연주를 했다는 것 역시 확인될 수 있다. 고재덕은 민악과 정악을 넘나들며 자신만의 독특한 피리세계를 구축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국악계에서 이 정도로 큰 영향을 끼친 것에 비해 태껸인으로서 고재덕은 거의 제대로 주목 받지 못했던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다음은 고재덕의 사진이다. 각지고 다부진 얼굴에 뚜렷한 수염은 강력한 카리스마를 풍긴다.[25]
[사진 6] 피리 명인이자 임호의 수제자(맏형) 고재덕 노인의 사진 (국악음반박물관 소장)
고재덕은 1933, 1934년엔 엄청난 대스타여서 기사가 매우 많다. 1934년 기사가 제일 많은데, 100개가량 된다. 라디오에 고정출연을 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고재덕을 통해 흥미로운 사실이 또 확인된다. 1927년에 송덕기 역시 라디오에 출연하여 노래를 했던 것이었다. 송덕기는 ‘무녀유가’를 불렀으며, 최병식과 함께 부른 것으로 나온다.[28] 송덕기가 노래를 잘 하였다는 것을 암시한다. 고재덕과 무예까지 함께 익혔으니 유명 술집에서는 함께 어울려서 다니는 경우가 많았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여기서 상황에 일관성을 더해주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다. 송덕기의 외조카 허광철 씨의 증언이다. 허광철씨에 따르면, 삼촌(송덕기)이 도성 안에서 노래나 잡기를 잘하기로 유명해서 집에 온 손님들이 송덕기가 외출하려고 하면 한 곡 부르고 나가 달라고 종종 부탁했었다고 한다. 이 역시 송덕기가 갖고 있는 예인적 풍모를 보여준다.
여기에 더불어 고재덕과 관련된 신문기사 두 가지가 고려할 필요가 있다. 하나는 목포에서 유공파업이 발생했을 때 파견되는 인물로서 고재덕이 언급되는 기사이다. 여기서의 고재덕은 음악인이자 태껸인 고재덕의 본명과는 글자 하나가 한문이 다르다.[29] 하지만 고재덕에 대한 기록에서 그가 어릴 적에 다양한 노동을 했다는 점, 그리고 임호(장충)가 사회주의자로서 활동하면서 청년노동단체와 활동했다는 점, 임호(무장)가 김사국과 함께 활동하였는데, 김사국이 바로 청년 사회주의자들을 조직하는 걸출한 활동가였다는 점 등을 고려하면 아예 개연성이 없는 것도 아니다.
다음을 보면 더욱 흥미로운데, 고재덕이 신간회 경성지회 기념 행사에서 연주한 것이다.[30] 이 시기는 임호(장충)가 신간회 활동을 하면서 점차 여러 청년단체들을 하나의 큰 단체로 통합하면서 신간회 운동으로 결합하던 시기이다. 그런 신간회 활동에 직접적으로 고재덕이 연주까지 해주는 것은 임호(장충)와의 연결성을 충분히 고려할 수 있는 기록이다.
임호의 제자들 중 기록이 남아있고 특정이 가능한 인물들을 선별하여 그 사람들을 중심으로 서술하였다. 그 결과 송덕기가 박종관을 통해 남겼던 제자들의 명단 중 5인(송덕기, 김영덕, 이귀돌, 이태환, 김성환)은 체육과 관련된 활동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김영덕이 아직 확정적으로 추론하기 어려운 단계일 수는 있지만, 김영덕은 임호와 동선과 시기가 겹치면서 축구와 관련된 활동을 한다는 것이 매우 특기할 만 하다.
여기에 더불어 동문은 아니지만 태껸을 했다고 하는 정영태(정로마와 동일인물로 추정) 그리고 아래대 지역에 해당하는 왕십리 출신의 마춘식이라는 인물 역시도 눈여겨보아야 하는 인물이며, 이들 사이에 걸쳐있는 권충일이란 인물이 공개적으로 자신의 태껸을 선보인 선수였다는 점도 주목할만하다.
이들의 운동선수로서의 기량은 눈부시다. 송덕기가 당시의 국가대표급 경기인 경평전에 출전할 정도로 축구선수로서의 역량이 아주 뛰어났음은 이미 알려져 있는 일이었지만, 임호의 제자인 다른 동문들 역시 조선의 정상급 선수였다는 것은 주목할만하다. 이귀돌과 이태환은 유도와 씨름 두 종목 모두에서 국내 최정상급 선수들이 참여하는 대회에 복수로 출전하였다. 특히 이들이 제1회 조선씨름대회의 선수들이며, 이귀돌은 30대의 나이로 추정됨에도 불구하고 4차 예선을 통과했다. 김성환도 야구로서 올스타전에 출전하였으니 임호로부터 받은 태껸 훈련이 조선의 엘리트 무인을 양성하는 훈련에 해당했다는 것을 다시금 확인시켜준다. 흥미로운 것은 동문은 아니지만 정영태가 마춘식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포수-투수 관계로서, 활동했다는 것 역시 태껸을 했던 사람들이 장삼이사가 아니라 전문적인 신체단련을 했던 무인이었음을 확인시켜준다.
그리고 우리는 이들의 활동한 종목도 뚜렷한 일관성을 보이고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종목은 축구, 야구, 유도, 씨름이다. 송덕기, 김영덕, 이귀돌, 마춘식은 축구선수이거나 축구와 관련된 활동을 했다. 김성환, 마춘식, 정영태는 야구선수였다. 이귀돌, 이태환은 유도선수이고 씨름선수였으며, 특이하게도 마춘식은 축구, 야구, 씨름에서 모두 선수이거나 임원으로서 활동하였다. 이러한 분포경향은 조선시대 말기에 태껸이 가지고 있는 종목적 특성을 유추하는데 도움이 될 만한 근거가 된다.
마지막으로 고재덕은 태껸인들 무인들이 수 많은 예인과 연결되어있음을 상징적으로 드러내주는 인물이다. 다행이도 워낙 공개적이고 넓은 행보를 했던 인물로, 이제라도 본격적인 연구가 시작된다면 더욱 많은 이야기들을 찾아낼 수 있으리라 기대된다. 이것은 임호의 장인이 보인학교의 첫 교장이었다는 진술과 연결지어보면 더욱더 많은 힌트를 제공한다. 보인학교는 보인학회의 학교였는데, 보인학회 자체가 무인과 지사, 예인, 인력거꾼 등이 뭉쳐서 세운 근대 교육을 위한 조직였다. 즉 고재덕이 수 많은 예인들을 만남에 있어서 스승 임호의 영향이나 도움이 없지 않았음을 추정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이후 임호의 장인을 다루면서 상술하여보겠다.
[1] 공동 연구 및 제보 이메일 : cgtktk@gmail.com
[2] 보유자 송덕기, 정리자 박종관(1983), 『전통무술 택견』, 서림문화사, 22쪽.
[3]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택견(태견) 영상 중 '5. 당시 태견인들의 현황과 삶 이야기' (출처: https://m.blog.naver.com/taeghal/10176750109)
[4]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택견(태견) 영상 중 '6. 이승만 대통령에게 태견 시범 보인 이야기' (출처: https://m.blog.naver.com/taeghal/10176750109)
[5] 동아일보, 1925. 09. 16. '국자청년정총'
[6] 조선일보, 1928. 05. 04. '전간도축구회'
[7] 조선일보, 1928. 05. 03. '제일회위원회'
[8] 동아일보, 1928. 09. 16. '동만노맹신조직'
[9] 무장독립운동가 임호(무장)의 공훈록 기록을 보면 용정에서 교육자로서 김사국과 같이 활동하는 기록이 나온다. 즉 임호(무장)와 임호(용정)은 같은 인물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10] 조선일보, 1928. 01. 14. '간도일대 조선교육자로 연변교원동맹'
[11] 동아일보, 1927. 10. 13. '배재고보장상민군 기념연무에 특등'
[12] 조선일보, 1927. 10. 13. '성황리에 종료된 기념연무대회'
[13] 동아일보, 1927. 12. 22. '중앙기독교청년회 주최·본사후원 통씨름엔 삼명입선 제이일대진결정'
[14] 조선일보, 1927. 12. 23. '청년회 주최 씨름대회 개막'
[15] 동아일보, 1932. 11. 10. '중앙기청유도부 승급승단발표'
[16] 동아일보, 1928. 07. 03. '인천무도성황'
[17] 인천뉴스, 2018. 02. 12. '[연재] 인천 무도관 유도 사범 및 수원 무도관 설립자, 권충일', 이성진 저.
[18] 조선일보 1929. 09. 30. '씨름대회 대교경기 경신군 우승'
[19] 홍순일(2013), 『한국야구사연표』 및 네이버 옛날신문 검색 자료 참고.
[20] 도기현, '[도기현의 택견이야기 열다섯] 궁중(宮中) 호위무사(護衛武士)의 옛법택견' (출처: https://www.taekyun.org/posts/column/28)
[21] 동아일보, 1922. 10. 19. '박수에 싸힌 최후전'
[22] 동아일보, 1929. 06. 06. '구장마다 의기창일 번성한 운동시절'
[23] 조선일보, 1933. 09. 06. '전 배재 야구감독 마춘식씨 피검'
[24] 조선일보, 1930. 08. 23. '신간경동지회원 동대문서에 피착'
[25] 유튜브 국악음반박물관 hearkoreaTV (2021. 01. 25) 소장 녹음 자료 참고.
[26] 이자균(1992. 10), '유성기음반의 명인명창 열전 (1)', 『한국음반학』 2권, 한국고음반연구회, 411-419쪽.
[27] 이진원, '정창관의 국악음반세계' 해설 자료 참고.
[28] 조선일보, 1927. 03. 23. '라듸오 이십삼일 방송'
[29] 동아일보, 1926. 03. 04. '행상 대경파 목포유공파업단'
[30] 동아일보, 1928. 06. 14. '신간기념원유회 각종순서도 결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