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젝트 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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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젝트 임호

제2화 : 태껸택견, 결련택견, 옛법택견, Taekkyeon인 임호 (2) – 팔장사와 왕실의 무인들

윗대태껸협회 이사 강태경

참고: 임호의 인물묶음표

  1. 임호(태껸) : 태껸인이자 팔장사인 임호
  2. 임필호 : 남대문 전투에 참전했던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출신 참위 임필호(林弼鎬)
  3. 임호(분원) : 근대 학교인 분원학교의 교육자 임호(서울, 경기도 광주)
  4. 임가(육모) : 부산에서 육모술을 알려주고 만주로 간 서울 사람 임호
  5. 임호(무장) : 좌익 계열 무장독립운동가 임호(독립운동가 공훈록)
  6. 임호(용정) : 용정 일대의 학교에서 교사 활동을 했던 근대 학교의 교육자 임호
  7. 임영한 : 장작림과 오패부 사이를 이용하여 혼란을 초래한 인물 임영한(林泳漢)
  8. 임호(협박) : 이완용의 둘째아들 이항구에게 협박장을 보낸 임호
  9. 임호(장충) : 경성에서 <장충>과 <신간회> 활동을 했던 임호
  10. 임호(뚝섬) : 뚝섬에서 제방 쌓기 운동을 했던 임호
  11. 임호(소설) : 소설 <괴청년>의 주인공 임호

지난 제1화에서는 임호보다는 임호의 제자들을 중심으로 설명하였다.

제1화 <태껸인 임호 (1) : 임호와 그의 제자들> 링크 : https://taekkyeon.net/person/36727

서론: 들어가며

제2화에서는 태껸인 임호의 구체적 이력과 그에 입각한 주변 인물들을 추적하면서 다른 인물묶음과의 연관성을 추적해본다. 특히 임호(태껸)가 주변에 어떤 인물과 관계를 맺고 있었는가를 파악하는 데에 결정적인 도움을 준 단서는 바로 임호가 “장안팔장사”였고, 그 중 으뜸(혹은 우두머리)이었다는 것이다. 임호가 장안팔장사였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었으나, 이것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는데, “팔장사 두령”으로 활동했다고 회고하는 이수영의 인터뷰가 발굴됨으로써, 그 의미는 고종 및 왕실의 친위조직 역할을 하는 호위무사집단을 지칭하는 것임을 강하게 추정할 수 있게 되었다.

이수영 기사를 분석해보니, 등장하는 인사들은 대부분 대한제국 말기 고종과 왕실의 측근들이었다. 이수영을 천거한 상직현과 윤웅렬은 고종의 최측근으로 무위소와 별기군, 군대, 궁내부의 핵심 인물이었고, 이수영이 젊은 날 친분을 자랑한 이범진 역시 고종의 핵심 측근 종친이었다. 그런데 이들의 인간관계는 단순한 근왕파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독립협회, 신민회, 기독교, 그리고 이후 독립운동과 체육계 인사들과 연결되어있으며, 그 인간관계는 임호(무장), 임호(용정), 임호(분원)과 자연스러운 연결 흐름을 보여준다. 또한 상직현과 윤웅렬을 통해 태껸이 친위조직화 되고 있던 신식 군대(별기군)와 사복경찰(별순검)의 수련종목에 포함되었다는 점을 고려하였을 때, 최소한 임호로부터 배운 송덕기의 태껸은 통상적인 이해보다 훨씬 더 군대, 혹은 왕실의 개입이 컸던 무술일 가능성이 제기된다.

1. 미지의 영역이었던 '팔장사'

임호에 대한 가장 중요한 구체적인 이력은 그가 "장안팔장사" 중 한 명이었다는 것이다.[1] 고용우, 이준서의 회고에는 임호가 장안팔장사 중에서 으뜸(혹은 우두머리)이었다는 말도 함께 전해진다. 그렇다면 장안팔장사란 무엇인가? 우선 결론을 미리 말하면, 이 글에서는 고종 및 왕실의 호위무사집단으로 이해한다. 2010년대 까지도 태껸인들 사이에서는 이 장안팔장사라는 것의 실체에 대해서 명확한 규정이 따라오지 않았었다. 그래서 임호의 용력을 서술할 때 그가 서울 지역의 팔장사 중 하나가 될 정도로 서울에서 손꼽는 장사였다는 의미 정도의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심지어 고용우와 이준서에게도 장안팔장사가 직접적으로 왕이나 왕실의 호위를 의미하는 것이었다는 설명까지는 전해지지 않았다.

다만, 송덕기는 그들에게 ‘임금님이 암행을 나가실 때는 패검을 하여 호위하기가 어려우니 태껸을 잘하는 사람들이 임금님을 호위했었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태껸을 잘 했던 이들은 임금의 호위를 맡기도 했음을 전해주었다. 이는 임호가 팔장사를 했다는 것뿐만 아니라 태껸을 했던 무인들 중 임금을 호위하는 사람들이 다수 있었다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원이 확인되지 않은 이들에게 임금의 호위를 맡기진 않았을 것이므로, 무관들 중에서 태껸을 했던 이들이 있음을 교차확인할 수 있는 증언이기도 하다. 송덕기의 입장에서는 ‘팔장사’라는 단어가 가진 상징이 당시 사람들에게는 뚜렷하였기에 당시의 표현으로서는 ‘임호 선생님이 팔장사를 했다’라는 말이 ‘임호 선생님이 임금을 호위했다’라는 진술과 같은 의미라고 생각하고 특별히 설명을 더해줄 필요가 없었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겠다.

2. 새로운 계기, 팔장사 두령 이수영의 발굴

팔장사 두령 이수영 사진

[사진 1] 구한말 팔장사 두령 이수영의 사진

2018년 김영만·심성섭의 논문을 계기로 새로운 인식이 열렸다. 이 논문에서 또 다른 팔장사 이수영(李秀暎, 1860~?)이 발굴된 것이다.[2] 『별건곤』 제21호에 실려있는 ‘학보’라는 기자가 쓴 기사에는 이수영이 젊은 시절 활약했던 무용담과 함께 고종에게 직접 발탁되어 팔장사가 되었던 이야기가 실려있으며, 대중의 접근성을 위해 윗대태껸홈페이지 ‘프로젝트 임호’ 중 인물자료 편에 현대어로 번역한 버전이 올려져있다.(https://taekkyeon.net/person/36617)[3] 이후의 글은 위의 글을 다 읽고 나면 훨씬 이해하기 편하므로, 글을 읽고 오시는 것을 추천한다. 위 글에 따르면 장안팔장사는 고종이 자신의 호위를 위해 특별히 직접 따로 뽑은 호위무사였다. 이 기사의 이야기는 매우 구체적일 뿐만 아니라 당대의 매우 중요한 인물들이 언급되어있다. 거기에 덧붙여 이수영의 사진도 실려있으며, 70노인임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힘을 가질법한 체구임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간략히 소략하면, 위 이야기는 이수영이 본가에 가는 길에 1) 그 지역 길목의 산적들과 맞닥뜨려 싸웠던 무용담, 2) 본가 주변의 무뢰배들의 결투 신청을 받아 이수영이 이범진과 함께 그들을 소탕한 무용담, 3) 윗대와 아랫대의 편싸움에서 활약했던 이수영의 이야기, 그리고 4) 길거리 스카우트를 통해 발굴된 이수영이 고종 앞에서 경복궁 동대전 중수에 쓰이던 주춧돌을 들어올려 팔장사로 발탁된 이야기로 구성되어있다.

이수영은 20대 때 무예 실력과 힘이 엄청난 장사였으며, 별명으로 ‘이여포’, ‘이길동’, ‘팔장사 두령’, ‘운현궁 맹호’라고 불렸다. 윗대와 아랫대의 편싸움에서 윗대지역의 강자로 군림했다. 이 기사에서 이수영은 태껸에 대한 기존의 지식과 부합하며 더 진전된 이야기들을 제공해준다. 우선, 아랫대와 윗대의 편싸움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아랫대의 기준은 수구문(광희문, 동대문 근처에 있는 상대적으로 작은 문) 밖이었다. 아랫대의 대표 장사는 “오강장사(五江壯士)”라 한다. 여기서 ‘오강’이란 한강 주변에 있는 주요 나루터 5개를 통칭하는 말이면서, 한강 일대를 말하는 또 다른 별칭이다. 기존 태껸인들은 윗대지역 외에는 아랫대와 강대를 보통 이야기했는데, 수구문 밖은, 왕십리부터 시작하는 지역이고, 통칭 아랫대로 불린 지역이다. 그런데 ‘오강’이란 명칭을 고려하면 강가의 주요 나룻터를 지칭하는 것이다. 따라서 ‘오강장사’라는 이름은 아랫대와 강대 전반을 통틀어서 유명한 장사를 일컫는 이름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어서 붕어, 송천만, 갑천, 종집이 윗대의 유명한 장사였다고 회고하는데, 승정원일기에서 이부어(이붕어)와 오갑천이 등장한다.[4]

그 내용인 즉, 1890년 9월 10일 여사군 소란 사건에 관한 포도청 보고이다. 핵심은 반촌(성균관 주변)과 마포 지역의 운군(運軍)들이 흥인지문(동대문) 문루 위에서 서양인의 망원경을 서로 차지하려다 집단 싸움으로 번졌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여러 이름들이 나오는데, 오갑천(吳甲天), 이부어(李付魚) 등이 몽둥이를 들고 함께 싸운 인물로 기록된다. 이 이름들에 대해서도 추후 연구들이 필요하겠다.

이수영은 인터뷰를 했던 1929년에, 70세가 된다고 하였다. 이에 입각해서 추정해보면, 출생년은 대략 1860년이 된다. 프로젝트 임호의 개요에서 밝혔듯이 임호(태껸)의 나이를 1882년 전후로 추정하고 있으므로 임호(태껸)보다 20년 이상 앞선 나이이다. 즉, 임호의 아버지뻘 되는 나이이다. 임호가 팔장사로 활동했고 고용우와 이준서의 회고대로 그가 팔장사의 으뜸이었다 하더라도, 이수영은 임호가 팔장사로서 활동할 때 이들을 지휘하거나 관리 감독하던 역할이었을 것으로 추정해볼 수 있다.

또한 임호(태껸)가 이수영으로부터 무예를 직접적으로 배웠을 가능성도 열리게 된다. 이수영은 자신의 무용담에서 상대방의 목을 꺾어 죽이는 기술을 매우 상세하게 설명하는데, 예를 들어 처음에는 상대가 주먹을 지를 때 턱을 올려쳐서 한번에 목이 꺾인다. 이 기술은 윗대태껸의 걷어내기-턱걸이의 흐름과 전형적으로 동일하다. 또한 언덕에서 뛰어내리면서 상대 상투와 턱을 잡아 돌리면서 목을 비틀어 꺾은 기술은 윗대태껸의 상투잽이, 목무장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고용우가 송덕기로부터 직접 배운 ‘턱걸이’ · ‘목무장’ 기술과 이수영의 기사가 정확히 일치한다는 사실은 임호가 팔장사였다는 회고와 정합적으로 맞아떨어진다. 이용복(1990)에 따르면 임호(태껸)는 한 명의 정해진 스승 없이 여럿에게 배웠다고 전해졌는데,[5] 임호에게 스승이 따로 정해지지 않은 것은 그가 팔장사로 활동하면서 선배 팔장사들 여러 명으로부터 다양한 기술들을 배웠기 때문일 수도 있다.

3. 팔장사의 원조, 효종의 “팔장사군관”

기사의 이야기와 인물들을 다루기 전에 우선 조선 후기에 "팔장사"라는 것의 의미를 이해해야 한다. "팔장사"는 조선의 제17대 왕 효종이 봉림대군 시절에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간 자신을 호위한 무인들을 기리기 위해 왕이 된 다음 8명을 추려 “팔장사군관”으로 높여 부르면서 고유명사가 된 칭호이다. 이 계기로 효종은 "별군직청"을 신설하게 된다. 다음은 "별군직" 대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설명이다.[6]

"별군직은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으로 심양(瀋陽)에 볼모로 간 봉림대군(鳳林大君)이 당시 그를 배종(陪從)했던 8장사군관(八壯士軍官)의 노고를 생각해 효종으로 즉위하면서 설치한 친병(親兵)이다. 팔장사군관은 박배원(朴培元)·신진익(申晉翼)·오효성(吳孝誠)·조양(趙壤)·장애성(張愛聲)·김지웅(金志雄)·박기성(朴起星)·장사민(張士敏) 등이다."

즉, 효종 이후 “팔장사”는 단순히 여덟 명의 장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효종 이후 조선사람들에게 팔장사란, 효종때부터 내려오는 고유명사로서 충직한 무관의 대표적 인물들이자 왕을 최측근에서 호위하는 명예로운 무인의 상징이다.[7] 그리고 이 팔장사의 자손들은 대를 이어 별군직으로 발탁되어 왕을 호위하는 특별한 지위를 누릴 수 있었다.

팔장사들의 무력과 맨손 무예의 형태를 간접적으로 엿볼 수 있는 대목이 있다. 청나라로 호송된 왕자들을 호위하던 김여준(金汝峻)은 청나라 황제의 주재 아래 청나라 장수 우거와 씨름을 하다가 우거를 돌 위에 메쳐서 죽였던 무용담으로 유명하다. 씨름(각저)에 대한 기록에 우거를 메치기 전에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는 기록이 남아있어, 당대의 씨름이 단지 메치기만 하는 것이 아닌 타격이 섞여있는 격투의 형태와 유사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로 인용되기도 한다.[8]

팔장사들의 자손들이 이후에 계속 예우를 받았다는 것은 『조선왕조실록』의 기록들을 통해 확인된다. 효종 이후로 별군직청을 통해 뽑은 별군직들은 왕의 친위조직처럼 운영된다. 왕들의 입장에서는 무예의 최상위 실력자들을 측근에 두고 자신만을 위해 충성하는 조직을 갖고 싶어했던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리고 신하들은 이를 폐단이라고 지적한다. 다음 인용은 조선 후기 팔장사들에 대한 왕들의 태도를 설명하는 대목이다. 시험에서 팔장사의 후손은 특혜를 주기도 했고, 이들을 뽑아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친위조직으로 삼았었다는 설명이다.[9]

"현종․숙종 때를 지나 영조․정조 때에 이르면 실록에 ‘팔장사의 후손’은 여러 번 등장한다. 대개 별군직청 試才에서 전국에 있는 팔장사의 후손을 응시케 하여 벼슬을 내렸다는 대목이다. 영조는 이들의 시험 성적이 나쁘면 다음 날 다시 응시케 하여 곁에 두고 있다. 두 임금 모두 태생은 물론 즉위 과정에서 강력한 臣權의 도전을 받은 바, 할아버지의 遺産을 이어 받아 강력한 친위조직을 둔 것이다. 덕분에 ‘팔장사’는 ‘충절’의 한 상징처럼 인식되었고, ‘팔장사의 후손을 서용한다’는 원칙이 깨어질 때도 있었지만 甲午更張(1894)으로 군제가 바뀔 때까지 지속적으로 왕권의 경호세력으로 있어왔다."

신권의 견제에 대응하는 별군직의 친위조직화의 맥락은 제도가 사라지는 1894년까지 이어졌다고 하는 것을 보아 이는 고종 때까지 그대로 이어져온 흐름으로 보인다. 실록에서 고종은 팔장사의 자손들을 챙기는 일을 놓치지 말라고 언급한다.[10] 즉, 고종대까지 팔장사 자손에 대한 예우는 이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별군직은 2~30여명의 규모를 유지하였으므로, 팔장사의 후예와 더불어 다른 무인들이 선별되었을 것이다. 별군직은 1894년 갑오경장 때 좌시어청으로 재편된다.

조선왕조실록 사료 원본

[사진 2] 조선왕조실록 원문 고종이 팔장사 후손 서용을 지시하는 대목

그런데 하나 더 고려해야 할 것이 있다. 이수영을 길거리 스카우트 했던 상직현은 “무위소(武衛所)”의 수장으로 나온다. 무위소는 지금으로 보면 수도방위사령부 같은 곳이다. 고종이 수십에 불과한 별군직을 넘어서 본격적으로 궁궐 호위를 맡은 부대를 더욱 친위조직화하며, 차후엔 그것을 매개로 군대를 통솔하는 기관으로 활용했던 조직이다. 무위소는 ‘1874년 무위청과 훈련도감에서 차출한 500명으로 시작하여 전군의 최우수 군병을 차출하여 1200여명까지 확대한다.’[11] 친위조직의 엄청난 팽창이다. 이수영은 그런데 무위소의 장이 된 것은 아니고 팔장사의 두령이 되었다고 한다. 게다가 대원군-고종-순종 삼대를 모셨으며 1929년까지 운현궁에 분향하러 다니고 있다고 진술한다. 이는 팔장사라는 것이 관직에 구애 받지 않고 고종의 친위대처럼 움직인 무인들의 조직을 일컫는 당시의 표현임을 추정할 수 있게 해준다.

4. 이수영의 신변에 대하여

이수영은 여러모로 꼼꼼하게 분석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인물이다. 왜냐하면 ‘임호가 팔장사의 으뜸(우두머리)이었다’는 진술을 고려했을 때, ‘팔장사의 두령’까지 했다는 이수영은 임호(태껸)의 선임 혹은 상사 격이 되기 때문이다. 우선은 기술이 그대로 전해졌다는 것은 아주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다. 따라서 이수영은 임호와 밀접한 관계를 가졌고 인수인계 차원에서도 경호업무, 무예, 조직운영, 인적 관계망 등 많은 것을 물려주었으리라 추측할 수 있다. 즉, 이수영을 이해하면 그와 유사한 역할과 임무, 인적관계를 임호(태껸)가 가졌을 것이라고 유추할 수 있다. (물론, 같은 원리로 이수영을 스카우트 한 상직현과 윤웅렬 역시 중요하다). 그리고 특히 그 인적 네트워크가 다른 인물묶음들과 조응한다면, 임호(태껸)와 동일인물일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이다.

이수영은 인터뷰 시점(1929)을 기준으로 70세가 된다 하였으므로, 1860년생이다. 이 기사는 주로 이수영의 20대 시절을 다루고 있으므로 시대적으로 1880年代를 다루고 있다고 보면 된다. 울산부사 이만소(李萬韶)의 아들이며, 이만소의 식솔들은 이수영의 20대 당시 양주 계산 답동[12]에 살았다.

팔장사로 발탁되기 전, 이수영은 종친부 낭청(왕실 친족인 종친들을 관리하는 부서의 실무직)으로 근무했으며, 이는 흥선대원군이 힘을 발휘해 발탁된 것이었다. 종친부에 있으면서 팔장사로 발탁될 시기에 이수영은 익선동(안국역과 종로3가역 사이)에 살았다. 익선동은 운현궁이 있는 곳으로, 이 역시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영향력이 추정된다. 즉, 흥선대원군이 실권을 발휘할 당시부터 등용된 인사이다. 흥선대원군은 ‘천하장안’(천희연, 하정일, 장순규, 안필주)이라는 별칭으로 불린 자신의 호위 겸 정보원 역할을 포함, 각종 일을 처리해주는 가령(家令) 네 명이 있었다고 전하는데,[13] 천하장안뿐만 아니라 이수영 같은 당대의 실력자들을 자신의 휘하에 두려고 했으며 이수영 역시 그 맥락으로 읽힌다. 정말 흥미롭게도, 운현궁 주변에 거주하면서 임금을 호위했던 군관이 또 있다. 인물묶음 2번에 해당되는 ‘조선 육군무관학교 출신 참위 임필호(林弼鎬)’의 거주지도 운현궁 주변으로 기록되어있다. 의미심장하게도 임필호 역시도 왕을 직접 호위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군관이었다. 임필호의 필자는 필운동의 필자와 동일하다. 이는 후에 임필호 편에서 상술한다.

이수영 집안은 왕실 종친이며, 큰집은 도장궁이었다.[14] 당시 도장궁의 사손은 창산군 이해창(李海昌, 1865~1945)이다. 창산군 이해창은 1900년대 기호흥학회 설립에 참여하는 등 교육운동에 참여했다가 훗날 작위를 받으면서 친일행적을 남기기도 했던 왕족이다. 이수영이 이해창보다 5살 연상이었다. 도정궁은 사직공원 옆 운경고택 자리에 있었다. 이해창은 양자로 도정궁에 들어간 것이고, 원래는 경기도 포천에서 태어났다. 포천과 양주가 가까워서 서로 알고 지내다 이해창이 도정궁에 들어가면서 서울에서 왕래한 것으로 보인다.

이범진의 친척과 이수영의 부모님의 댁이 가까웠다. 이범진과 이수영은 20대 때 달리기산의 결투를 계기로 상대방의 무예를 존중하고 가까워졌다. 이범진은 훗날 종친 중에서도 고종의 핵심 측근이 된다. 그는 아관파천을 주도했으며, 훗날 연해주 지방의 독립운동으로 이어지는 인물이다. 그의 아들 이위종은 헤이그밀사 3인 중 한 명이다. 팔장사가 된 이수영이 굳이 70대 때 20대를 회고하면서도 자신과 가까운 인물로 이범진을 언급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이범진에 대해서는 뒤에서 상세히 후술한다. 이는 임호(무장)의 관계망에도 겹치는 인물이 된다.

마지막으로 이수영이 팔장사가 된 나이이다. 기사에서 언급되는 ‘무위소’는 무위영이 되었다가 1882년 임오군란 이후 폐지되었으므로, 이수영(1860년생)이 팔장사가 된 시점은 그가 성인이 되는 1879년부터 임오군란이 있던 1882년 사이 중 언젠가였다고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5. 이수영의 주변 인물들로 보는 팔장사와 태껸

이수영의 회고에 따르면 고종은 신변의 위협을 느껴 팔장사를 모집했다. 즉, 팔장사의 중요한 임무는 고종의 호위이다. 그런데 팔장사를 모집하는 방식은 정식 무과가 아니었다. 무위소청의 수장 상직현(尙稷鉉)과 중군 윤웅렬(尹雄烈)이 새벽 4시에 우연히 돈화문에 뛰어오르는 이수영의 재능을 본 뒤, 임금에게 천거하였고, 고종이 직접 이수영을 시험하고는 무위소장무(武衛所掌務)를 내렸다. 이것의 의미를 당시의 관직 수여의 관례에 비춰봐서 어떤 의미인지는 추가적인 연구가 필요하지만, 임시로나마 무위소의 일정한 역할을 부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흥미로운 점은, 이 스토리에서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이다. 상직현, 윤웅렬, 고종, 곤전마마(명성황후), 민겸호, 민영휘가 등장하는데 이 사람들은 한국 근현대사의 굵직한 인물들이다. 우선은 고종이 직접 선발을 했다. 이는 팔장사라는 자리 자체가 고종의 친위조직적 성격이 강했음을 드러낸다. 게다가 그 과정이 특별한 공적 절차 없이, <상직현과 윤웅렬의 천거 – 고종의 면접시험 – 발탁>이라는 아주 임의적인 과정이라는 것도 두드러진다. 이때 곤전마마(명성황후)와 민겸호, 민영휘를 대동하고 있었다. 왕족과 외척 역시 팔장사의 호위 대상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도 있으며 혹은 이런 특별대우 자체가 임오군란을 촉발시킨 원인인 무위소의 한 모습이었을 수도 있다. 특히, 임오군란의 주요 이유 가운데 하나는 군인들에 대한 차별대우이다. 별기군이라는 80명의 신식 부대가 다른 구식 부대에 비해 큰 특혜를 받아 질시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위 인물들 상직현과 윤웅렬, 그리고 민겸호는 ‘별기군’(1881년에 80명의 군관을 뽑아 창설하여 근대적 부대 체계를 실험적으로 도입한 신식부대, 무위소 소속)으로 엮인다. 송덕기는 생전에 KBS문화강좌 인터뷰(1984.02.12)에서 ‘별기군, 별순검 등의 무술을 하는 관직 분들도 태껸을 했느냐’는 이보형의 질문에 “했어요”라고 답한다. 80명 밖에 되지 않았던 별기군이 태껸을 했다면, 이는 상당히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는 것이다.

구한말 별기군 부대 전경

[사진 3] 구한말 창설된 신식군대 별기군의 모습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민겸호는 전형적인 외척의 권신으로, 신식군대인 별기군 창설에 기여한 인물이면서 군납비리로 결국 임오군란 때 구식 군인들에게 죽임을 당한 자이다. 별기군에 관여한 민겸호가 이수영의 발탁에도 참관하였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민영휘도 민씨 일가 외척의 핵심적인 인물로, 임오군란 이전에 이들이 권력에 정점에 있었다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상직현은 기사에서 무위소의 수장을 하고 있었다고 설명된다. 별선군관 출신이므로 그가 무예별감에서 시작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15] 고종을 호위했던 무위소의 수장이라면 무관으로서는 고종의 호위를 지휘하고, 아울러 1880년 전후에는 1000명에 달하는 정예병을 통솔하는 지휘관이다. 이것으로 보면 실질적으로 아마 상직현이 이수영 이전의 팔장사 두령이 아니었을까 추정할 수 있다. 무예실력도 출중했을 것으로 예상되며, 태껸도 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최소한 암행할 때 경호를 하기 위해서라도 태껸했던 병사들을 통솔하여 임금을 호위해야 했다. 1898년에는 종2품이었음이 확인된다.[16]

상직현은 1881년에 일본에 수신사로 다녀온 적이 있으며, 최근에는 그가 제작했던 해시계가 반환되어 이슈가 되기도 하였는데 그가 외국의 과학기술문물에 대한 이해가 높았고, 군인으로서 공학적 기술에 대한 이해까지 가진 인물임을 알 수 있다.[17] 상직현 역시 별기군과 직접 관련이 있다. 별기군의 설명을 보면 “오군문에서 신체가 강건한 지원자 80여 명을 특별히 선발하여 무위영에 소속시켜 창설하여 별기군 또는 별기대라고 불렀다.”[18] 즉, 무위영 내의 특별부대였으므로 별기군은 상직현의 휘하에 편성된 부대인 것이다.

윤웅렬은 대한제국 시기 조선말, 일제강점기 시기의 유명한 기독교 계열의 지식인 윤치호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제4대 대통령 윤보선은 그의 종손(동생 윤영렬의 손자)이다. 윤웅렬과 윤영렬은 많은 기록이 남아있다. 윤웅렬은 동생 윤영렬과 함께 동네에서도 장사로 소문났으며, 둘 다 무과에 응시해 무관의 길로 관직을 시작하였다. 윤웅렬은 서얼 출신이었고 평생 동안의 관료생활 동안 그로 인한 불이익과 비난을 극복하며 살아왔다. 그 때문인지 윤웅렬은 개화파에 가까웠고, 개화파 지식인들 그리고 일본의 인사들과도 깊이 교류하여 갑신정변에도 참여했을 정도였으나, 또 한편으론 고종에게 충성했고 현실적인 인물이었다. 무과에 급제한 뒤 곧 선전관이 되었으니 그 역시 상직현처럼 임금을 호위하거나 가까이에서 모시는 역할로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기사에서 보면 상직현과 윤웅렬이 새벽 4시에 같이 길을 걷고 있었으니, 아마도 같이 술 한잔 먹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매우 친한 사이였을 것이다. 이수영은 윤웅렬을 처음 만났을 때 직책이 중군이었다고 회고한다.

윤웅렬은 1880년에 별군관 신분으로 김홍집을 수행하여 일본에 다녀왔고 일본의 문물에 큰 관심을 가졌다. 신식 군대의 운영과 훈련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1881년 별기군의 창설과 운영에도 이를 많이 도입하였다 한다. 즉, 신식군대 방식의 운동과 체력단련이 별기군에 도입된 것에 윤웅렬이 깊이 관련되어있으며, 별기군이 태껸을 했다면, 체육의 일환으로도 활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별기군의 훈련방식을 주도한 윤웅렬은 태껸의 실효성에 대해서 긍정적인 판단을 했다고 추정이 가능하다.

윤웅렬 제복 착용 사진

[사진 4] 1910년경 제복을 입은 윤웅렬과 아들 윤치호(우측 뒤), 그리고 가족들

윤웅렬은 임오군란 때 일본으로 망명했다가 복귀한다. 훗날 김홍집 내각에서 군부대신도 역임한다. 윤웅렬은 을사조약을 계기로 관직에서 물러날 때까지 고종의 신임을 받았던 관료로, 매우 많고 다양한 관직을 거쳐서, 대한제국 시기에도 군부대신을 여러 번 맡고, 1902년 궁내부 특진관(황실의 자문위원), 1903년 내장원경사무(내장원경은 황실재정 총책임자 자리이며, ‘사무’는 그 직을 임시로 맡았음을 의미한다)를 맡는다. 내장원경은 고종의 핵심 측근 중 측근인 이용익이 맡아왔는데, 중간에 임시직으로서 내장원경사무를 맡을 정도였으므로 이용익만큼은 아니어도 윤웅렬 역시 고종이 크게 신뢰한 인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군부대신을 맡으면서 궁내부의 핵심직책에 관여할 정도라면, 윤웅렬의 관료생활 동안 당연히 고종의 친위 호위무사들인 팔장사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을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1905년 을사조약에 반대하였으나 조약이 체결되는 것을 보면서 불가항력임을 느낀 것으로 보이며, 관직에서 물러나고 기독교에 귀의했다고 한다. 그러나 죽기 1년 전 일본의 귀족 작위를 받음으로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이름이 오르게 되었다.

그는 아들 윤치호의 뛰어난 능력을 높이 샀으며, 매우 총애하고 아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윤치호는 우리나라 기독교계를 이끄는 핵심적인 인물이자 정치인이었다. 그의 정치적 행보에 대해서는 여러 평가가 갈라지지만, 객관적으로 윤치호는 YMCA를 매개로 한국 체육사에도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이다. 윤치호는 조선체육회 제9대 회장(1928~1937)이기도 하다. 윤웅렬과 윤치호는 감리교회 계열이었고, 이는 신민회를 주도한 종파이다. 그리고 한때 젊은 날 태껸을 했으나 한량 생활을 청산한 뒤 상동교회, 신민회 활동을 했던 군관 출신 목사 이필주 선생도 감리교 계열의 교인이었다. 기독교인들과의 관계는 독립협회와 신민회로 이어지면서 더욱 논의할 내용이 많다.

상직현과 윤웅렬의 아들 윤치호는 독립협회에서도 함께 활동했다. 상직현이 왕을 가장 가까이에서 모시는 경호원이자 고종의 심복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공화주의적 지향을 가진 이들이 다수 활동했던 독립협회에 이들이 있는 것이 의아할 수도 있다. 하지만 분명히 ‘독립협회연약략(獨立協會沿歷略)’에는 상직현을 포함한 지도자들이 1898년에(광무 2년) 만민공동회 개최를 계기로 탄압받던 기록이 담겨있다.[19] 이때 윤웅렬은 아들 윤치호가 독립협회를 미리 탈퇴할 수 있게 하여 윤치호가 탄압을 피하도록 돕는다. 이 기록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상소의 시작: 일부 대신들이 고종에게 “종로 대로에서 만민공동회를 열어 왕정을 폐지하고 대통령을 추대한다는 격문을 독립문에 붙였다”라고 보고하자, 고종은 “믿을 수 없는 말이니 다시는 말하지 말라”고 한다. 그러나 대신들이 끈질기게 사실이라고 주장하자, 결국 고종이 압력에 못 이겨 “사실을 조사하라”고 명하고, 이에 궁내부 경찰·한성 오서(경찰)·형사대가 총출동하여 독립협회의 간부와 회원들을 일제히 체포한다. 이에 이상재, 이승만, 안창호, 신규식, 이동휘, 상직현, 지달원 등 약 350여명의 인물들이 검거·투옥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고문과 옥사자가 발생했다."

이 글을 보면 고종의 경호까지 맡던 심복 상직현이 독립협회의 핵심간부 중 하나로 활동하였으며, 독립협회의 주요 인사들과 함께 잡혀간다. 이 기사는 바로 임호(무장)가 팔장사였던 임호(태껸)와 직접적인 연관성이 있을만한 네트워크적 정황을 제시한다. 위에 밑줄 친 인물들을 간략히 설명하며 연관성을 보이도록 하겠다.

이상재 : 1900년대, YMCA 학감이었던 김규식 등과 상의하여 장사 100인 양성을 위해 YMCA유도부 창설을 주도한다. 초기에 무관학교 출신인 유근수, 나수영 사범이 지도하였고 수제자로 유도부의 주요 멤버에는 김홍식이 있었다. 무관학교는 별기군의 맥을 잇는 신식군대의 장교양성기관이다. 유근수와 나수영이 어느 시기에 학교를 다녔는지는 확인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이는 임필호와의 연관관계를 형성한다. 나수영은 1913년 독립운동 때문에 만주로 망명하고, 1920년대 만주 용정으로 가서 독립운동을 하며 무술을 가르쳤다. 만주 용정은 임호(용정)가 활동했던 바로 그 용정이다. 게다가 나수영이 개관식을 한 동흥학교 강당은 1920년대 임호(용정)이 교사로서 활동했던 학교이기도 하며, 활동 시기가 겹치므로 서로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김홍식은 훗날 신한승을 도와 태껸의 문화재 등재를 지원했던 유도계의 거물로, 제1화에서 송덕기의 친구 이귀돌 그리고 또 다른 태껸을 배웠던 무술가 권충일과 깊은 연관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설명하였다. 김홍식은 사실 독립운동에도 참여하여 ‘임시정부의 비호’라는 별명이 있었으며, 이승만과 이상재 사이의 연락선 역할을 하였으며, 그가 앞서 설명한 윤웅렬의 아들 윤치호의 초빙으로 개성의 송도고보 유도교사가 되었다고 한다.[20]

나수영 도문 개관 기사

[사진 5] 나수영의 무도관 개관을 알리는 조선일보 기사 (1928.10.20)

김홍식 독립운동 소개 기사

[그림 6] 유도계 거물 김홍식의 독립운동 행적을 소개하는 경향신문 기사 (1984.08.18)

이승만과 안창호 : 임호(무장)의 공훈록 기록을 보면 ‘이승만, 이시영, 안창호 등은 상해에서 열린 1923년 국민대표회의 무렵인 6월에 임호(무장)에게 비밀명령을 내리고 임호(무장)은 니콜리스크에 가서 고려공산당 간부들과 비밀회의를 열었다’고 한다. 즉, 임호(태껸)가 팔장사 으뜸으로서 활동하였다면, 당시에 상직현 등을 통해서 이미 이승만이나 안창호와 일면식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신규식 : 신규식은 1898년 당시에는 관립한어학교 학생이었다. 만민공동회에 부장급으로 활동하면서 공화주의자가 되었다. 1900년에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들어가는데, 인물묶음 2번에 해당하는 ‘임필호’와 임관 동기다. 여운형, 김규식 등과 동제사와 신한청년단 활동을 하였다. 중국 신해혁명에 참여한 유일한 조선인이며, 상해임시정부를 세운 주역 중 한 명이다.

이동휘 : 이동휘는 1918년 한인사회당을 설립하는 인물이며, 설립 당시 멤버 중 임호(무장)가 있다. 이동휘는 1898년 당시 무관학교(육군무관학교의 전신 격이다) 1기 졸업생으로 참위로서 궁궐호위를 맡은 시위대기관이었고, 고종이 이동휘의 우렁찬 구령을 좋아하여 이동휘에게 자주 열병식 보고를 시켰다고 한다.[21] 즉 이동휘 역시 청년기에는 고종을 호위했던 무관으로, 팔장사의 역할과 매우 가까운 군인이었다. 이동휘는 즉 임필호와 같이 근무했을 가능성이 있으며, 임호(무장)가 임호(태껸)와 동일인물일 가능성을 한층 더 높여준다. 그리고 이동휘 역시 기독교인이 되어 신민회 활동을 열성적으로 하다가, 북간도에 선교를 갔고, 거기서 사회주의를 받아들여 한인사회당을 건설한 것이다. 한인사회당 발기인 명단에 이동휘와 임호가 있다. 이동휘와 주변인물, 임호(무장)과의 관계는 임호(무장)에서 상술한다.

지달원 : 지달원은 임호(분원)가 분원학교의 교사로 초빙되었을 때 동행하는 교사 지달원과 동일인물로 보인다. 지달원은 훗날 춘천에서 춘천앱웟청년회 부회장을 하면서 활동한다. 3.1운동에도 참여하였으며, 엡웟청년회 역시 감리교다. 정명여학교에서 1920년에 교사를 하였던 기록이 있다. 3.1운동 때 체포된 것으로 보이는데, 그의 심문조서를 보면 청운동 출신으로 윗대 지역의 사람이다.[22] 윗대지역 인물이라면 임호(태껸)와 직접적인 지역적 연고가 되는 것이므로 연관성이 더욱 높아진다. 지달원의 이야기는 임호(분원)에서 상세히 다루도록 한다.

이에 덧붙여서, 앞서 이수영이 20대 때 친해진 이범진에 대한 간략한 설명까지 더해 보겠다. 이범진 역시 젊은 시절에는 무관 집안의 특징으로 무골이었는 듯 하다. 이범진의 아버지 이경하가 언급되었기 때문에 이범진이 특정될 수 있었는데, 이경하는 흥선대원군의 심복이었던 무관이다. 병인양요 때는 총지휘관을 하였고, 흥선대원군의 방침에 따라 천주교 박해와 불법 화폐주조자들을 심문하여 죽이는 일로, 악명이 높았다. 그의 집이 현재 중국대사관 자리인 낙동에 있었고, 그곳에서 고문을 했기에 ‘낙동염라’라고 불렸다 한다.[23] 이경하가 무신이었다는 점, 그의 아들 이범진과 이범윤 둘 다 무예가 출중하고 군사적 활동을 했다는 점에서 이범진과 이범윤 둘 역시 맨손무예에 일가견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집이 태껸터로 언급되는 구리개의 대표적인 큰 집이라는 것도 깊은 연관이 있다. 그리고 이범진도 서얼이었다.

여기서 등장하는 이범진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이 이범진은 바로 훗날 노령지방에서 활동한 외교관이자 독립운동가 이범진이다. 이범진의 동생 이범윤 역시 간도와 연해주를 기반으로 활동한 저명한 무장독립운동가이다. 이수영이 70의 나이에 자신의 회고에서 이범진을 언급한 것은 그와 했던 활동이 중요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수영이 흥선대원군-고종-순종 3대를 모셨던 사람이라는 점을 상기해보자. 이에 발맞추어 이범진은 고종이 가장 신임했던 측근이자 종친으로 “공조, 호조, 이조, 형조 등 각조 참판, 그리고 궁내부대신[24], 법부대신, 고등재판소 재판장”[25] 등을 역임했고, 여러 나라의 대사관을 지냈으며, 그 시절 외국어를 익힌 아들 이위종이 훗날 헤이그 밀사 3명 중 한 명으로 발탁되어 활동한다. 이범진은 고종이 일본에 연금 수준의 압박을 받을 때 러시아 공사로 고종을 탈출시킨 아관파천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6. 태껸은 왕실 친위조직 형성과정에서 전국의 무인들을 모으고, 발전시킨 맨손무예일 가능성

이런 사항들을 종합하여 보면, 이수영이 언급한 주요 인물들은 전부 고종의 친위부대와 같은 측근에 무관이거나 궁내부의 주요 대신들이었다. 이수영을 팔장사로 따로 뽑았다는 그 기사는 고종의 정치적 패착으로 평가되는 문제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기도 한다. 즉, 왕권과 국가의 힘을 동일하다고 착각하면서 왕권을 지나치게 강화하면서 국가 전반의 역량을 키우지 못했다는 평가와도 일맥상통하고 있다. 무예적 역량이 뛰어난 이수영 같은 이들을 무위소 같은 조직으로 끌어들인 행동은 태껸이 소수의 전문 무관들이 했던 것이라는 설과 직접적으로 조응하기도 한다. 다만 여기서 언급된 인물들은 조선 말기로 갈 수록 근대 개화기의 주요 지식인들과 긴밀히 교류하면서 새로운 근대적 국가로 조선을 바꾸기 위한 다양한 노력을 했던 흔적도 남아있었다.

이러한 발견은 태껸이 1880년대에 들어서 지금의 관념보다 훨씬 더 국가기관이 강력하게 개입했던 무술이며, 특히 급변하던 국제정세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신식군대를 만들면서도 활용되었다는 새로운 인식의 전환을 요구한다. 송덕기가 배우고 전한 태껸은 임호로부터 배운 것은 확실하다. 그리고 임호가 송덕기에게 전해준 태껸이라는 무예는 왕의 호위를 맡는 팔장사들을 중심으로 익혔던 버전이다. 즉, 군대 특히 왕실 경호를 담당하는 부대 차원에서 체계적으로 활용하고 발전시켰던 무술인 것이다. 이는 윗대태껸에서 강조하는 태껸 기술들이 품밟기와 활갯짓이라는 하나의 체계에서 유기적으로 조직되어있다는 특성의 배경을 설명할 수 있다. 고종이 전국에서 무예가 출중한 군관을 추리면서 자신의 친위조직을 만들고, 훈련시켰던 맥락이 태껸의 발전과 연결되어있다.

특히 1881년에 창설되었다 사라지는 별기군은 신식군대의 효시이자, 일본 군관을 불러다 훈련을 시켜 왜별군이라고 불릴 정도로 새로운 시도였다. 그러면서 동시에 양반 자재들 중에 무예가 뛰어난 자들을 따로 80명을 뽑아 소수에게 특별대우를 해주었던 왕실의 친위대적 성격이 강했던 부대였다. 편제상으로도 왕을 지키는 무위소 소속이었다.

게다가 별순검까지 태껸을 했다는 송덕기의 답변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별순검은 오늘날의 사복경찰인데, 당시 별순검은 대한제국 황실의 입장에서 다양한 정치범들을 감시하고 탄압하는 일도 많이 하였다. 즉, 별순검 역시 왕실의 친위 무력조직이었다는 뜻이다.

결론: 현대사 속 태껸과 ‘옛법’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며

별기군과 별순검 둘 다 왕실의 친위조직에 가까웠고, 통치의 과정에서 크고 작은 무력을 활용할 때 사용된 조직이라는 것을 고려한다면, 더욱 더 군대나 왕실이 태껸에 많이 개입했을 가능성을 높인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송덕기가 태껸을 전할 때 ‘옛법’이라는 개념을 다루었던 이유는, 이미 1880년대부터 태껸을 군용무술로 사용하면서, 새로운 기술들을 연구하고 도입하였기에, 예전부터 전해지는 옛법을 구별해야 할 필요성이 생겼기 때문이라고 유추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임호(태껸)는 무인 혹은 무관이자 팔장사의 으뜸으로 활동하면서 고종과 왕실의 호위 및 밀명을 수행하는 친위조직의 리더와 같은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이며, 고종과 그의 최측근 인사들(이범진, 상직현, 윤웅렬 등 궁내부 관료들)과 긴밀한 연계를 유지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리고 상직현의 행보가 독립협회까지 닿아 있다는 점을 고려하고, 왕의 친위조직이 국내 여러 조직들을 계속 감시하고 관리했다는 것을 고려하면, 임호(태껸)는 당대 주요 지식인과 지도자들에 대해 상당히 많이 파악하고 인맥도 상당히 넓었을 가능성이 있다. 특히 독립협회의 주요 인사들은 임호(무장), 임호(용정), 임호(분원)과 직접 연관성이 있는 인물들로, 이 임호 묶음들이 하나의 인물일 가능성을 높여주고 있다. 끝.


[1] 이용복, 1990. 『한국무예 택견』, 92쪽.

[2] 김영만, 2018. 「태껸의 수련 계층에 관한 연구」, 『한국체육과학회지』, 제27권 제1호, 1-12쪽.

[3] 학보, 1929. 06. 23. 「絶世之勇! 超人間적怪력! 擊천蹴지의 八壯士두령, 天지장사李秀暎노인의 弱관시대」, 『별건곤』 제21호. (현대어 번역 사료 원문 링크 : https://taekkyeon.net/person/36617)

[4] 『승정원일기』, 고종 27년(1890년) 9월 10일 사료 고종시대사 참조 (한국근대사료DB 연동).

[5] 이용복, 1990. 『한국무예 택견』, 92쪽 재인용.

[6]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별군직청> 항목 (링크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3002)

[7] 김일환, 2005. 「서북 무인이 기억하는 병자호란과 심양 체험」, 『한국문학연구』, 제29집, 325-347쪽.

[8] 허인욱, 2011.01.10. 무카스 칼럼 ‘[허인욱의 무인이야기] 김여준 편’ 참조.

[9] 김일환, 2005. 앞의 논문 335쪽 재인용.

[10] 『조선왕조실록』, 고종실록 4권, 고종 4년 2월 4일자 기사 발췌.

[11]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무위소> 항목 (링크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19195)

[12] 계산답동(닥뫼논골)의 상세 지리적 위치 정보는 구한말 양주 일대 고지도 문헌 연구과제로 남아있음.

[13]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신편 한국사』 대원군의 내정 개혁 파트 인용.

[14] 사직동 도정궁(都正宮)의 역사 및 명칭 변천 사료 참조.

[15] 『조선왕조실록』, 고종실록 19권, 고종 19년 11월 6일자 사료 발췌.

[16]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고종시대사’ 4집, 광무 2년(1898년) 2월 9일자 보고 인용.

[17] 한겨레 신문(2022.08.18) 반환 해시계 지평일구 및 무관 상직현 유물 고증 기사 참조.

[18]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별기군> 항목 (링크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3007)

[19] 독립기념관 독립운동가 사료 관리번호 9-PS0006-116 '독립협회연역략' 발췌.

[20] 경향신문(1984.08.18) '여명의 개척자 김홍식 편' 인용.

[21] 반병률(1998), 『성재 이동휘 일대기』, 37쪽 발췌.

[22]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일제강점기 고등경찰 지달원 소행조서 사료 인용.

[23]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이경하> 항목 (링크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3583)

[24]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궁내부> 관제 및 역사적 변천 항목 고증 인용.

[25] 국가보훈부 공훈전자사료관 독립유공자 이범진 공훈록(https://e-gonghun.mpva.go.kr/user/IndepCrusaderDetail.do?goTocode=20003&mngNo=8187)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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