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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대태껸협회 이사 강태경
▶ 임호의 인물묶음표
지난 제1화에서는 임호의 제자이자 송덕기의 동문들을 중심으로 다루었다.
제1화 <태껸인 임호 (1) : 임호와 그의 제자들> 링크 : https://taekkyeon.net/person/36727
제2화에서는 팔장사 두령 이수영과 그 주변의 고종의 측근들을 중심으로 다루었다.
제2화 <태껸인 임호 (2) : 팔장사와 왕실의 무인들> 링크 : https://taekkyeon.net/person/36740
* 인용문 내에서 필자가 부연설명하는 것은 대괄호 [ ] 를 사용하였습니다. 인용문 내의 괄호 ( ) 는 원문에서 괄호를 사용한 것임을 미리 말씀드립니다.
1. 임호(태껸)의 장인, 보인학교 초대 교장 윤정석(尹晶錫)
임호(태껸)의 사회적 역할을 추정할 수 있는 단서가 ‘팔장사’였다면, 임호(태껸)의 개인사에 관련된 매우 중요한 정보 중 하나는 그가 데릴사위로 결혼했으며, 장인어른은 ‘보인학교의 첫 번째 교장’이라는 것이다. 임호가 데릴사위였다는 것은 이용복의 『한국무예 태껸』(1990)에도 서술되어 이미 널리 알려진 얘기였다. 여기에 더하여 고용우와 이준서는 임호의 장인이 “보인학교”의 초대 교장이었다고 기억한다. 이는 매우 중요한 단서다. 보인학교에 대한 기록이 다행히 뚜렷하게 남아있기 때문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보인고등학교”에 대한 설명이다.[1]
보인학교 제1회 졸업식 사진(1911) 맨 왼쪽 맨 앞에 제복이 정현
윤정석은 앞줄에 있다는 것까지만 확인되며 특정하는 자료는 확인되지 못하였다.
『보인70년사』(1978)에는 보인학교의 역사가 상세히 담겨있다(온라인에서 다운받을 수 있다).[2] 우선 보인학‘회’가 1908년 3월 8일에 먼저 결성되었고, 3개월 뒤 보인학‘교’가 1908년 6월 8일에 세워졌다. 보인학회는 두 개의 모임이 양 축을 이루어 결합하고, 그 둘을 중심으로 지역 일대의 각종 모임들이 뭉치면서 만들어진 단체다. 하나는 젊은 현역 군인과 군 출신 인사들의 모임인 보민회(輔民會)고, 다른 하나는 웃대지역의 어른 격이었던 한만용(韓晩容)이 주도하며 원로격 인사들이 모인 인우회(仁友會)라는 모임이다. 윤정석은 인우회에 속했던 사람이었다. 정현(鄭炫)은 군대가 해산되고 나라가 위기에 처한 이 때에 계몽운동과 교육을 해서 독립의 불씨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한만용이 그에 흔쾌히 화답하여 인우회를 연결시켜주어서 보민회와 결합하고, 지역의 주민들까지 설득하여 결성한 계몽운동단체가 바로 보인학회인 것이다.[3]
보인학회의 한 축이 군대 해산 후 잔류했던 군인들이었으며 그들의 소속이 ‘시위대’였다는 것, 즉 왕궁의 경호를 담당했다는 것은 제2화에서 다룬 팔장사들과의 접촉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혹은 이들 중에도 팔장사로 활동한 이가 있었으리라 추정하는 것도 가능하다. 그리고 팔장사 으뜸이었던 임호가 보인학교 교장의 사위라는 점도 고려한다면 더욱 가능하다. 이들이 주로 주둔했다는 도렴동과 그 주변인 내수동과 인달방은 지금의 경복궁역 남쪽일대, 혹은 세종문화회관 뒤편 일대이다. 결국 보인학교도 그 곳에 자리잡는다. 보인학교가 있던 위치는 종로구 내수동 145번지이다. 흥미로운 것은 송덕기의 본적, 즉 송덕기의 본가 역시도 내수동 25번지로 매우 가까이 있었다.
보인학교 자리와 송덕기 본적지, 안창호가 연설을 했던 자리
여기에 더해서 고종의 측근이 보인학교 설립에 관여하였다는 것은 한만용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한만용은 참정대신이었던 한규설의의 족장(族丈, 가문의 높은 항렬의 어르신)이다. 한규설은 무관 출신의 정치인으로 고종의 큰 신임을 받았던 인사인데, 독립협회에 호의적이었으며, 을사조약 때 끝까지 반대한 참정대신이었고 중추원 의장, 궁내부 특진관 등을 역임하였던 고종 측근 중 거물이다. 그는 일본의 남작 작위도 끝까지 거절하였고, 1920년대에는 민립대학건설운동을 참여한 사람이다. 한규설도 보인학회의 결성을 지지해주었고, 보인학교의 개교식에 직접 참석하여 축하해주었다. 한규설을 통해서 우리는 보인학회와 보인학교의 설립을 위해 무관출신 고종의 측근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는 점이 뚜렷하게 나타난다고 볼 수 있다. 무인들이 중심이 되어서 더 그러했는지는 모르지만 보인학교는 서민이 직접 만든 학교로, 지식뿐만 아니라 기술적 능력, 그리고 체육 등을 강조하는 학교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다.
한규설. 대한제국기 궁내부특진관, 법무대신 등 역임. 을사조약을 끝까지 반대했다.
(사진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윤정석은 개교식날 다음과 같이 보인학교 설립의 취지를 설명했다고 한다. 『보인70년사』의 한 대목을 그대로 가져와보았다.
이러한 좌우명은 그가 한학자 집안 출신이어도 개화된 문명을 받아들이며, 근대적 인간관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또 알리려 했다는 것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특히 “서민들의 열과 땀으로 이룩된 학교”라는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실제로 보인학회와 보인학교는 내수동과 웃대지역 일대의 무관, 선비, 상인, 기생, 인력거꾼 등 주민 500여명이 힘을 모아 근대적 교육을 시도하려는 계몽운동이었다. 그리고 윤정석은 이 운동의 불씨를 붙이기 위해 자신과 “교분을 가지고 있던” 당대의 유명한 독립운동가에게 야외 교육강연을 부탁한다.
그 독립운동가는 바로 도산 안창호다. 윤정석의 부탁을 흔쾌히 수락한 안창호는 1908년 5월 13일 도염동 종교교회 앞 천변(송덕기 본가의 동쪽 바로 옆이다)에서 ‘군중계몽대회’를 연다.[7] 800여명의 군중이 모여든 가운데, 안창호는 이렇게 연설했다고 한다. 정말 흥미롭게도 이 증언은 태껸인 송덕기의 입에서 나온 얘기이다.
도산 안창호. 1908년 학교설립을 역설하던 그의 강연에 송덕기도 있었다.
안창호의 연설을 계기로 내수동 일대 주민들의 마음에 교육열을 불지피고, 그 힘을 모아 학교를 설립했다고 설명된다. 안창호 본인도 윤치호(윤웅렬의 아들)와 함께 평양에 대성학교(1908년 9월 설립)를 세우고 있었다. 윤치호는 초대 교장이었다. 이는 신민회의 주요 사업이었다. 앞서 밝혔듯이, 송덕기의 본가는 내수동 25번지로 보인학회의 주요 활동무대가 되는 곳 한복판에서 살았다. 그리고 안창호의 강연장소가 송덕기의 집과 매우 가까워 송덕기도 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안창호의 이 강연으로 인해 내수동뿐만 아니라 웃대 지역 일대에 학교 설립을 목표로 하는 교육운동이 일어났다. 당시 그 지역 일대의 계모임들이 대대적으로 동참하였다는 기록이다.[9] 그 일대 주민 800여명이 모였다면, 임호(태껸)도 현장에 있었을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아무튼 그렇게 보인학교가 1908년 6월 8일에 세워지고, 3개월 뒤인 1908년 9월에는 필운학교가 개교한다. 송덕기는 바로 이 학교의 첫 신입생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70여년이 지났을 당시에도 강연 내용의 주요 내용을 기억하고 있었다는 것도 주목할 만하다.
우리가 여기서 잠시 유념해야 하는 것이 있다. 안창호가 ‘신민회’를 만들기 시작한 것은 1907년이라는 것이다. 윤정석이 1908년 초중반에 그를 초청할 수 있을 정도의 관계를 갖고 있었다는 것은, 안창호로 하여금 윤정석도 직간접적으로 신민회에 함께하도록 요청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특히 학교 건설운동은 안창호의 당시 활동 그 자체였다.
그렇다면 신민회가 연결된다는 것이 프로젝트 임호에 있어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보자. 신민회는 윤정석 뿐만 아니라 독립협회 활동을 했던 윤치호를 통해서, 무관출신이었던 이동휘를 통해서도 연결되는 조직이다. 훗날 신흥무관학교와 동림무관학교, 밀산무관학교를 세우는 것도 결국 신민회의 사업들이었다. 이런 흐름은 임호(무장)으로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중요한 점은 윤정석의 위치가 분명해짐에 따라 임호(태껸)과도 신민회가 상당히 가깝게 연결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 더 유념할 것이 있다. 고종이 을사조약의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 준비했던 헤이그특사 파견을 직접 지원해준 것 역시 신민회였다. 그런데 헤이그특사는 고종이 자신의 최측근들을 총동원해서 추진했던 첩보전이자 외교전이었다. 원래 헤이그특사로 이용익을 보내는 것을 검토하기도 하였고, 결국 2화에서 이수영과 함께 언급된 이범진의 아들 이위종이 헤이그특사로 파견된다. 이런 총력전 때 팔장사가 활용 안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그 말은, 팔장사들이 신민회와도 적극적으로 협력했을 가능성이 열린다는 것이다.
헤이그특사. 왼쪽부터 이준, 이상설, 이위종.
이위종은 이범진의 아들이다.
윤정석이 직접적으로 안창호와 친분이 있었다는 것은 임호(무장)의 행보와도 연관성을 맺을 수 있다. 저번 화에서도 언급했지만 임호(무장)은 1923년 상해 임시정부에서 열린 국민대표회의에 참여 했다가 안창호, 이승만, 이시영의 밀명을 받는다. 이미 당시에 사회주의자로서 이르쿠츠크파 였던 그가, 상해임시정부의 행방을 놓고 갈등이 첨예했던 시기에 안창호, 이승만, 이시영의 밀명을 따로 받는다는 것이 설명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만약 임호(무장)이 임호(태껸)과 같은 인물이라면, 설명은 쉬워진다. 바로 임호(태껸)의 장인 윤정석을 통한 인간관계로 이미 서로 뜻을 맞춘 적이 있다고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데릴사위로 들인 임호(태껸)가 장인의 일을 도왔었다면, 안창호와의 관계, 그리고 독립협회의 주요 인사들이었던 이승만, 이시영과의 관계는 수월하게 설명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정리하면 임호(태껸)는 장인어른 윤정석을 통해서 안창호와 서로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혹은 최소한 필요해진 순간 안창호와 접근할 수 있는 관계이다. 윤정석이 독립협회와 깊은 관계를 맺었다 하니, 이승만 역시도 관계가 있었다고 추론할 수 있다. 다른 한편에 임호(무장)은 공훈록의 기록에 따르면 안창호, 이승만, 이시영으로부터 밀명을 받을 정도의 관계를 갖고 있었다. 이 두 인물묶음은 안창호와 이승만 두 인물과의 관계를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다.
여기서 하나 더 흥미로운 점이 있다. 보인학회와 보인학교의 결성과정에서 특별한 주체 중 하나는 바로 기생들이다.
여기서 다시 연상되는 인물은 1화에서 언급된 고재덕과 송덕기이다. 우리는 1화에서 임호의 제자 중 나이가 제일 많은 맞이가 고재덕이라는 피리 명인임을 얘기해주었다. 송덕기 역시 라디오에서 노래를 할 정도로 노래를 잘 했던 인물이었다. 고재덕은 1889년생이므로, 이미 1908년 즈음엔 성인인 20살이다. 고재덕이 임호와 인연을 맺었다는 것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자. 임호(태껸)-윤정석을 통해 보인학회의 네트워크로 연결이 되며, 이 흐름은 당대의 많은 기생과 예인들과도 연결된다는 것이다.
고재덕은 민악과 정악을 고루 잘하는 것으로 평가받는데, 그 계기 중 하나로 외가에는 민속음악을 하던 이가 있고, 그의 집이었던 황학정 바로 밑 사직골 근처에 이왕직 악사들이 모여 살았기 때문이라고 전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스승이 정해져있던 것은 아니다.[11] 이는 그가 음악을 할 당시에 매우 다양한 예인들을 접할 수 있던 계기가 있었던 것으로 해석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고재덕의 20대 초반은 웃대 일대 주민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예인까지도 학교설립운동에 동참하고, 학문뿐이 아니라 다양한 기술과 기예를 배우기를 장려하던 때였던 것이다.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서 음악을 배울 수 있었던 맥락이 숨어있을 수도 있다는 상상을 하게 해준다. 고재덕뿐만 아니라 송덕기가 다재다능한 인물로 성장했던 배경도 바로 이런 환경이 있던 것이 아니었을까.
앞선 안창호의 강연 이야기 인용문에는 송덕기와 임호의 관계에 있어서 중요한 단서가 나왔다. 바로 송덕기가 ‘필운학교 1기 졸업생’이라는 것이다. 즉 개교 시점인 1908년에 송덕기가 필운학교에 입학했다. 그리고 이는 송덕기가 학교를 다니는 시점과 임호로부터 태껸을 집중적으로 배우는 시기에 대한 기존 연구와 딱 아귀가 맞는다.
국내에서 송덕기의 전기에 가까운 거의 유일한 문헌인 공현욱의 석사논문 '송덕기의 생애와 택견 형태 및 전수내용'(2012)에 따르면 송덕기가 13살이 되는 1905년부터 3년간 큰형님으로부터 태껸을 배웠고, 1908년부터 본격적으로 임호로부터 배운 것으로 정리하였다. 임호는 필운동에 살았고, 고용우의 회고에 따르면, 임호의 집은 배화여대 부근이라 하였으므로 필운학교와는 아주 가까웠을 것이다. 필운학교는 필운동 31번지로, 매동초와 배화여대 사이에 있다.
태껸을 했던 사람과 친척이었던 분께서, 고른 붓글씨의 구절이 ‘수심연무 이무회우’인 것은 그저 우연의 일치였을까? 혹은 ‘이문회우 이우보인’이라는 문구에 익숙해진, 태껸을 익혔던 사촌 형께서 평소에 해주셨던 말씀에 영향을 받으신 것일까? 이제 와서 알 수는 없지만 절묘한 대구를 이루고 있다는 점 정도로 짚고 넘어가자. 이 이야기는 이후 임호(장충)을 다룰 때 좀 더 나아가 논하도록 하겠다.
이제 글을 정리해보자. 임호의 장인 윤정석은 임호(태껸)의 장인이 보인학교의 교장이라는 단서를 통해 찾아낸 인물이다. 다행히 보인70년사를 통해 그의 행적에 접근이 가능해졌다. 보인학회와 보인학교의 설립과정에서 그의 장인 윤정석(尹晶錫)과 보인학회·보인학교 네트워크를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윤정석이 보인학교 초대 교장이었다는 점은 임호의 사회적 위치와 연결된다.
보인학회는 1908년 3월 결성되어 6월 보인학교를 세웠다. 군대가 강제해산된 이후, 시위대 소속 무관들과 지역 원로가 주축이었으며, 고종 측근 한규설, 의학자 지석영, 언론인 장지연, 국어학자 주시경, 독립운동가 안창호 등이 깊이 관여했다. 특히 1908년 5월 안창호가 도렴동에서 강연을 열어 800여 명을 모았고, 송덕기가 이를 직접 들었다는 증언이 남아 있다. 이는 송덕기 필운학교 설립(1908년 9월)과 동시에 입학한 1기이자 졸업생이란 사실과 맞물려 송덕기의 학업과 임호의 태껸 전수 시기가 딱 맞게 겹친다는 흥미로운 사실까지 이어진다.
윤정석은 ‘서민들의 열과 땀으로 세운 학교’라는 보인학교의 정신을 강조하며, 실천하였고, 안창호의 호응을 통해 유추해보건데, 신민회 활동과도 연관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를 통해 임호(태껸) 역시 안창호, 이승만, 이시영 등과의 접점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아진다. 실제로 임호(무장)는 1923년 상해 국민대표회의에서 이들로부터 밀명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어 두 임호의 동일성 가능성을 강화한다. 또한 보인학교 설립에는 기생과 예인들의 참여가 컸으며, 이는 임호의 제자 고재덕, 송덕기와 같은 예인·체육인들과의 인맥과 이어진다.
결국 보인학회와 보인학교, 필운학교, 분원학교를 잇는 흐름 속에서 임호(태껸)은 무관, 교육자, 예인, 독립운동가 네트워크와 교차했다. 윤정석의 딸과 임호(태껸)가 결혼하고 데릴사위가 되었다는 것은 임호(태껸)이 단순한 무예인에 그치지 않았으며, 윤정석은 임호를 계몽운동과 독립운동의 핵심 인물들과 연결하는 통로였음을 보여준다. 이는 임호(태껸)와 임호(무장), 임호(분원)과 동일 인물일 가능성을 설명하는 중요한 고리로 작용한다. 끝.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보인고등학교”.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3520
[2] 보인70년사편찬위원회, 보인중학교, 보인상업고등학교, 『보인70년사 1908-1978』, (1978). 링크
[3] 위의 책, 23~5쪽.
[4] 위의 책, 23~4쪽.
[5] 위의 책, 28쪽.
[6] 위의 책, 37쪽.
[7] 위의 책, 28쪽.
[8] 위의 책, 28~9쪽.
[9] 위의 책, 31쪽.
[10] 위의 책, 31쪽.
[11] 임정미, (2014). ‘피리 명인 고재덕의 <상령산> 선율 연구’ 『한국악기학』 제11호, 134쪽.
[12] KBS한국방송, 송덕기, 이보형 외, (1984.02.12). 『KBS문화강좌』, ‘선조의 수련세계(구술자: 송덕기)’
[13] 고용우의 인터뷰(2015.9.20., LA), ‘[택견사 탐구] 항일 독립운동과 택견(3)’에서 재인용. https://www.mooye.net/152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