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6 사)윗대태껸(택견, Taekkyeon)협회 & 강태경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단 출처를 밝히는 경우 비영리로 사용 가능합니다.
윗대태껸협회 이사 강태경
지난 화에서 윤정석은 보인학교의 초대교장으로서 개화기 지식인들과 관련이 있는 인사로 비춰졌다. 하지만 이는 윤정석의 진면목을 다 담기에는 부족한 묘사이다. 윤정석은 교육사업뿐만 아니라 대한천일은행의 취체역(현재 개념으로는 이사(理事))을 역임하고 여러 개의 광산을 경영하였으며, 경성상업회의소의 회계원으로 활동하는 등 상당히 높은 지위에 있는 재력가이자 경제인으로서 활동하였다. 이번 편에서는 그의 경제인으로서의 활동의 흔적을 살펴보면서 윤정석을 둘러싼 인물관계를 파악하고, 그 의미를 찾아보도록 하겠다.
특히 주목할 것은 윤정석이 당시 무관 출신으로서 경제인으로 성장한 백완혁(白完爀, 1856~1938), 성문영(成文永, 1870~1947) 등의 인물들과 아주 긴밀하게 사업을 같이 했다는 것이었다. 이는 보인학회가 인달방의 인우회와, 무관들로 이루어진 보민회의 연합이었던 점, 또한 윤정석이 당시 군부협판인 엄주익을 도와 양정의숙을 설립하는데 참여했던 것에서 보이듯 교육운동에서 당시의 군관들과 연관되었던 점과도 일맥상통한다. 즉 이번 화에서는 윤정석이 다방면에서 무관 출신의 경제인들과 상당히 긴밀한 동업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다는 것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휴재기간 동안의 연구 과정에서 단체사진 속 윤정석을 특정할 수 있는 근거들을 찾게 되었으며 이 덕분에 윤정석의 얼굴을 파악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다른 사진들에서도 윤정석을 특정할 수 있게 되었다. 사진 속 윤정석은 양복을 종종 입었으며, 이는 이번 화가 다루는 그의 재력과 경제인으로서의 모습과도 조응한다.
위 사항들을 종합해보면 임호의 장인이었던 윤정석은, 무관들과 긴밀히 관계를 맺었던 재력가이자 경제인이었으며, 그 재력을 바탕으로 기우는 나라를 붙잡아보려 하기도 했으며, 애국계몽운동인 교육운동을 후원하고 앞장서는 행보를 보인 인물로 그려지게 된다. 임호의 장인이자 후원자였던 그가 이런 상당한 실력자였다는 것은 임호의 행적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많은 참고점을 제공한다.
3화를 쓸 당시만 해도 윤정석의 사진을 특정하지 못하고 있었으나, 최근 연구를 통해 윤정석을 특정할 수 있게 되었다. 윤정석은 1회 졸업식 사진에서 가운데에 양복에 넥타이를 맨 사람으로 특정된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우선 초대 교장의 지위라는 점을 고려했을 때 가운데에 앉아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맨 앞줄의 인물들은 총 10명으로 짝수라서 왼쪽부터 5번째, 6번째 인물로 좁혀진다. 그런데 윤정석에 대한 추가 조사 중, 프로젝트 팀원인 우용곡 작가와 양정의숙연구회 회장인 이영석 선생의 도움으로 6번째 인물인 흰 옷에 다리를 꼬고 있는 인물은 한만용(韓晩容)이라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다. 따라서 왼쪽에서 1열 5째인 가운데의 양복을 입은 인물이 윤정석이다.


보인학교 제1회 졸업식 사진(1911). 맨 앞줄 가운데 넥타이를 맨 사람이 윤정석으로 추정된다.
맨 앞줄 맨 왼쪽 제복이 정현, 오른쪽에서 5번째 흰 옷에 다리를 꼰 인물은 한만용이다.
오른 쪽은 윤정석 사진의 확대본. 출처 : 『보인70년사』(1978)
이렇게 윤정석을 추정하고 나면 그의 모습을 담은 다른 사진들도 확인할 수 있다. 보인학교의 졸업식 사진들에서도 한동안 윤정석은 계속 등장하며, 한만용의 장례식장에서도 윤정석은 자리를 하고 있다.

- 보인학교 제6회 졸업기념(1916). 둘째줄 오른쪽에서 4번째가 윤정석.

- 보인학교 제8회 졸업기념(1918). 앞줄 왼쪽에서 4번째가 윤정석.

- 보인학교 제9회 졸업기념(1919). 앞줄 오른쪽에서 4번째가 윤정석.

- 보인학교 제11회 졸업기념(1921). 뒷줄 왼쪽에서 3번째가 윤정석.
📷 [사진 삽입 공간 : 한만용의 추도식(1926) 사진 및 박영근 교장 사진]

한만용의 추도식(1926). 오른편 앞에서 두번째 줄 검은 양복이 윤정석.

옆의 인물은 6년제 보인학교 초대 교장 박영근
아래 왼쪽은 확대사진. 출처 : 양정의숙연구회 이영석 회장,
아래 오른쪽은 6년제 보인학교 초대 교장 박영근. 출처 : 『보인70년사』(1978)
위처럼 확인된 바와 같이, 윤정석은 보인학교의 중요 일정에 지속적으로 참여하였고, 사진 속 인물의 위치를 고려해도 항상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는 것이 확인된다. 예를 들어 한만용의 추도식 사진(1926)에서도 윤정석의 오른편(머리를 삭발한 검은 콧수염의 인물)에 앉아있는 인물은 보인학교가 6년제로 승격된 후 초대 교장인 박영근이다. 역대 초대 교장이 나란히 자리를 하고 있다는 것이 확인된다. 이렇게 윤정석은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애국계몽운동에 헌신한 사람이라는 것이 파악된다. 참고로 보인학교는 1917년 재정난으로 폐교 위기에 처한 필운학교 학생 100명을 수용했는데, 그 시기까지 윤정석이 보인학교에 관여하고 있었음을 고려할 때, 필운학교 학생의 인수에 필요한 도움도 제공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하겠다. 송덕기는 필운학교 1기생이며, 이 학교를 다니던 시기에 임호로부터 태껸을 배웠다.
윤정석의 행적은 여러 문헌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윤정석은 경제인으로서 활동하면서 그가 법인의 임원 이취임을 함에 따른 등기 서류와 광산과 토지임대 같은 부동산 자산 취득에 따른 등기사항이 기록으로서 남아있었기 때문에 그의 행적을 추적할 수 있는 굵직한 기록들이 상세하게 남아있다. 아래 표로 윤정석의 행적에 대한 연대기적 기록을 정리해보았다. 윤정석이 소속, 취득한 자산과 같은 사항을 소속에 적었고, 직책과 업무는 그 소속에서의 직책과 업무를 간략히 담았다. 그리고 그 일을 함에 있어서 함께 일했거나 연관된 중요 인물들을 추려서 표에 함께 기록했다.
| 번호 | 날짜 | 소속 / 자산 | 직책과 업무 | 주요 관련 인물 |
|---|---|---|---|---|
| 1 | 1901~ | 대한천일은행 | 주주 | 고종, 중역 백완혁 |
| 2 | 1902~1905 | 대한천일은행 | 중역 | 고종, 백완혁 |
| 3 | 1902.07.23 | 혜민원 | 참서관으로 주임관 6등에 임명 | 고종, 동기 김만성 등 |
| 4 | 1902.10.03 | 혜민원 | 참서관에서 의원면직 | 고종 |
| 5 | 1902.10.04 | 불분명 | 황실 어진 봉안 행사 참여로 6품 승진 | 고종 |
| 6 | 1903.10.22 | 불분명 | 가자되어 정3품으로 승진 | 고종 |
| 7 | 1905.02 | 양정의숙 | 설립을 지원 | 엄주익, 한만용, 안종원 |
| 8 | 1905.07.20 | 경성상업회의소 | 회계원 취임 | 회계원 백완혁 |
| 9 | 1906.03.05 이전 | 한미협동창고회사 | 자금대부, 화물보관, 화재보험 등 | 미국과 협업 |
| 10 | 1906.03.05 이전 | 동미운송부 | 철도화물운송업 | 합자회사 |
| 11 | 1906.04.11 | 경성상업회의소 | 백동화 교환기한 연장 건의 | 탁지부대신 민영기 |
| 12 | 1906.06.01 | 한성농공은행 | 감사 취임 | 창립은행장 백완혁 |
| 13 | 1906.06 | 대한천일은행 | 취체역(이사) 취임 | 조진태, 백완혁 |
| 14 | 1906.여름 | 한성수형조합 | 조합원 | 조합원 백완혁 |
| 15 | 1906.09 | 창희조합 | 조합원, 미곡객주업 | 조합장 백완혁 |
| 16 | 1906.10 | 창희조합 | 지주, 찹쌀 8석 입고 | - |
| 17 | 1906.11 | 창희조합 | 지주, 정조 311석 입고 | - |
| 18 | 1907.02.23 | 호남철도주식회사 | 영업부장 | 총무부장 성문영 |
| 19 | 1907.06.24 | 태극학회 | 태극학보 발간 유지비 후원 | 성문영과 함께 후원 |
| 20 | 1907.08 | 서서동막합자상회 | 조합원 | 백완혁 등 |
| 21 | 1907.10 | 한성부민회 | 헌품위원장 | 일본 황태자 |
| 22 | 1908. | 한성공동창고 | 감사 | 순종, 백완혁 |
| 23 | 1908.03.08 | 보인학회 | 학회설립에 참여 | 한만용, 엄주익 |
| 24 | 1908.05.13 | 보인학회 | 군중계몽대회, 안창호 초빙 | 안창호, 송덕기 |
| 25 | 1908.05.25 | 대한학회찬성회 | 발기인으로 참여 | 백완혁, 박은식 등 |
| 26 | 1908.06.08 | 보인학교 | 초대 교장, 보인학교 설립 | 한만용, 정현 등 |
| 27 | 1908.08.25 | 기호흥학회 | 찬무원으로 참여 | 성문영, 백완혁 등 |
| 28 | 1909.02.18 | 한성공동창고주식회사 | 감사 | 순종, 사장 조진태 등 |
| 29 | 1909 | 한성상업회의소 | 상의원 | 부회두 성문영 등 |
| 30 | 1909.01.21 | 충청북도 단양군 등 흑연광산 | 광업권 허가 획득 | 공동 광업권자 조진태 |
| 31 | 1909.06.01 | 경상북도 영천군 금동광산 | 광업권 허가 획득 | 공동 광업권자 김기영 |
| 32 | 1909.10.05 | 평안북도 삭주군 흑연광산 | 광업권 허가 획득 | 공동 광업권자 음동익 |
| 33 | 1909.11.17 | 평안북도 창성군 흑연광산 | 광업권 허가 획득 | 공동 광업권자 익명 1인 |
| 34 | 1910.05.03 | 평안북도 삭주군 풍면 흑연광산 | 광업권 대표자 | 공동 광업권자 음동익 |
| 35 | 1910.08.18 | 대한천일은행 | 취체역 자격, 6등 태극장 수여 | 순종 |
| 36 | 1911.05.03 | 경상북도 영천군 금동광산 | 광업세 미납으로 허가 취소 | - |
| 37 | 1911.05.22 | 경상북도 영천군 금동광산 | 취소처분 취소로 광업권 회복 | - |
| 38 | 1912.02.25 | 경기도 수원군 등 국유지 | 농지개간을 위한 국유지 대부 | 공동 차입인 2명 |
| 39 | 1912.10.31 | 평안북도 삭주군, 창성군 광산 | 광산업 스스로 폐업함 | - |
| 40 | 1913.12.26 | 평안남도 순천군 광산 | 광업권 허가 획득 | 대표자 강성구 |
| 41 | 1914.02.20 | 경기도 고양군 목동평 등 | 농지개간 국유지 대부 | - |
| 42 | 1914.09.25 | 경기도 고양군 목동평 | 이용권을 양도함 | - |
| 43 | 1914.12.25 | 경상북도 영천군 금동광산 | 이용권을 양도함 | - |
| 44 | 1915.02.03 | 경기도 고양군 오견대 | 이용권 양수 허가 획득 | - |
| 45 | 1916.05.20 | 평안남도 순천군 금동광산 | 광업권자 주소 변경 | - |
| 46 | 1916.12.03 | 경기도 진위군 간석지 | 사업성 없어 간석지 반환 | 공동 허가인 이하영 |
| 47 | 1917.10.06 | 경기도 진위군 오성면 간석지 | 반환한 대부지 허가 무효처분 | 공동 허가인 이하영 |
| 48 | 1937.01.30 | 대륙호모공업주식회사 | 호모(고무)제조회사 감사역 취임 | 이규복 취체역 취임 |
| 49 | 1938.07.25 | 합자회사 선광상회 | 1,800원 출자를 한 사원 | 대표사원 문승근 |
| 50 | 1939.01.30 | 대륙호모공업주식회사 | 취체역 취임 | 권영순 취체역 취임 |
| 51 | 1939.03.03 | 대륙물산주식회사 | 감사역 취임 | 취체역 권영순 등 |
| 52 | 1941.01.31 | 대륙호모공업주식회사 | 취체역 취임 | 대표취체역 이규원 등 |
| 53 | 1941.02.28 | 대륙호모공업주식회사 | 감사역 사임 | - |
윤정석에 대해서는 대략적으로 훑어보기에도 상당히 많은 기록이 남아있다. 윤정석에 대해 특기할만한 점들을 추려 본다면, 그가 1901년부터 이미 대한천일은행에서 주주로서 참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잠시 혜민원 참서관으로 관직생활을 하기도 하지만, 이는 그의 이력에서 매우 짧고, 주된 활동은 경제인으로서의 활동이라는 것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그리고 지난 화에서 다룬 보인학회와 보인학교의 활동 외에도 1905년 엄주익을 도와 양정의숙 설립을 지원하였고[1], 1907년에는 태극학회를 후원[2]했으며, 1908년에는 대한학회찬성회[3]와 기호흥학회를 후원[4]하는 등 애국계몽운동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이 확인된다. 그리고 이런 학회의 후원에서도 백완혁과 성문영이 연이어 함께 등장하고 있다는 것 역시 의미가 있다. 참고로 양정의숙의 엄주익의 집안과 성문영의 집안은 사돈지간이기도 하며 이들은 황학정으로 연결되어있는데, 엄주익은 황학정의 사계장을 역임했고, 성문영은 사두를 역임했다.[5]

(좌) 엄주익, 출처 : [엄주익]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우) 성문영 궁체 사진. 출처 : 국궁신문 http://www.archerynews.net/news/view.asp?idx=1044
윤정석이 취급했던 사업을 살펴보자. 윤정석의 초반 사업은 물류업이었다. 그는 1906년 서울역 주변에서 한미협동창고회사를 운영했는데 이 회사는 미국과 협업하였던 회사로 자금대부, 화물보관, 화재보험, 상품 기탁업을 하는 업종이었으며, 동미운송부는 철도화물운송업을 하는 곳으로 역시 한미협동창고회사 주변에 있었다고 한다. 윤정석은 미곡 객주업을 했던 창희조합에 조합원으로 참여했으며 본인이 지주이기도 하였다.[6] 1907년에는 호남철도주식회사의 영업부장을 하였다.[7] 1908, 1909년에는 한성공동창고에서 감사직을 하였다.
물류업을 수행하는데 필수적인 안전한 운송과 보관을 위해서는 재산을 안전하게 지키고 관리할 무력이 출중한 인물들이 필요함은 당연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윤정석이 무관들과 긴밀한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있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윤정석이 물류업을 다루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는 백완혁, 성문영과의 동업관계와도 연관성이 있다. 둘 다 무과출신의 걸출한 경제인이며, 성문영은 특히 『조선의 궁술』 집필자이며, 1927~1947년 동안 황학정의 사두를 역임했다. 또한 임호를 데릴사위로서 들이는 맥락도 물류업과 긴밀한 연관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지난 글에서 이수영이 윗대지역의 장사들에 대응하는 아랫대의 장사들이 ‘오강장사(五江壯士)’라고 칭했다는 것을 상기해보자. 오강은 바로 서울과 충청권을 연결하는 한강의 주요 포구를 일컫는 말로, 한강과 연결되는 서울의 주요 물류거점이다.
윤정석은 금융계에서도 중요 임원으로 활동하였다. 대한천일은행에서는 주주이자 중역으로 활동했었고 1906년에는 취체역(현재의 이사(理事))을 하기도 한다.[8] 1906년이 금융인으로서 윤정석의 행보가 뚜렷하게 드러나는 해인데, 같은 해 한성농공은행에서도 감사로 취임했다.[9] 역시 같은 해 조합원으로 있던 한성수형조합은 어음의 할인 및 대출을 제공하는 상업기관이었으며, 역시 1906년에 시작한 창희조합은 미곡객주업으로서 지주들의 쌀을 맡아 보관하고 적기에 판매하면서, 그 쌀을 담보로 금융을 제공하기도 하였던 물류업과 금융업이 혼재된 성격을 가진 사업이었다. 1910년에도 대한천일은행에서 계속 취체역을 하고 있었던 기록이 남아있다. 이러한 행적은 윤정석이 단지 자산이 많았던 것이 아니라 경제계에 두루 넓은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있었다는 점을 드러내준다.
또한 윤정석은 자신의 사업만 했던 것이 아니라 경제인들을 대표하는 조직을 운영하는데 참여하고, 경제인들의 입장에서 정책에 개입하기도 했던 기록이 남아있는 인물이다. 그는 경성상업회의소에서 백완혁과 함께 1905년에 회계원에 취임한 뒤[10] 1906년 경성상업회의소의 일원으로서 탁지부대신 민영기에게 백동화 교환기간을 연장하도록 건의하기도 하였다.[11] 한성수형조합, 농공은행 금융기관의 참여 역시 통감부의 화폐정리사업에 따른 금융난과 상업적 충격을 완화하기 위한 성격이 강했다. 1909년에도 한성상업회의소에서 상의원으로 참여하면서 그가 가진 경제인으로서의 무게감이 어느 정도 되었는지 가늠할 수 있게 한다.
윤정석은 1909~1910년 5개의 광산의 광업권 허가를 취득하면서 본격적인 광산업에 뛰어든다.[12] 앞서 했던 사업들을 정리한 것인지, 아니면 사업을 유지하면서 확장한 것인지 까지는 파악되지 않는다. 한 동안은 광산업과 토지사업에 대한 등기 기록만이 나오다가 1937년에 고무제조회사인 대륙호모공업주식회사의 감사역 취임 기록이 등장하고,[13] 1938년에는 선광상회에 출자를 하였으며,[14] 1941년까지 같은 대륙호모공업주식회사에서 취체역과 감사역을 취임하거나 사임하는 기록이 남아있다.[15]
그의 왕성했던 1906~1910년 시기의 활동과 대조적으로 1910년 경술국치 이후에 윤정석이 경제인으로서의 정책적 활동은 더 이상 나오지 않았다는 점은 고민해볼 지점이 있다. 국운이 이미 기운 다음에는 교육운동으로 본인의 활동을 수렴시켰을 가능성이다. 보인학교의 졸업사진에는 윤정석이 1921년까지 꾸준히 등장하며, 한만용 추도식인 1926년에도 등장하는 것을 보면 그가 경술국치 이후 경제정책으로서 조선에 도움되는 일이 불가능하자 사업을 하면서 보인학교를 통한 교육활동에 초점을 맞춘 것으로 추정해볼 수 있다. 혹은 이후 후속편들에서 추정해보겠지만, 자신의 사위인 임호의 활동을 후원해주었을 가능성도 열려있다.
📷 [사진 삽입 공간 : 다동과 대한천일은행 위치도]

윤정석의집이있던다동(왼쪽),대한천일은행의위치(오른쪽)
참고로 위 표에서 나오는 기록들이 윤정석 한 명의 기록임을 특정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은 바로 그의 주소 표기 덕분이다. 당시의 등기는 인물을 표시하고 인물의 주소를 표기하는데, 윤정석의 주소는 “경성 남부 다동 9통 2호(京城 南部 茶洞 九統 二戶)”로 등장한다. 이후의 윤정석의 주소는 일관되게 다동(茶洞)을 벗어나지 않는다. 다동은 당시 청계천 일대의 부유한 상인들이 주로 살던 곳이다. 청계천을 중심으로 형성된 상업의 중심지였던 다동은 그의 경제력을 고려했을 때에도 충분히 개연성이 있는 위치이다. 또한 보인학교가 있었던 내수동하고도 크게 멀지 않은 곳이며, 대한천일은행과도 매우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 ‘프로젝트 임호’의 성격에 초점을 맞추어 윤정석의 네트워크를 정리해보도록 하겠다. 윤정석은 민족은행 계열이었던 대한천일은행에서 활동하고, 경성상업회의소 활동, 한성수형조합활동, 농공은행 활동, 한성상업회의소 활동 등 1901~1910년 고종이 주도한 정책과 긴밀이 협조했던 경제인으로 볼 수 있다.
특히 윤정석이 대한천일은행에서 일하면서 내장원에서 고종황제의 비자금 관리와 지갑 역할을 했던 이용익과 함께 일을 했다는 점도 주목해볼만 하다. 이용익은 함경북도 명천 출신의 보부상을 했던 종친이다. 이용익은 고종과 명성황후의 신임을 받았다. 1905년 을사조약으로 외교권이 박탈된 이후 고종은 심각한 위기감 속에서 조약의 부당함을 알리려고 시도했고 이용익을 통해서도 해외에 을사조약을 부당함을 알리려고 다방면으로 시도했었다. 결국 1907년 헤이그밀사까지 시도하는데, 이 시기 고종이 가진 친위조직과 정보력과 비자금 등 모든 역량이 총동원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헤이그밀사 파견을 계기로 일본은 고종을 폐위시켰을 정도로 고종의 시도는 절박한 것이었다.
그런 시기에 고종은 여러 인물들과 소통하기 위해 당연히 팔장사 같은 인물들을 동원하려 했을 것이고, 이용익처럼 자금을 관리하는 인물 역시 절대적으로 중요한 인물이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윤정석이 1906년에 대한천일은행의 취체역이되고, 그의 데릴사위가 왕의 호위와 깊은 연관을 맺는 친위조직인 팔장사 중 으뜸이었다는 것은 고종과 황실과 깊은 연관성이 있었을 가능성을 추정해볼 수 있게 한다.
임호는 특별한 직업을 가지지 않고 장인의 도움을 받으면서 생활했다고 하는데, 윤정석의 활동량이나 재력, 영향력을 보면 의미 없이 운동 잘하는 백수 사위를 둘 만한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윤정석은 경제분야와 교육분야에서 망해가는 나라를 붙잡고 있던 인물이었고, 제3화에서 확인하였듯이 안창호나 주시경 같은 당대의 내로라하는 지식인들이 따라 준 어른이었다.
윤정석이 함께 활동했던 엄주익, 한만용 같은 군대와 밀접한 고위직 인물들이나 백완혁 성문영 같은 무관 출신 경제인들 역시 임호가 팔장사를 했다면 분명 인연이 생길 만한 인물들로서, 임호가 다양한 방식으로 윤정석의 활동에 도움을 주었을 가능성을 열고 보아야 한다. 특히 백완혁과 성문영과 윤정석이 여러 사업체에서 깊이 동업하는 상황은 윤정석과 무인 네트워크가 사업적으로도 아주 긴밀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문영은 탁월한 활 솜씨로 고종의 마음에 들었던 사람이며 엄비(엄귀비, 순헌황귀비, 영친왕의 생모)집안과도 사돈집안의 인물이라 고종이 신임했던 경제인일 가능성이 높다. 백완혁은 을사조약 이후부터 친일을 하지만 성문영은 경제인이되 적극적인 친일까지는 않은 인물이다. 어쨌든 윤정석의 1910년(경술국치)까지의 활동 속에서 윤정석, 백완혁, 성문영 등은 교육관련 후원에서도 함께 움직였다. 추후에 깊은 연구가 필요한 영역이라고 할 수 있겠다.
윤정석이 물류 쪽부터 사업을 했다는 것 역시 주목할 만한 지점이다. 물류산업은 전통적으로 보안과 경호, 전국적인 네트워크가 필수적으로 따라주어야 되는 산업이다. 따라서 군대에서의 경험과 군과 관련된 인맥은 물류산업에 있어서 상당히 유리한 위치를 점할 수 있다는 것을 유추해볼 수 있다. 이 부분 역시 그가 왕의 호위를 맡는 팔장사를 할 정도의 인물을 데릴사위로 맞이했다는 것과 맞아떨어진다. 윤정석은 개인의 사업을 위한 호위 때문에라도 임호라는 인물이 필요한 위치에 있었다.
그리고 윤정석의 내용은 임호의 최후에 대해서도 의문을 남기게 한다. 송덕기는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는 임호의 임종을 지켰으며, 자신의 배를 쓸어내려 주었다고 하였고,[16] 밝터출판사와 인터뷰에서는 임호는 ‘필운동에서 나서 필운동에서 돌아가셨다. 쉰 둘 정도 나이에 굶어서 죽었다’고 했다. 또한 임호가 자식이 없고 경제적으로 매우 궁핍했다고 하였다.[17] 하지만 이준서는 그것이 아니라 임호가 만주에 독립운동을 하러 갔다 혹은 금강산으로 갔다는 비화를 전하기도 했다. 이 이야기 역시 결국 출처는 송덕기일 것이므로, 진술상의 혼란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윤정석의 기록은 어떻게 해석되어야 할까? 1941년 까지 여러 광산을 운영하고 주식회사의 임원을 했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매우 풍족했을 것이다. 1941년은 임호를 1882년생으로 추정했을 때 60세일 때이다. 윤정석의 경제력을 고려할 때 사위가 굶어서 죽는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 된다. 송덕기의 밝터출판사와의 인터뷰 진술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무언가 심각한 모종의 이유가 있어야 하며, 한 편으로는 이준서가 비화로 들은 이야기, 즉 임호가 독립운동을 하러 만주에 갔다는 이야기가 사실일 가능성에도 무게를 더한다.
태껸인 임호라는 개인에 대한 기록이나 자료가 많지 않은 상황에서 그의 가족관계는 매우 중요한 정보이다. 그가 데릴사위로 들어간 집안의 장인어른인 윤정석이라는 인물은 그런 의미에서 필히 상세히 검토해보아야 하는 인물이다. 임호가 데릴사위였다는 이야기는 임호의 혼인 이후의 삶에 있어서 장인의 영향이 상당히 컸을 것이라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다행스럽게도 윤정석은 거물급 경제인이자 교육인으로서 다양한 기록과 발자취를 남긴 인물이었다. 태껸인 임호의 행적이 뚜렷하지 않지만 왕의 호위를 맡는 팔장사였다는 점, 훌륭한 인품과 외모를 바탕으로 사람들을 이끌고 다녔다는 이야기는 윤정석이라는 인물의 족적과도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윤정석이 갖추고 있는 주변 네트워크가 황실과 무관 출신 경제인들이었다는 점에서도 임호가 갖추었을 법한 네트워크와 겹치며, 이는 임호가 윤정석의 일을 도왔을 가능성도 충분히 열게 해주는 정황이다.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양정의숙'
[2] 『태극학보』 제14호(1907.8.24) 「광고-찬성기부회원 방명록」
[3] 『대한매일신보』 (1908.5.26), 「광고-대한학회찬성회발기인연명」
[4] 『기호흥학회월보』 제1호(1908.8.25), 「기호흥학회임원 및 회원방명록-찬무원」
[5] 『황학정백년사』 (2001) p.124
[6] 홍성찬(2007) 「한말 서울 동막의 미곡객주 연구」, 『역사학보』, p.150
[7] 『승정원일기』 1907년 2월 23일.
[8] 『황성신문』 (1906.6.6) 「광고-천일은행임시총회」
[9] 『황성신문』 (1906.6.1) 「광고-한성농공은행취립위원회」
[10] 『황성신문』 (1905.7.20), 「잡보-상회임원」
[11] 『황성신문』 (1906.4.11), 「잡보-상회의연기청원」
[12] 『관보』 1909.1.21; 1909.6.1; 1909.10.5; 1909.11.17; 1910.5.3
[13] ‘商業及法人登記’. https://db.history.go.kr/id/gb_1937_04_28_a30830_00350
[14] ‘商業及法人登記’. https://db.history.go.kr/id/gb_1938_08_30_a34870_00310
[15] ‘商業登記’. https://db.history.go.kr/id/gb_1941_05_0